44화. 새로운 인연들 (1)
“지금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라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습니까?”
“이거면 되겠습니까.”
이집트 통신으로부터 사건 당일의 통화 기록을 받아 두었었다.
‘81’로 시작하는 일본의 전화번호만이 아니라 IAEA 본부가 있는 오스트리아와 뉴욕의 전화번호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그 기록이 세 장 가까이 채워져 있었다.
고개를 든 조나단의 눈이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이게 밝혀지면 세상이 뒤집어질 겁니다. 지금 일본 정부는 사전에 몰랐다며, 천재지변으로 인한 불가항력이라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들이라면 당연히 그러고도 남을 겁니다.”
“이제 미스터 서의 말을 믿습니다. 저를 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나단이 서둘러 인터뷰를 끝내려고 했다.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특종이 눈앞에 있는데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진혁이 그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할 말이 있습니다.”
“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막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분들께 진정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그건 미스터 서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대로 듣지 않는 놈들이 문제지.”
“그렇다고 제 스스로를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가진 게 없는 사람이라 그런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을 은폐한 일본 정부와 일본전력의 사과를 받아내고 싶었습니다. 그게 이번 투자를 결행한 동기이고, 이렇게 사실을 밝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스미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인터뷰를 선뜻 받아들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진혁의 말이 이어졌다.
“비록 막지는 못했지만 저의 무능 때문에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 수익금으로 세계 최고 변호사를 초빙해 무료 법률 자문팀을 운영하겠습니다. 피해를 본 분들과 함께 끝까지 일본 정부와 일본전력을 상대로 싸울 겁니다.”
짝짝짝짝.
저절로 박수가 나왔다.
주변 손님의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조나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피해를 입으신 분들을 대신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반드시 일본 정부와 일본전력의 사과를 받아내게 하겠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받자고 한 일이 아닙니다. 피해를 입으신 분들에게 최소한의 도움이라도 됐으면 싶습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이게 알려지면 더 이상 거짓말은 못 할 겁니다.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그럼.”
인사를 하고 가려던 조나단이 갑자기 돌아서서 물었다.
“혹시 이 일로 명성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명성을 얻으려고 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조나단이 떠나자 계속 듣기만 했던 스미스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제 일생 최고의 투자로 기억될 겁니다. 허락하신다면 저도 돕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부탁드리려고 했습니다. 최고의 변호사를 구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흡족하실 분으로 반드시 구해 드리겠습니다.”
* * *
용건을 마친 진혁은 스미스가 준비한 리무진을 타고 젯다 공항으로 가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시간의 여유가 있었지만 인천 공항에서 바로 집으로 갔다.
희준을 만나면 또 술을 먹게 될 거라, 오늘은 부모님과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반갑게 맞아 주시는 어머니께 선물을 드렸다.
“밥은 아버지 오시면 먹을게요.”
“오늘은 송별회가 있다고 늦으신다고 했어. 우리끼리 알아서 먹으라고 전화 왔다.”
“누가 퇴직하시나 보네요.”
“명예퇴직도 퇴직이라면 퇴직이지. 에휴. 아직 애들이 어리다는데 돈 몇 푼 주고 쫓아내면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라고.”
유럽의 금융 위기는 이집트에만 영향을 준 게 아니었다.
한국의 기업들도 실적 부진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럴 때 경영주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게 정리해고, 명예퇴직이었다.
어머니의 얼굴도 어두웠다.
“성실하고 고향도 같은 직원이라 아버지가 많이 힘들어하셨어. 들어오시면 내가 잘 위로해 드려라.”
“그럴게요.”
“지금 밥 먹을래?”
“조금 쉬었다가요.”
방으로 들어간 진혁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버지는 잔뜩 취해 한밤중에 들어오셨다. 문을 열어 준 어머니가 바로 코를 막았다.
“아이구. 술을 얼마나 마셨대.”
“좀 먹었어. 꺼억.”
“다녀오셨어요.”
“우리 진혁이가 왔구나.”
평소와 달리 아버지가 감정을 표현했다.
“그래도 아들은 반가운가 보네.”
“그럼. 든든한 놈인데. 사업은 잘되고?”
“바쁘지만 재미있게 하고 있습니다.”
“그럼 됐다. 잘했다. 자기 사업 하길 잘했어. 오랜만에 같이 한잔하자.”
“무슨 술을 더 먹어요? 그만 들어가요.”
“며칠 있으니까 다음에 하고 들어가서 쉬세요.”
어머니에게 떠밀려 들어가는 아버지의 축 늘어진 어깨가 진혁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자신이 느꼈던 직장인의 비애를 아버지는 더 많이 느꼈을 거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날 밤 NS통신이 긴급 특종 기사를 내놓았다.
제목부터가 자극적이었다.
《귀 닫은 일본, 사고를 재앙으로. 그들의 거짓말》
지진 보도 직후 원전 이상을 감지한 제보자가 그 사실을 알리려고 일본 정부와 일본전력뿐만 아니라 여러 단체에 전화를 걸어 원전 조사를 요청했으나,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고 사실을 감추기만 급급해 21세기 최악의 재앙을 만들었다며 날선 비판을 했다.
통화 기록의 일부도 증거물로 함께 올렸다.
아울러 제보자가 사고를 막지 못한 죄책감을 느껴 사재를 털어 무료 법률 상담팀을 꾸리기로 했다는 내용도 실었다.
어디에도 진혁의 이름이나 공매도 이야기는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진혁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조나단과 스미스 모두 그를 독점하고 싶은 욕심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기사가 나가자 세계가 난리가 났다.
각국의 방송에서 실시간으로 NS통신의 기사를 내보내면서 일본 정부와 일본전력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눈썰미 있는 독자는 통화 내역에서 IAEA와 뉴욕타임지의 번호를 알아보고 그들도 함께 성토했다.
일본 정부도 요시다 총리로 긴급 대책 회의를 열고 지금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던 태도를 바꿔, 철저한 진상 조사와 함께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하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무섭게 타오른 비난 여론은 오히려 더 거세졌다.
다음 날, 진혁은 그 사실을 조나단에게 들었지만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자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침 식사 후 양복을 입고 태후 빌딩으로 갔다.
이제는 직원이 아니니 방문 신청을 해야 했다.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김선혁 상무를 찾았지만 해외 출장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다행히 노준복은 자리에 있었다.
방문증을 달고 찾아가자 노준복이 반갑게 맞았다. 재고품 준비는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용건이 끝나자 진혁이 일어났다.
“한 팀장님은 몇 층에 계십니까? 인사드리려고요.”
“한 팀장 사정이 좋지 않아.”
“무슨 일 있습니까?”
“맡은 일이 잘 안 풀리나 봐. 아래층이니 가서 좀 풀어 줘.”
“알겠습니다.”
진혁은 인사를 하고 나왔다.
* * *
그 시각, 정인영이 팔짱을 낀 채 사무실 뒤편 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중국으로부터 밀려온 황사로 시야가 뿌옇게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았다.
편견을 깨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오너 일가, 여자로만 봤다. 그래서 보란 듯이 성공해 당당히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의욕적으로 추진한 ‘스페이스 워커’가 논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외국 유명 브랜드를 런칭하지 않고 토종 브랜드로 승부한 게 무리였을까?
중장년층보다는 청소년층을 겨냥한 게 잘못된 것일까?
판매 부진이 심각했다.
그것보다 더 힘든 건 대기업이 아이들까지 과소비를 부추겨 돈벌이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비난이었다.
‘태후’의 이름까지 거론되며 여론이 악화되자, 그룹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후속 광고를 준비해야 하는데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정인영이 이를 악물고 핸드폰을 들었다.
* * *
한지철은 자리에 없었다.
진혁은 그냥 가려 하다가 노준복의 말이 마음에 걸려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의 안내로 문을 연 회의실에서는 한지철이 여직원 한 명과 함께 있었는데, 핸드폰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진혁의 얼굴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다가 손가락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알겠습니다. 오늘까지 확정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급히 통화를 끝낸 한지철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언제 온 거냐?”
“어제 왔습니다. 바쁘신데 온 것 아닙니까?”
“아니야. 그렇지 않아도 머리 좀 식히려던 참이야.”
“그럼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그때 여직원이 수첩을 챙겨 일어났다.
“괜찮아. 지민 씨도 아는 사람이야. 지민 씨를 포상해야 한다고 했던 바로 그 서진혁 대리. 아니, 이제 서 사장이지.”
“김지민입니다.”
“서진혁입니다.”
인사를 하며 진혁은 참 눈이 예쁜 여자라고 생각했다.
중동에 오래 근무하다 보니 여자를 보면 자연스럽게 눈을 보게 되었다. 드러내 놓은 것이 그것뿐이라 습관이 되었다.
김지민은 귀여운 고양이 상이었다. 커다란 눈과 긴 생머리가 어울렸다.
희수도 눈이 예뻤었다.
“미안한데 커피 한잔 부탁해.”
“네.”
김지민이 커피를 준비하는 사이 한지철이 진혁의 독립을 축하해 주고 근황을 물었다.
이집트의 일을 이야기하는 중에 김지민이 커피를 들고 와 나가려고 했다.
“안 바쁘면 같이 이야기를 좀 나눴으면 합니다.”
진혁의 말에 김지민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재고품 때문에 노 과장님을 만났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시던데, 제가 알면 안 됩니까?”
“안 될 건 없어. 너하고 무관한 일도 아니고.”
한지철이 씁쓸한 표정으로 ‘스페이스 워커’의 판매 부진과 비난 여론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룹 이름까지 나오는 것을 홍보실에서 막고는 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야. 그 때문에 그룹 고위층에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나 봐. 후속 광고를 제작해야 하는데 컨셉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진혁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분명히 성공할 사업이었다. 하지만 그건 결과론이었고 그 과정을 생략했다.
이유 없는 성공은 없었다.
충분히 내실을 다지고 인지도를 올려가다가 소비자의 욕구와 맞는 제품을 출시했을 때야 비로소 대박이 되는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기업의 생리상 기다려 주지도, 돌아가는 것도 인정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현 상황에서 제대로 소비자에게 제품을 알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생각을 마친 진혁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혼란스럽다. 지금이라도 중장년층으로 방향을 바꿔야 할지, 아니면 최소한 젊은 직장인을 모델로 세워야 할지.”
“김지민 씨 생각은 어떠세요?”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질문이 향하자 예상치 못했는지 김지민의 눈이 커졌다.
‘진짜 예쁜 눈을 가졌네.’
진혁이 생각하는 사이, 김지민이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지금 타깃층을 바꾸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똑같이 가면 결과도 같을 거라는 건 생각해 보지 않으셨어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타깃층에는 문제가 없어요.”
생긴 것과 다른 강단 있는 태도에 진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진혁이 한지철에게 시선을 돌렸다.
계획을 밝힐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