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새로운 인연들 (2)
“선배, 건방지겠지만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인마, 우리 사이에 그런 말 하지 마. 너하고 무관한 일도 아니잖아. 뭐가 됐든 이 빌어먹을 상황을 벗어나게만 해 줘.”
“오면서 광고를 찾아봤어요. 문제가 좀 있어 보였습니다.”
“어떤 점에서?”
“뭐랄까. 어중간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도저도 아니라는 느낌이었어요.”
스페이스 워커의 광고는 젊은 남녀가 등산복에 바람막이를 걸치고 산에 올라가 들판을 달리는 식이었다.
“그럼 어떻게 바꿔야 해?”
“그 전에 다시 한번 목표를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타깃층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그거야 네 말대로 청소년층으로 잡았지.”
“광고 모델이 미성년자입니까? 요즘 한국의 학생들은 여자 친구랑 손잡고 등산 갈 정도로 시간이 많습니까?”
“……!”
“타깃층과 광고가 전혀 따로 노니 소비자에게 감동을 줄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한지철은 얼굴은 굳었고 김지민의 커다란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야자가 없어져서 요즘 학생들은 가방에 사복을 넣고 갔다가 학교 끝나면 재빨리 갈아입고 놀러 다녀요. 스페이스 워커의 장점은 초경량이고 방수에 구김이 없다는 겁니다. 가방에 딱 넣고 다니기 좋은 제품 아닙니까?”
“그렇지.”
“제 생각에는 교복 입고 하교하다가 가방에서 바람막이를 꺼내 입거나, 좋아하는 여학생이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로 당황하자 바람막이로 비 가림을 해 주고 핸드폰 번호를 딴다. 크!”
“……!”
“좋아 죽으려는 표정의 남학생이 바람막이를 가볍게 털어 물기를 제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입고 경쾌하게 걸어가는 모습. 이거 그림 나오지 않습니까?”
“너 왕년에 연애 좀 해 본 솜씨다.”
“김지민 씨는 어때요? 그런 상황이면 나한테 핸드폰 번호 알려 줄 것 같아요?”
“알려 드릴 것 같아요.”
대답하고 고개를 숙이는 김지민의 목덜미가 붉어져 있었다.
활짝 핀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한지철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비난 여론이 장난이 아니겠는데? 학생 모델에 교복까지 등장시키면……. 홍보실에서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닐 거야.”
“막긴 왜 막습니까? 오히려 비난 기사라도 내 달라고 해야 할 판에. 욕을 하든 비난을 하든 제품 홍보는 제대로 될 것 아닙니까.”
“노이즈 마케팅을 하자는 말이냐?”
“맞습니다. 김지민 씨 학교 다닐 때 왕따였죠?”
다시 한번 느닷없는 질문을 받은 김지민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답해야 고민하는 사이 진혁이 먼저 말을 이었다.
“분명 왕따였을 겁니다. 예쁜 애는 시기의 대상이거든요. 그러면서 속으로는 자기도 예뻐지고 싶어 하면서. 그게 애들의 심리입니다. 안 그래요?”
“맞아요. 아니, 그러니까 제가 예뻐서 왕따였다는 건 아니고, 여자애들 심리가 그렇다고요. 그러니까…….”
김지민이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것도 귀여웠다.
진혁이 한지철을 바라보며 못을 박았다.
“비싸다고 욕하는 것은, 그걸 갖고 싶은데 살 수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의 표현입니다. 그러다 누군가 입고 다닌다면 그놈은 뜨는 거고요. 그게 부러우니까 집에 가서 자신도 사 달라고 조를 겁니다. 이게 우리가 이야기한 상황이잖아요.”
“네 이야기를 다시 들으니까 머릿속에 확실히 컨셉이 잡혔다. 그런데 위에서 이해해 줄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럼 복을 제 발로 차는 거죠. 까짓것 인생 뭐 있어요. 만일 그렇게 되면 아이템 들고 나오세요. 저랑 같이 사업해요. 사장은 선배가 하시고요.”
“이 자식이 간덩이만 부어서. 의류 사업은 오퍼상 차리는 거랑 단위가 달라, 인마.”
화를 냈지만 한지철은 가슴이 훈훈했다.
빈말이라도 자신을 믿고 회사를 차려 사장 자리에 앉혀 주겠다는 사람은 진혁이 처음이었다.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다 회의실을 나서는 진혁은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해 줄 말은 다했다.
나머지는 뒤에 남은 두 사람이 이겨내야 할 문제였다.
* * *
볼에서 핸드폰을 떼어 내려놓은 정인영의 눈이 흥분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실수였다.
폴더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뀌면서 반드시 종료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한지철과의 통화를 끝내고 다시 핸드폰을 들었을 때 전화가 끊기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했는데 마침 온통 머릿속을 헝클어 놓은 후속 광고 콘셉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와 자신도 모르게 듣게 됐다.
낯선 사내가 의견을 내놓을 때마다 주먹이 움켜쥐어졌다.
특히나 왕따를 거론하며 여자애들의 심리를 언급할 때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자신이 그랬다.
집이 부자인 데다 얼굴도 예쁘고 공부까지 잘하니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친구들의 그런 시선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게 시기심이고 질투라는 것을 알았다.
앞에서는 욕하고 뒤로는 자신이 입고 다니는 옷의 브랜드에 관심이 있는 이중적인 모습에 상처까지 받았었다.
그런 편견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주춤거리면 지는 거다.
반드시 이겨내야 한다.
한지철이 가져올 보고서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는 이미 파악했다.
잠시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지철의 가져올 계획을 관철시키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몫이었다.
지금은 그 일을 해야 할 때였다.
* * *
태후 빌딩을 나온 진혁이 잠시 이마를 찌푸렸다. 희준을 만나자니 시간이 너무 남았다.
잠시 고민하던 진혁은 마침 지나가던 빈 택시를 잡았다.
“춘천으로 갑시다.”
택시 기사의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에 장거리니 최고였다.
춘천시 퇴계동 소재 친환경 바이오 기업인 주식회사 유닉스가 있었다.
소비자들이 많이 착각하는 것이, 유명 브랜드의 화장품은 그 회사가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직접 생산하는 비율은 50%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전문 생산 업체에 생산하는 제품에 자사 상표만 붙여 판매하거나 수입해 팔았다.
유닉스는 ODM(제조자 주도 생산 방식) 전문 업체로, 특히 색조 화장품에 강점이 있었다.
송승용 사장은 국내 굴지의 회사와 공급자 계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는데도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평생을 화장품 제조에 매달려 친환경 화장품 분야 기술력도 인정받았다.
유닉스는 싼 합성 원료 대신 천연 재료만 사용했고, 납이나 수은 등 유해 화학 성분도 쓰지 않았다.
비싸지만 돼지 유분 대신 소 유분을 사용하는 것도 송승용의 고집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 때문에 제조 원가가 높아 질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통망을 장악한 대기업 브랜드 화장품 회사는 그런 노고는 인정해 주지 않았다. 무조건 낮은 단가만 찾았다.
이번 계약도 공장을 돌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였다.
사장실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비서가 말했다.
“상담실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누구?”
“처음 뵙는 분인데, 오신 지 한참 됐어요.”
서둘러 상담실로 갔다.
젊은 사람이 앉아서 회사 카탈로그를 보다가 일어났다.
“송승용입니다. 많이 기다리셨다니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사전 약속 없이 찾아온 제 잘못입니다. 서진혁이라고 합니다.”
명함을 받아든 송승용이 난감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라딘 컴퍼니는 뭐 하는 곳입니까?”
“이집트에 있는 무역 회사입니다.”
“이집트요?”
이제 송승용의 얼굴은 황당하게 변했다. 그가 아는 이집트는 학생 시절에 들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전부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당황만 할 수는 없었다.
“무역을 하시는 분이라면 수입을 대행하시려는 겁니까?”
“이번 건은 직접 판매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유통은 쉽게 생각할 게 아닙니다.”
“그 점은 충분히 감안하고 있습니다. 제품을 만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결례를 범했군요. 어떤 제품을 원하십니까?”
“아이섀도, 아이라이너 같은 눈 색조 화장품입니다. 립스틱과 매니큐어도 가능하시면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저희의 주력 제품이니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 부분은 진혁이 이미 파악해서 찾아온 거다.
“중동은 더운 날씨라 땀이 많이 납니다. 보완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건 번짐 방지 기능의 특성을 강화시킨 제품을 쓰거나 아이프라이머로 보완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무슬림은 하루 다섯 번을 기도합니다. 그래서 매니큐어는 빠르게 마르고 쉽게 지울 수 있는 제품이어야 합니다.”
“저희 제품 중에 M5가 그 조건에 적합한 제품입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공급이 가능합니다.”
이후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는데도 송승용은 한 번도 답변을 주저하지 않았고 대안도 정확히 제시했다. 경영만 하는 사장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지금까지 상담한 모든 제품은 개, 돼지에서 추출한 성분이나 태반 같은 인체 성분, 유전자 변형 물질, 납 등의 유해 화학 성분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알코올 사용도 안 됩니다.”
“일부 제품에는 단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 있으나, 상담하신 제품 중에서 친환경 모델은 요구하신 조건을 모두 충족합니다. 하지만 단가가 높습니다.”
“그건 충분히 감안할 용의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성분은 정확해야 합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우리는 성분이 표기된 제조 증명서를 발급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제품마다 기본 수량이 있는 데다 컬러와 종류도 다양해서 금액이 꽤 될 텐데, 가능하시겠습니까?”
“수량은 상관없고, 컬러는 화려한 색 위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금 여력은 충분합니다.”
일본전력 주식을 공매도한 수익금은 유닉스를 인수하고도 남았다.
진혁이 가장 중요한 말을 꺼냈다.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습니다.”
“뭡니까?”
“원하는 모든 제품에 대해 할랄 인증을 받아 주십시오.”
“할랄 인증이요?”
“어렵겠습니까?”
“우리 공장에도 무슬림이 있어 그들의 생활 방식을 조금은 압니다. 그런데 화장품에까지 그걸 적용시켜 달라는 것은 과한 요구 같습니다.”
송승용은 기분 나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상담을 다 해 놓고 이상한 조건을 걸어 계약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제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인증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우리 쪽에서 부담하겠습니다. 대신 해당 제품을 재판매할 때는 우리의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비용을 대면 당연히 권리도 드려야지요.”
송승용이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로서는 손해 볼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원하던 천연 재료만 가지고 만든 제품을 제 값 받고 팔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제가 3일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샘플 각 열 개씩 준비가 되겠습니까?”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럼 그때 계약서를 작성하고 할랄 인증에 들어가는 비용을 선지급해 드리는 것으로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