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리비아 시민군
아랍의 봄의 시초가 된 재스민 혁명이 일어난 튀니지는 알리 대통령이 망명하면서 23년 철권통치의 막을 내리게 됐다.
아직 혼란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과도 정부의 주도 아래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진혁이 자르지스 항을 택한 것은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까지 200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하루에 왕복이 가능하다는 이점 때문이었다.
항구에 가자 뉴(New) 지니호가 출항을 마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어제까지 각국에서 보내온 물품들이 도착해 창고에 쌓여 있었다.
군용 물품을 실은 컨테이너도 도착했는데, 운전수는 위탁만 받아 누가 보내는지 몰랐다.
바라캇도 선원들과 미리 도착해 숙소까지 렌트해 놓은 상태였다.
한번 경험한 일이어서인지 진혁이 딱히 신경 쓸 일은 많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바라캇 선장님. 배는 마음에 드십니까?”
“아주 좋습니다. 레자가 제일 좋아합니다.”
진혁은 다른 선원과도 인사를 나눴다.
대부분 알지만 몇몇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다들 체격이 좋았다.
일정이 맞지 않아 새로 뽑아야 한다기에 지난번의 경험을 떠올리며 전투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뽑으라고 했었다.
카심에게 물건이 제대로 실렸는지 확인하라고 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검은색 승용차로 들어갔다.
잭슨이 타고 있다가 검은 가방을 건넸다.
“안에 도청 방지가 장착된 위성 전화가 들어 있을 거네. 자네의 암호명은 신밧드야.”
“제가 요구한 내용은 제대로 전달된 겁니까?”
“기분 나쁘겠지만 물건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어쩌겠어. 자네 말대로 국민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앞으로는 그쪽과 상의하면 될 거야.”
“고생하셨습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행운을 비네.”
악수를 하고 내리자 차가 출발했다.
* * *
지중해의 배 위에서 지는 석양을 바라보는 것은 장관이었다.
하지만 뉴 지니호의 그 누구도 그 정취를 느끼지 못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리비아 해역으로 들어서자 위성 전화가 울리기에 받으니 숫자만 세 번 반복하고 끊어졌다.
위도와 경도를 암호화된 숫자로 변환해 불러 준 것이다.
바라캇이 바로 분석했는데, 트리폴리에서 70킬로 떨어진 사브라타 해변이었다.
사위가 어둠에 잠긴 한밤중 목적지 인근에 도착해 위성 전화를 걸었다.
“신밧드입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둠 너머로 서치라이트 불빛이 미리 정한 암호에 맞게 깜빡이더니 이내 횃불을 밝힌 해안이 보였다.
뉴 지니호가 불길을 따라 해변으로 상륙했다.
해치가 내려가고 밖으로 나오자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맨 앞에 서 있는 별 두 개짜리 장군을 보고 다시 인사를 했다.
“신밧드입니다.”
“병참을 맡고 있는 알자위네. 이제야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겠군. 우선 검수부터 하지.”
알자위의 지시에 몇 명의 장교가 빠른 걸음으로 배에 올라 싣고 온 물품을 확인했다.
잠시 후 선임자가 알자위에 보고했다.
“이상 없습니다.”
“입금해.”
잠시 후 카심이 진혁에게 말했다.
“입금됐답니다.”
“하역하도록 하세요.”
“하역 실시!”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물건을 내려 차에 옮겨 실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진혁이 들고 있던 가방을 내밀었다.
“약소하나마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가방을 바라보는 알자위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우린 부패한 자를 몰아내고 깨끗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총을 든 전사들이네. 우리를 이런 식으로 봤다면 불쾌하군.”
“뭔가 착각하신 모양입니다.”
진혁이 가방을 열어 보여 줬다. 중동 남성들이 즐겨 피우는 일반 시가가 들어있었다. 싼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급품도 아니었다.
알자위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사과했다.
“내가 오해를 했군. 이해해 주게.”
“장군님이 신념에 따라 이 일에 나섰듯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이 일은 제가 먼저 요청한 게 아닙니다. 혹여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겠네. 이후 일정도 차질 없도록 우리가 보호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다시 가방을 건네자 알자위가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았다.
앞으로 3일간은 암시장 상인들과의 거래가 있었다.
그때도 시민군이 경비를 서 주기로 했는데, 곱지 않게 보고 소홀히 할까 봐 미리 다짐을 받았다.
하역이 모두 끝나자 내일 다시 보기로 하고 각자의 목적지로 떠났다.
* * *
리비아의 사브라타 해변에 도착한 뉴 지니호의 해치가 내려지자 밖으로 나오는 진혁의 얼굴은 까칠해져 있었다.
연이어 나흘째 긴장된 항해를 한 탓이었다.
해가 지면 출발해서 아침에 돌아와 잠을 자는, 낮밤이 뒤바뀐 생활을 하는 탓이었다.
지난 이틀간은 암시장 상인들의 물건을 날랐다.
알자위 준장은 첫날만 나오고 보이지 않았지만 약속대로 군인들을 보내 경비를 서게는 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군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의 고통을 이용해 한몫 잡으려는 밀수업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진혁은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은 맨 앞에 알자위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진혁이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다시 뵈니 반갑습니다, 준장님.”
“고생이 많소. 하역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나랑 잠시 갑시다.”
“어디를 말입니까?”
“기다리시는 분이 계시네.”
잠시 고민하던 진혁이 카심에게 뒷일을 맡기고 알자위가 탄 군용 지프차에 올라탔다.
해변 뒤 언덕을 넘고 얼마 더 가자 군 진영이 나타났다.
지프차는 그중 가장 큰 천막 앞에 멈췄다.
알자위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중앙의 탁자에 펼쳐진 지도를 보고 고민하는 노장군이 있었다.
“신밧드를 데려왔습니다, 사령관님.”
“무하마디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진혁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시민 연합군을 이끌고 있는 전 리비아 해군 장교 출신 무하마디 샤훕이었다.
인사가 끝나자 옆에 마련된 간이 회의실 탁자로 가서 앉았다.
“오늘도 상인들에게 물건을 가지고 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지난 이틀간도 다녀갔습니다.”
“그럼 다음 우리 물건을 가지고 올 때까지는 뭘 하는가?”
“선원들에게 휴식을 주려고 합니다. 체력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렇군. 자네는 내가 주변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 이 일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나?”
진혁은 당신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상대는 총사령관이었다.
“말씀해 주시면 경청하겠습니다.”
“반대하는 CIA에게 리비아 국민들에게 최소한 살 수 있는 선택권은 줘야 할 것 아니냐며 설득했다지?”
“정확한 내용까지는 기억을 못 하지만 그런 말은 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말이 마음에 와닿았어. 고통 받는 이 나라 국민들을 위해, 카다피를 몰아내자고 외치는 우리가 거꾸로 국민들에게 고통을 감내하라고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야.”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이 일을 좋게 보지를 않아. 내가 총사령관을 맡고 있지만 여단마다 사령관들의 생각이 다 달라. 무엇보다 시민군에 합류한 병사들도 정부군의 탄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온 이들이 많아. 전쟁이 길어지고 정부군의 저항이 강해지자 병사들이 흔들리고 있어.”
“…….”
“그런 상황에 비싸게 들여온 물건에 몇 배나 더 가격을 붙여서 파는 것을 지원까지 하라는 내 지시에 병사들이 얼마나 수긍하겠나.”
“그건 분명 잘못된 생각입니다. 리비아는 지금 물품 공급이 완전히 끊긴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가져오고 있는데 대가를 주지 않겠다면 누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알아. 이렇게라도 가져와 주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네. 하지만 일부 강경파 여단들은 여전히 문제를 재기하고 있고, 일부 병사들이 그에 동조하고 있어.”
진혁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다 굶어 죽자는 말밖에 안 됐다.
그렇지만 무하마디 사령관에게 따지지는 않았다. 각자 독자적인 세력의 여단들을 합친 시민군을 이끄는 그의 고충을 모르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우리에게도 물건을 공급해 주게.”
“지금도 해 드리지 않습니까? 물량을 늘려 달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진혁의 반응에 무하마디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미군이 보내 주는 것이야. 그래서 카다피를 몰아내는 데 꼭 필요한 군용품만 보내는 거지. 물론 그것도 필요해. 하지만 병사들이 흔들린다면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어.”
“미국에 추가 지원을 요청해 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했는데 먹히질 않아. 예산이 정해져 있어서 그걸 지원해 주면 그만큼 군용품을 빼야 한다는데, 지금 상황이 그럴 수도 없어.”
“설마 그냥 가져다 달라는 말씀은 아니시지요?”
진혁은 마음속의 우려를 감추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자신은 자선 사업가가 아니었다. 설혹 이 거래가 여기서 끝나도 딱히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로 인한 피해는 CIA와 시민군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가져와.”
무하마디 사령관의 지시에 옆에 있던 알자위가 뒤에 늘어져 있던 상자 중에 하나를 들고 왔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상당히 무거워 보였다.
“열어 보게.”
탁자 위에 올려진 상자를 열었더니 주변이 환할 정도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금으로 만든 물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밑으로는 금괴로 보이는 것까지 있었다.
어지간한 일에 놀라지 않는 진혁도 어마어마한 보물에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이것이 다 뭡니까?”
“카다피와 측근들의 별장에 있던 물건들이야. 국민들의 피를 뽑아 축재한 것들의 극히 일부지. 이걸 처분해서 물품을 가져다주게.”
“좋습니다. 그렇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환한 미소를 짓는 진혁에게 알자위가 한마디 덧붙였다.
“총사령관님이 병사들을 위해 어렵게 내린 결정이네. 그러니까 암시장 상인들과 같이 취급하면 안 되네. 물품 가격을 적당히 받게.”
“그건 곤란합니다.”
“뭣이!”
화를 내려는 알자위를 막고 무하마디가 물었다.
“우리에게도 같은 가격을 받겠다는 건가?”
“당연히 그렇습니다.”
“이게 어떤 돈이고 어디에 쓰일지 알면서 그러겠다는 말인가?”
“저는 상인입니다. 돈의 가치는 따지지 않습니다. 돈은 돈일 뿐입니다. 또한 내가 파는 물품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거래는 거래일 뿐입니다.”
“상당히 실망스러운 답변이군.”
무하마디가 처음으로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진혁은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카다피 측에서 보면 전 장물아비에 반군을 지원하는 적일 겁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제가 이 거래를 받지 말아야 합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전 상인일 뿐입니다. 미국의 의도가 무엇이든, 시민군의 생각이 어떻든, 물품이 필요하다기에 최선을 다해 공급해 줄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