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위기는 기회
상담을 마치고 진혁은 서둘러 서울로 돌아왔다.
희준과의 약속이 있었다.
하지만 약속 시간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서울로 진입할 때 퇴근 시간과 겹치면서 한 시간이나 늦어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덕분에 술값은 진혁이 냈다.
다음 날, 숙취로 늦게 일어난 진혁은 어머니가 끓여 준 시원한 콩나물국으로 속을 달래고 서둘러 차를 몰고 경남 산청으로 향했다.
차는 아버지의 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5년이 넘는 NF소나타였는데 관리가 잘돼 새 차처럼 느껴졌다. 아버지의 검소함이 느껴졌다.
산청 금서농공단지에는 두리식품이 있었다. 과일젤리를 비롯해 콩 통조림을 OEM 방식으로 대기업에 납품하는 회사였다. 병아리콩 통조림도 생산하고 있어 상담이 쉬웠다.
렌틸콩과 누에콩도 가능하다는 말에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고, 세 제품에 대해 자킴(JAKIM)으로부터 할랄 인증을 받는 데 들어갈 비용으로 우선 5만 달러를 입금시켰다.
병아리콩 통조림 스무 개들이 한 박스는 구매했다.
할랄 인증은 국제 표준이 없어 각 나라마다 제각각이었지만, 가장 공신력이 있는 곳이 말레이시아의 자킴이었다.
인증에 소요되는 시간이 3개월가량이라 정식 오더는 그때 내기로 했다.
산청에서 속초로 바로 넘어갔다.
자신을 가장 귀여워해 주시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작은 아버지 댁에 머물며 식사도 대접해 드리고 함께 바다낚시도 가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할아버지의 기력이 전보다 못한 것이 마음이 쓰였다.
유닉스로 가자 송승용이 샘플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자킴으로부터 할랄 인증에 샘플 비용을 감안해 52,000달러를 입금시켰다.
이집트로 돌아가 테스트를 커져 최종 제품을 선정해 알려 주면 인증을 신청하기로 했다.
그 후 서울을 돌아와 희준과 마지막 밤을 불태우고 비행기를 탔다.
계획했던 일들도 잘 마쳤고 보고 싶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져 홀가분했지만, 떠나는 날까지 어두운 아버지의 얼굴이 유일하게 마음에 걸렸다.
* * *
젯다 공항에 도착하자 스미스 지점장이 보낸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JK모건 빌딩에 도착해 지점장실로 가자 스미스가 낯선 사내와 함께 있었다.
“이쪽은 폴스데이 로펌의 수석 변호사 베이커 씨입니다.”
폴스데이는 미국 내 10위의 집단 소송 전문 로펌이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스미스가 베이커의 이력을 알려 주었다.
“베이커 씨는 2003년 닛산 자동차의 소수 인종 차별에 대한 집단 소송을 맡아 승소했습니다. 지금은 도요타 자동차의 대규모 리콜 사태에 따른 소비자 손해 배상 집단 소송에도 참여하고 있고요.”
“이번 일에 정말 최적이신 분이시군요. 멀리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고마운 건 저희 로펌입니다. 맡겨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 반드시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야겠습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NS통신의 기사가 나간 후 일본 정부도 일본전력의 과실을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일본전력의 사과와 배상은 충분히 자신 있습니다. 문제는 일본 정부인데, 긴 싸움이 될 겁니다.”
“저도 압니다. 일본 같은 나라가 인정하려면 몇 년이 걸리겠지요.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마음먹고 계시다면 걱정 없습니다.”
합의가 이루어지자 구체적인 조건에 결정했다.
일본에 보낼 무료 자문 법률팀 파견 기간은 우선 두 달로 했다.
이후는 미국에서 전화로 상담을 하며 원하는 사람들을 모아 집단 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그에 따른 모든 비용은 진혁이 지불, 그만큼 배상비용을 청구하기로 했다.
“우선은 일본전력만을 대상으로 하고 일본 정부는 뒤로 미뤘으면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처음부터 일본 정부를 넣으면 정부 차원에서 은폐 시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소송이 길어지면 결국 그 피해는 의뢰인들에게 돌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 정부의 잘못이 드러날 수도 있고, 일본전력의 승소가 선례가 되어 도움을 줄 겁니다.”
“전문가께서 그렇게 판단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진혁이 베이커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
스미스가 함께 식사를 하기를 원했지만 진혁은 바로 카이로로 돌아왔다.
회사를 비운 기간이 너무 길었다.
* * *
카이로 시내는 각종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군부가 시위 자제를 촉구했지만 한번 터지기 시작한 봇물 같은 요구는 줄어들지 않았다.
사무실로 들어서던 진혁은 그 자리에서 멈춰야 했다. 도떼기시장에 들어선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엘네리는 회의실에서, 핫산은 사장실에서 상담을 하고 있었다.
카심은 사무실에서 상담을 하고 있었는데, 한쪽에서는 상담을 기다리는 상인들이 앉아서 순서를 기다렸다.
소마야도 전화통을 붙잡고 있었다.
서로 제대로 인사를 할 겨를도 없었다. 다들 얼굴이 까칠해 보였다.
진혁도 짐을 내려놓고 한쪽에서 상인들과 상담을 했다.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데 거래하던 업체가 철수하는 바람에 찾아왔다고 했다.
물론 알라딘 컴퍼니는 믿을 수 있다는 소문도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정신없이 상담을 하고 났더니 어느새 끝이 났다.
“아이고, 힘들어.”
“우리는 매일 이렇게 힘들었습니다.”
“다시는 어디 가지 마요, 미스터 서.”
“사장님, 죽을 것 같아요.”
누구 하나 빠짐없이 볼멘소리를 내놨다.
“일단 회의실로 모입시다.”
지친 몸을 이끌고 회의실에 자리를 했다.
진혁이 테이블 위에 가져온 짐을 올려놨다.
“먼저 선물부터 받으십시오.”
“어머, 화장품이네.”
“이건 통조림이고.”
“화장품은 종류별로 두 세트씩 가져가시면 됩니다만, 반드시 반응을 들어 오셔야 합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요?”
역시 소마야였다.
“그렇습니다. 천연 원료로만 만든 제품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반응이 좋은 제품은 할랄 인증을 받은 후에 가져올 겁니다.”
“할랄 인증 마크가 있다면 믿고 쓸 수 있어요.”
“이건 병아리콩 통조림입니다. 누에콩과 렌틸콩으로도 만들 생각입니다. 역시 반응이 좋으면 할랄 인증을 받을 계획입니다. 각자 네 개씩 가져가서 마찬가지로 반응을 확인해 주십시오.”
“좋은 생각이긴 한데, 지금 하는 일만으로도 벅찬 실정입니다.”
“시장에 소문이 나 상인들이 계속 찾아오고 있습니다.”
다들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더 뽑아야겠습니다. 가르칠 시간이 없으니 경력자로 구하려는데, 가능하겠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제 주변에도 다니던 외국계 회사가 철수해 버려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 그 일은 핫산이 맡아서 진행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사람이 들어오면 공간이 부족할 겁니다. 옆 사무실이 비어 있는 것 같으니까 카심 씨가 좀 알아봐 주십시오.”
“그럽시다.”
“자자,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 최대한 빨리 직원을 뽑고 사무실도 늘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회식입니다.”
진혁의 마지막 말에 까칠한 직원들 얼굴에도 미소가 나타났다.
직장인의 행복 중 하나가 회사의 규모가 커지고 후배들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뒤 진혁은 카심을 따로 불러 당뇨약과 시약을 건네줬다.
다음 날도 바쁘긴 마찬가지였지만 직원들의 표정에는 힘든 기색이 훨씬 덜했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는 희망이 있어서였다.
진혁은 상담을 도와주지 못했다.
핫산이 구직 공고를 내자 이력서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만큼 실업자가 많다는 의미였다.
카심이 알아보니 마침 옆 사무실 두 칸을 쓰던 회사가 철수해서 비었다고 해서 바로 계약을 했다.
다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지만 진혁은 결행했다.
자금은 충분했고 계획도 있었다.
아예 한 칸은 상담실과 샘플실로 꾸며 업무에 방해가 되지 않게 했다.
기존 사무실을 나눠 쓰던 사장실과 회의실을 새로 얻은 곳으로 옮겨 새로운 직원들이 쓸 수 있는 공간으로 확보했다.
새로 만든 사장실에 앉아서 갈리 이사의 보고를 받았다.
갈리는 이번에 새로 채용한 간부 직원으로, 독일의 제약회사 베인하임의 이집트 법인장 출신이었다.
유럽이 경제 위기에 빠진 데다 중동까지 혼란에 빠지자 베인하임이 사업 철수를 결정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케이스였다.
진혁은 그에게 관리 이사의 직함을 주고 회사 업무를 총괄하게 했다.
경력직 영업 사원은 세 명을 충원했고, 여직원도 뽑아 소마야의 업무 부담을 줄여 줬다.
“현재 실적은 4,250만 달러로 영업이익은 300만 달러 정도 됩니다. 지금 상태로는 적자지만, 계속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연말까지는 흑자 전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갈리 이사님을 포함해 새로운 직원들이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합니다. 직원들이 실적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적당한 스트레스는 업무 효율을 높입니다.”
“이사님이 알아서 적당히 조절해 주십시오.”
몇 가지 더 보고를 받고 돌아가는 갈리의 등을 바라보며 진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출근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업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고, 직원들의 관리에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이집트 상황이 급변하는 바람에 알라딘 컴퍼니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행운이었다.
화장품도 선호도 조사를 통해 눈 화장품 위주로 15종류를 선정한 후 송승용에게 통보해 할랄 인증을 진행하게 했다.
병아리콩 통조림도 반응이 괜찮았지만 당분이 부족하고 좀 더 걸쭉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 그대로 두리식품에 전달하고 보완해서 진행하게 했다.
그 후에는 재고품이 도착해 모하메드와 가리 사장에게 전달했다.
* * *
바쁘게 지내다 보니 카이로에 돌아온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나 있었다.
생각난 김에 베이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본에 무료 법률 상담실을 차린 지 벌써 2주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원전이 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일본 정부에서도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할 계획이라는 발표를 한 상황이었다.
“서진혁입니다. 고생이 많으신데, 상담은 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그게…… 이쪽 상황이 좀 묘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지난 기사 이후로 일본 정부에서 피해자들에게 500만 엔부터 800만 엔 정도의 위로금을 지급한다고 발표하자 비판 여론이 주춤하고 있습니다.
“방사능의 피폭의 후유증은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겨우 그걸 받고 만족한답니까?”
진혁은 어처구니없다 못해 화가 났다.
-피해자들은 당연히 불만입니다만 극우 세력과 보수 언론이 나라의 위기를 국민의 단합된 마음으로 이겨내자고, 배상 요구는 자제해야 한다며 친정부 여론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저희 사무실 앞에서도 승국회 회원들이 ‘매국노가 되지 말자’는 피켓을 돌고 시위를 벌이고 있고요.
“그래서 상담을 못 하고 있다는 겁니까?”
-피해자는 보지도 못했습니다. 저희들이 찾아가려고 했지만 경시청에서 위험하다며 자제를 요청해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여론이 변하자 그동안 납작 엎드렸던 일본전력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진으로 예상보다 피해가 심각해 현존하는 기술의 능력치를 넘어섰을 뿐, 자신들의 초등 대처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발뺌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진혁이 침음을 터트렸다.
일본인의 잘못된 애국심을 간과했다.
결국 좀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대로 또 무기력하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진혁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