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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48화 (48/307)

48화. CIA와의 흥정

“사람이 돈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이야. 자네 같은 무역업자들이 바로 그 증거고.”

“끙……. 좋습니다. 인정하지요. 그런데 왜 하필 접니까?”

“카다피가 육해공의 모든 보급로를 막고 있어. 우린 현 상황에서 그걸 뚫는 유일한 방법이 LCU라는 판단을 내렸네.”

이제 잭슨이 찾아온 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됐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CIA의 정보력도 많이 무뎌진 모양입니다. 그 일을 접으면서 이미 고철로 팔아 버렸습니다.”

“마침 바레인의 미 해군 5함대에 몇 년째 부두에만 묵혀 있는 LCU가 한 척 있다더군. 잠깐 쓰고 가져다 놓으면 아무도 모를 거야.”

“전 생필품과 식량만 취급해서 도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건 걱정 말게. 무기와 전투 식량 같은 군용 물품은 시민군이 알아서 준비할 테니, 자네는 의약품과 연료만 구해 주면 되네.”

바로바로 이어지는 잭슨의 답변에 진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이런 위험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잭슨이 철저히 조사하고 찾아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CIA는 세계 어느 곳이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였다. 자신의 알라딘 컴퍼니쯤은 눈 하나 깜짝이는 사이에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릴 수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됐다.

그걸 예상하는지 부탁하러 온 잭슨이지만 표정에는 초조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진혁이 마음을 굳혔다.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하는 게 나았다.

“횟수와 기간을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주 1회는 가 줘야 할 거야.”

“생각보다 적군요. 배달료는 얼마 정도 생각하고 계십니까?”

제일 중요한 문제였다.

“회당 50만 달러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네.”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예전에도 한 번 항해하면 그 정도는 벌었습니다. 전쟁터로 들어가는데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전쟁터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정보를 줄 테니 위험 부담은 없어. 비공식 작전이라 우리도 자금 집행에 여유가 없어.”

“그래도 이건 아니지요. 다른 업자를 알아보십시오.”

진혁은 냉정하게 잘랐다.

단순히 협상용이 아니었다. 예전이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50만 달러에 목숨을 걸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시민군에 이야기하면 물건 값에서 그 정도는 더 얹어 줄 수는 있어. 하지만 그 이상은 곤란해.”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입술까지 깨물며 말하는 잭슨의 태도에, 그가 제시할 것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사꾼이 아닌 잭슨이라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100만 달러면 좋지도 않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게다가 CIA와 인연을 맺고 앞으로 진출할 생각인 리비아를 접할 기회였다.

그런데 왠지 미진했다.

진혁이 심호흡을 했다.

“언제까지 알려 드리면 됩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내일까지 알려 드리지요.”

“잘 알겠지만 우리 이야기는 자네만 알고 있도록 하게. 그게 오래 사는 길이야.”

“명심하지요.”

악수를 하고 나가며 잭슨이 명함을 건넸다. 회사는 위장이었지만 어차피 필요한 것은 핸드폰 번호였다.

잭슨이 나가자마자 진혁은 바로 바라캇에게 전화를 했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어디십니까?”

-요르단에다 물건을 내려놓고 돌아가는 중입니다.

“전에 했던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하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당연히 가능합니다.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쉬러 들어간 직원들을 부르면 됩니다. 다들 좋아할 겁니다.

“내일 최종 확정이 되면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꼭 불러주십시오.

전화를 끊은 진혁이 어디론가 다시 전화를 하더니 카심을 불러 함께 회사를 나섰다.

카이로가 보이는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가자 알트라드가 먼저와 있었다.

반갑게 악수를 하고 앉았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뵈니 좋습니다.”

“다 미스터 서 덕분이지.”

“하시는 일은 어떻습니까?”

“확실히 자리를 잡았어. 그러니까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여유롭게 만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알트라드는 말처럼 분위기가 변해 있었다. 말쑥한 양복 차림에 표정에도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지내실 만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한데 치열하게 살 때가 좋았던 것 같아. 긴장이 너무 없으니까 무료해.”

“그럼 제대로 긴장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좋은 건수 있나?”

언제 늘어졌냐는 듯이 알트라드가 날카로운 기운을 품어냈다.

“혹시 리비아 쪽하고 거래를 하셨습니까?”

“예전에는 했는데 요즘은 거기 꽉 막혀서 못 하고 있어.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다닌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물가가 장난이 아니겠군요. 가지고만 가면 부르는 게 값이겠습니다.”

“그건 그렇겠지. 무슨 좋은 수가 있는가?”

눈치가 빤한 알트라드였다.

진혁이 단순히 리비아의 상황 이야기나 나누자고 갑자기 연락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기존에 거래하던 업자들에게 연락해서, 물건을 가져가면 받을 건지 알아 봐 주십시오.”

“방법은?”

“우리가 거래했던 방식대로 할 겁니다. 다만, 전쟁 중이니 도착지는 이쪽에서 정합니다.”

“바다를 UN 연합군이 봉쇄하고 있다는데 괜찮겠나?”

진혁은 그냥 웃어 줬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CIA를 언급할 수는 없었다.

알트라드라도 자신의 실수를 바로 깨달았다.

“미스터 서가 가능하다면 가능하겠지. 언제까지 알아봐 주면 되겠나?”

“늦어도 내일 오전 중에는 답변을 주셔야 합니다. 물론 소개료는 넉넉하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과는 달리 알트라드의 표정은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그 역시 대가 없이 거래선을 알려 줄 수는 없었다.

예상대로 알트라드는 그날이 가기 전에 연락을 했다.

-세 군데 전화했는데 모두 자기가 받겠다고, 꼭 연락 달라며 부탁하더군. 가격도 원하는 대로 쳐 주겠대.

“반응이 좋군요. 고생하셨습니다. 확정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행운을 빌어. 기다리겠네.

준비는 다 됐다.

이제 설득만 하면 된다.

* * *

다음 날, 사무실로 다시 찾아온 잭슨에게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더니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니까, 우리 의뢰하고는 별개로 밀수를 할 테니 뒤를 봐달라는 건가?”

“밀수라는 건 정상적인 방법이 있는데도 몰래 들여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리비아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니 맞는 표현은 아니지요.”

말장난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틀렸다고 강하게 뭐라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잭슨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든 CIA가 밀수, 암거래상들의 거래를 묵인한 것도 아니고, 도왔다는 게 알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하는 말인가?”

“CIA가 시민군에 무기를 공급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고, 고통 받는 시민들에게 식량과 생필품을 공급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아니지. 우리가 지원하는 것은 대가가 없는 것이지만 자네는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 같다고 할 수는 없지.”

“미국이 중동에 관여하는 게 순수한 마음에서 하는 것이라는 걸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인정하겠습니까?”

잭슨이 답을 못 했다.

미국이 석유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중동의 여러 나라 내전을 종용하고 관여한다는 것은 이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잭슨이 반박하지 못하자 진혁이 말을 이었다.

“정수장에 독약을 풀어 물도 못 먹고, 발전소가 폭파돼 밤이면 암흑이랍니다. 제일 심각한 것은 식량과 생필품 부족이고요. 고통 받는 리비아 국민들을 위해 카다피를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미국이 그들을 위해 일하는 것을 막으시면 안 되지요.”

“그냥 공급해 주는 게 아니잖아. 이득을 위해 폭리를 취할 거잖아.”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됩니다. 지금 리비아는 공급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지금은 가격을 따질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식량을 구하지 못해 아사자가 생겨나는 판입니다. 최소한 살 수 있는 선택권은 줘야 할 것 아닙니까.”

“…….”

“이집트에서 제가 밀수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왜 묵인해 주고 경고까지 했습니까. 제가 공급하는 식량이 가격 폭등을 억제하는데 도움이 됐기 때문이잖습니까. 이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리비아 국민들은 자신들과는 상관없이 석유 패권을 차지하려는 자들을 신경 쓰기보다 누구든 식량만 공급해 주길 바랄 겁니다.”

잭슨이 말이 없자 진혁이 쐐기를 박았다.

“대신 CIA의 50만 달러는 안 받겠습니다. 중동의 여러 나라가 난리이니 그쪽에 뜻깊게 쓰십시오.”

“……!”

“제가 일을 맡는 조건은 다 말씀드렸습니다. 위에 보고하시고 결정을 받아 주십시오. 설혹 제 제안이 거절되더라도 괜찮습니다.”

잔뜩 굳은 얼굴로 생각하던 잭슨이 입을 열었다.

“먼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어제 내가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더니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이유가 뭔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차피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면 제대로 하고 싶습니다.”

“전화하지.”

잔뜩 굳은 얼굴로 나온 잭슨은 카이로에 마련된 비밀 아지트로 갔다.

제임스에게 보안 회선으로 진혁의 제안을 전했다.

-카다피만큼 지독한 놈이군.

“그렇습니다. 고통 받는 리비아 국민들을 위하는 일이라는 궤변을 늘어놨지만, 결국 이번 기회에 단단히 한몫을 잡으려는 게 틀림없습니다.”

-승인해 줘.

“예? 승인하신다고요?”

앞의 말과 전혀 다른 제임스에 결정에 잭슨이 놀라 반문했다.

-이번 일은 시민군의 요청에 따라 우리는 소개만 해주고 빠진 거야. 그들이 물건 값을 지불하고, 자국민들을 위해 식량을 들여오는 거야. 50만 달러도 나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관여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어. 안 그래?

“그건 맞습니다만…….”

-정신 차려, 잭슨.

“아, 예!”

-이 계획의 애초 목적을 잊지 마. 보급로를 뚫어 정부군만 압박하면 돼. 그 와중에 벌어지는 소소한 일 때문에 본질을 잊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추진하겠습니다.”

-수고했어. 뛰어난 놈이다. 이번 일이 잘 끝나면 얼굴 한번 보고 싶군.

제임스가 전화를 끊었지만 잭슨은 한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쩌면 진혁은 이런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잭슨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진혁은 바쁘게 움직였다.

바라캇을 불러들였고, 엘네리를 다시 젯다로 보내 식량을 알아보게 했다. 의약품은 베인하임 시절의 인맥을 이용해 갈리가 준비하기로 했다.

연료는 급한 대로 태후물산 젯다 지사의 손기성 과장에게 부탁했다.

알트라드는 리비아 현지 암시장 상인과의 연락을 맡았는데 대가로 생필품을 넘겨줬다.

규모가 적지 않지만 소개료도 줘야 하고, 품목이 다양해 현재 자신의 역량으로는 맞추기 쉽지 않다고 판단해서였다.

카심을 사무실 업무에 배제시키고 이번 일에만 집중하게 했다.

일주일 후, 마침내 진혁은 카심과 함께 튀니지의 최남단 무역항 자르지스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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