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CIA 등장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CIA 중동 지부도 분위기가 무거웠다.
불러 놓고 인상만 쓰고 있는 제임스의 모습에 잭슨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랭글리에서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셨습니까?”
“리비아 사태를 빨리 해결하라고 난리야.”
“그걸 왜 우리한테 그런답니까. 결정은 자신들이 해 놓고.”
“이라크의 재판이 될까 우려하고 있어.”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종교 갈등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도망치듯 빠져나와야 했다.
참전 군인들의 유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보상 소송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고, 반전주의자들의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잭슨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지상군을 투입해서 속전속결로 카다피를 잡고 바로 빠져나오면 됩니다.”
“오바마와 클린턴 모두 지상군 투입은 절대 안 된다고 재확인했어.”
“자기들이 대선을 의식해 미적거리고 있으면서 책임은 우리에게 떠넘긴다는 게 말이 됩니까.”
잭슨이 화를 냈지만 그도 돌아가는 상황은 알고 있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는 이라크 전쟁은 잘못된 것이라고 공격해서 부시를 이겼다.
힐러리 클린턴 국방장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다음 대선을 노리고 있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전투에 직접 나서는 것은 무조건 반대했다. 그래서 리비아 사태 초기 미국은 나서지 않고 UN이 움직이게 했다.
그러나 미국이 지상군 투입을 주저하는데 연합군이 적극적일 리 없었다. 해상을 봉쇄하고 전투기로 폭격해 시민군을 돕는 게 전부였다.
제임스도 잭슨과 같은 마음이었지만 그렇다고 맞장구칠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상황이지만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어?”
“어렵게 장악한 자위야를 다시 정부군에 빼앗겨 후퇴하는 중입니다. 시민군 최고 사령관인 유네스가 암살된 이후로 계속 밀리고 있습니다.”
“지독한 놈들.”
제임스가 이를 갈았다.
UN 연합군의 지원을 받은 시민군이 수도 트리폴리와 인접한 서부 전략 요충지 자위야에 진입하는 순간 전쟁은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40년 넘게 독재자로 군림하며 미국과 대적해 온 카다피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특수 부대를 투입해 유네스를 암살하고 친정부 세력들로 시민군의 후방 보급로를 끊어 버렸다.
숫자가 많은 시민군이었지만 전투력은 정부군만 못했다.
거기에 많은 조직들의 연합이다 보니, 구심점이 없어지자 지휘 체계가 무너져 속절없이 당하기만 했다.
잭슨의 보고가 이어졌다.
“슐탄 혁명 군사 위원회를 이끄는 무하마디 사령관이 전면에 나서 독려하고는 있지만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힘들다고 합니다.”
“수송기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공군의 의견은 어때?”
“정부군의 미사일 망을 피하는 게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보다 설혹 뚫고 간다고 해도 전선이 너무 급박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잘못 투하했다가는 오히려 정부군을 돕는 꼴이 됩니다.”
“국경을 통한 육로는?”
“시도는 해 봤습니다만, 어떻게 알았는지 친정부 무장 세력의 공격을 받아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바다를 통하는 길도 정부군이 퇴각하면서 부두를 폭파해 버려 어렵습니다.”
카다피는 육해공으로 통하는 모든 보급로를 확실히 틀어막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시민군은 전투는 고사하고 굶어 죽을 판이었다.
잭슨이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 제임스가 마음을 굳혔다.
결국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자를 이용해야겠다.”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LCU를 이용해 이집트로 밀수를 했던 자 말이야.”
“아, 건방진 코리언!”
잭슨이 바로 서진혁을 떠올렸다.
좋은 방법이긴 한데 문제가 있었다.
“제가 분명히 경고했는데도 항해를 결행한 자입니다. 순순히 우리 일에 협조하겠습니까?”
“어차피 돈에 움직이는 부나방 같은 자야. 죽을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 간 것도 다 돈 때문일 거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웬만한 금액으로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적절히 컨트롤해야지. 최악의 경우 크게 떼어 줘도 리비아에 계속 쏟아부을 돈에 비하면 세 발의 피야.”
“알겠습니다. 추진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서둘러야 해.”
일어나 재빨리 나가는 잭슨의 등을 바라보는 제임스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일개 밀수꾼에 불과한 놈에게 돈까지 안겨 가며 부탁해야 하는 처지가 생각할수록 답답했다.
* * *
세상의 모든 곳이 답답한 것만은 아니었다.
태후 패션의 신사업 본부는 축제 분위기였다.
천덕꾸러기로 온갖 비난이 쏟아졌던 스페이스 워커의 바람막이가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가고 있었다.
광고에 나온 모델인 ‘경량 방풍 재킷’은 판매율이 90%를 넘어 일부 매장에서는 사이즈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판매량 보고를 하는 한지철의 목소리가 잔뜩 들떠 있었다.
“이 상태라면 스테디셀러는 무난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한 팀장님은 보기보다는 욕심이 적으시네요. 전 베스트셀러를 생각하고 있는데.”
“하하하하. 제가 본부장님에게 졌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인영의 얼굴도 활짝 펴 있었다.
지금은 웃지만 후속 광고가 나가고 쏟아지는 비난은 예상치를 훌쩍 넘었다. 그때 들은 욕은 평생을 걸쳐 들은 욕보다 많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다.
비난 여론이 높으면 높을수록 제품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급히 추가 제작을 했는데도 부족해 또 만들고 있었다.
이제 그룹 내에서는 누구도 불편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아직도 비난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더 준비를 철저히 해서 이 기세를 이어가야 해요.”
“맞습니다. 그래서 휴가 시즌 전에 겨울 상품으로 선정한 다운재킷의 디자인을 확정 짓기로 했습니다. 직원 모두에게 잡화 아이템을 한 가지씩 선정해 보라고 했습니다.”
“대리점 개설 작업도 중요해요.”
“시장분석팀에서 상권 분석 자료가 나오는 대로 지역별 총판과 대리점 운영 계획을 확정하겠습니다.”
한지철의 업무 처리는 확실했다. 역시 그를 팀장에 앉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팀장을 알게 된 게 제게 큰 행운입니다.”
“아닙니다. 이 모든 게 본부장님이 외압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추진해 주신 덕분입니다. 저를 포함한 팀원 모두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지요. 그 비난을 받으면서도 교복 입은 학생이 나오는 컨셉을 찾아내신 팀장님의 공이 제일 큽니다. 정말 대단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감탄이 깊이 밴 말과는 달리 정인영의 눈초리는 매서워져 있었다.
어색함에 뒷머리를 긁느라 한지철은 그걸 보지 못했다.
“그 아이디어는 친한 후배의 의견이었습니다. 실은 아웃도어 사업 아이템도 그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제안했던 겁니다.”
“그래요? 재미난 이야기일 것 같으니 우리 앉아서 이야기해요.”
힘든 시기가 지나자 불현듯 한쪽으로 밀어 놨던 몰래 엿들은 목소리의 주인공에 대한 궁금증이 밀려왔다.
당시의 상황이 애매해 주저하고 있는데 한지철이 먼저 말을 꺼내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소파로 가서 앉아 비서가 가져온 커피를 마시며 한지철에게 서진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감각이 뛰어난 후배를 두셨네요. 학교 후배인가요?”
“아닙니다. 물산에 있는 학교 후배의 입사 동기입니다.”
“그럼 물산에 근무한다는 건가요?”
인영의 눈이 바로 반짝였다.
같은 그룹 내 계열사 직원이라면 요청만 하면 바로 데려올 수 있었다.
“지금은 퇴사하고 이집트에 있습니다.”
“안타깝네요.”
“원래 물산의 카이로 지사에 근무했는데, 해외 지사 선진화 계획에 따라 지사가 폐쇄되자 사표를 쓰고 오퍼상을 차렸습니다. 참 아까운 후배입니다.”
한지철의 얼굴에도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한 팀장님 후배시면 굉장히 젊을 텐데, 강단이 있는 분인가 봐요.”
“지나쳐서 탈입니다. 그러니까 회사 방침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다 뛰쳐나간 것이지요.”
“그렇다면 직장인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분이네요.”
“그렇습니다만 전 진혁이를 믿습니다. 이번 건에서 보듯이 흐름을 읽는 눈이 탁월합니다. 그놈은 이집트에 희망이 있다고 보고 남은 걸 겁니다. 성공한 모습으로 당당히 돌아올 거라 확신합니다.”
대단한 신뢰였다.
정인영은 주변에 이런 믿음을 보여 주는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 봤다.
없었다.
아니, 믿음은커녕 조금이라도 틈만 보이면 물어뜯으려는 사람들뿐이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정인영이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물었다.
“이미 퇴사까지 했다면 그냥 한 팀장님의 아이디어라고 해도 될 텐데 굳이 밝힌 이유가 뭐죠?”
“그게 사실이니까요. 저도 직장인으로서 욕심은 있지만, 좋아하는 후배의 아이디어를 도용하면서까지 성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분은 참 좋은 선배를 두셨네요. 언제 한번 인사시켜 주세요.”
“귀국하면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기대할게요. 그럼 계속 수고해 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지철이 인사를 하고 나가자 정인영은 자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사실을 알고 나니 궁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서진혁이란 사람에 대한 흥미가 더 생겼다.
* * *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진혁은 인터폰으로 이제 비서를 겸하고 있는 소마야의 목소리를 들었다.
“사장님을 찾는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문을 열고 장신의 흑인이 들어왔다.
“제가 사장인 서진혁입니다.”
“잭슨이오. 사업이 날로 번창하는군요.”
소파에 앉는 진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게다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겨우 구멍가게 수준입니다.”
“보이는 게 다는 아니지. 밤에 몰래 하는 거래가 짭짤하지. 안 그런가, 코리언.”
“……!”
확실히 기억났다.
의문의 전화를 건 자였다.
싸늘하게 변한 진혁의 얼굴에도 전혀 위축됨이 없이 잭슨이 말을 이었다.
“내 제의를 무시하고 항해를 결행했더군.”
“상사원에게는 신용이 생명이거든요.”
“그래서 나도 거래를 부탁하려고 왔네.”
“글쎄요. 요즘 사업이 바빠서 시간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들으면 아마 흥미를 느낄 거야.”
“좋습니다. 상담이야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신분부터 밝혀 주셔야겠습니다. 아무하고나 거래할 만큼 제가 한가하지 않아서요.”
잠시 노려보던 잭슨이 결심하고 말했다.
“어차피 일을 하면 알게 될 테니 편하게 가는 것도 좋지. CIA 중동지부에 있네.”
“호……. CIA가 저 같은 일개 무역업자를 찾아올지는 몰랐습니다. 이거 영광입니다.”
말과는 달리 진혁은 전혀 놀라운 표정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감은 잡고 있었다.
무바라크가 물러난 이집트에서 그들이 은밀히 공작할 일이 뭘지 궁금했다.
이어지는 잭슨의 말은 예상과 달랐다.
“리비아에 보낼 물건이 있거든.”
“리비아요? 거긴 지금 내전 중이잖습니까?”
“좀 시끄럽지.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인데 이런저런 물건은 필요하지.”
“세계 최강 미국의 CIA라면 굳이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될 텐데, 일개 밀수업자인 제게 부탁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직접 나서는 것을 위에서 막고 있어.”
잭슨은 현재 미국이 처한 입장과 백악관의 고민을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결국 본인의 손이 더러워지는 게 싫어 대신 피를 뒤집어쓸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네요. 그걸 제가 받아들일 거라고 봅니까?”
진혁의 도발에 잭슨이 씩 웃었다.
그는 이런 자들을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