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휴가 시즌
“엔화 투자한 것은 어떻게 됐습니까?”
“20% 정도 수익이 난 상태입니다. 일본 정부가 방어에 나섰지만 하락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매도하고, 일본전력 주식을 다시 한 번 공매도 해 주십시오.”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는군요. 산업상 장관까지 나서서 일본전력을 파산시킬 수는 없다고 공언하면서 주가가 400엔을 넘어서 상승 중에 있습니다.”
“원전 마피아들 입김 때문에 일본 정부도 파산을 두고 보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일본전력이 두고두고 골치를 썩일 겁니다. 순순히 인정하지 못하겠다니 다시 한번 뜨거운 맛을 보여 줘야지요.”
진혁의 싸늘한 말에 스미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짜들 세상에서 온정은 없다. 상대가 상처 입으면 승냥이 떼처럼 달려들어 살점 하나까지 취하는 게 이쪽 세계의 생리였다.
“기사가 나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천천히 매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저희도 좀 참여해도 되겠습니까?”
“조나단 기자를 소개시켜 준 값은 드려야지요. 다만, 청산 시점은 제가 정합니다.”
“당연한 요구입니다. 저희가 먼저 수익을 챙기지는 않을 겁니다.”
이후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다 웃으면서 헤어졌다.
호텔에서 나온 진혁은 태후물산 젯다 지점의 손기성 과장과 점심을 같이 했다.
한국 식당에 가서 먼저 기다리고 있자 까칠한 얼굴로 손기성이 들어왔다.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인마.”
“저 때문이라니요?”
“갑자기 전화해서 오더 물량을 두 배로 늘리는 놈이 어디 있어? 그거 구하느라 죽는 줄 알았어.”
“과장님이 이렇게 힘드실 줄 알았으면 다른 데로 돌릴 걸 그랬나 봅니다.”
“너 그랬다가는 나한테 죽을 줄 알아. 자식이 무슨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여.”
손기성은 피곤에 절은 얼굴과는 달리 눈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진혁이 주는 오더가 지속된다면 올해 자신의 목표는 달성하고도 남는다. 몸은 피곤해 죽을 지경이지만 기분은 째지게 좋은 것이다.
진혁이 김치찌개를 시키는 모습에 손기성이 투덜거렸다.
“지사장님이 극진하게 대접하라고 법인 카드까지 주셨는데 김치찌개가 뭐냐?”
“이게 저한테는 극진한 대접입니다. 얼마나 먹고 싶었는데요.”
“하긴, 아무리 비싼 산해진미라 해도 고향 음식만 못한 법이지.”
오랜 주재원 생활을 한 터라 금방 이해했다. 소주를 함께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손기성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대체 카이로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는 거냐?”
“무슨 문제 있습니까?”
“너무 잘나가는 게 문제지. 카이로 지사 시절 바이어를 그대로 흡수한 것도 모자라 이번처럼 신규 오더도 척척 받아내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냐?”
진혁은 그냥 웃었다.
손기성은 자신이 받은 기름 오더가 전체 물량의 1/10도 안 되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손기성이 입을 다시 열었다.
“지점장님이 네 덕분에 살았다고 칭찬이 자자하시다. 민주화 바람 때문에 역내 무역이 줄어 여기도 힘든 상황이거든.”
얼마간 손기성이 회사 상황에 대해 봇물 터지듯 푸념을 늘어놓았다.
반대로 진혁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냉정을 되찾았다. 이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들이었다.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진혁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알아차린 손기성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떠난 사람한테 너무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놨다. 그런데 너는 휴가를 어디로 다녀왔기에 그렇게 탔냐?”
“휴가요?”
“8월이잖아. 휴가 시즌이야.”
‘이런.’
진혁이 자신의 머리를 쳤다.
바삐 살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자신은 그렇다고 쳐도, 직원들에게 휴가 가라는 말도 못 했다.
손기성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 설마 8월이 된지도 몰랐어?”
“그게…….”
“하긴 그렇게 일하는데 달력 볼 시간이나 있었겠냐. 그래도 부럽다. 나도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에잇!”
손기성은 다시 입에서 회사 욕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 후 진혁은 식당을 나와 손기성과 헤어져 젯다 공항으로 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 *
그 시각, 정인영은 카이로 공항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밀려오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스스로 생각해도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스페이스 워커의 성공적인 출발에 이번 휴가는 프랑스 니즈 해변에서 편히 쉬려고 예약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인천 공항에서 마음이 바뀌어 이집트로 왔다.
의문의 목소리 주인공.
서진혁 때문에.
택시 정류장으로 향하는 정인영에게 뭇 남성들의 시선이 쏠렸다.
날씬한 몸매에 훤칠한 키, 이목구비가 또렷한 서구적 마스크가 한눈에 보기에도 미인이었다.
거기에 어깨가 드러나는 민소매에 무릎 위까지 올라간 짧은 치마를 입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무리 이집트가 여자에게 관대하다고는 하지만 이슬람교 국가였다. 그래서 일부 시선에는 불쾌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 * *
진혁은 젯다에서 바로 튀니지로 넘어가지 않고 카이로에 들렀다.
전화로 보고는 받았지만 회사를 비운 지가 너무 오래돼서 들렀다가 갈 생각이었다.
엘리베이터에 내려 사무실로 향하던 진혁이 걸음을 멈추었다.
복도 중간에 정인영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인영은 호텔에 들러 짐을 내려놓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왔다.
분명 자신이 알아온 정보로는 카이로 지사 규모는 사무실 한 칸에다 실적도 고만고만하다고 했다.
전략적 에이전시로 선정된 알라딘 컴퍼니가 무리해서 그 사무실을 그대로 인수해 쓰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사무실이 세 칸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끊임없이 사람이 나오고 들어가는 게, 오히려 좁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자신이 잘못 찾아온 건 아닌가 고민하고 있을 때 진혁이 뒤에 도착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말에 인영이 놀라 옆으로 비켜서며 몸을 돌렸다.
놀라는 모습에 진혁이 급히 사과를 했다.
“놀라게 해 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저희 회사는 어쩐 일이십니까?”
진혁의 말에 인영이 기쁜 표정으로 얼른 용건을 꺼냈다.
“여기가 알라딘 컴퍼니인가요?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 때문에 오신 겁니까?”
“서진혁 사장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서진혁입니다만.”
진혁의 말에 인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선팅이라도 한 듯 탄 피부가 그를 현지인처럼 보이게 했다. 그가 당사자라는 말에 더 놀랐다.
인영이 머뭇거리자 진혁이 먼저 물었다.
“혹시 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습니까?”
“아니에요. 한 팀장이랑 같이 근무하고 있어요.”
“태후패션의 한지철 팀장님 말씀입니까?”
“맞아요. 그분에게 들었어요. 미리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한 팀장님 직원이시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진혁의 얼굴에 당장 화색이 돌았다. 오랜만에 동창이라도 만난 듯 반가워했다.
한지철만 진혁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느낌에 인영의 기분도 좋아졌다.
“일단 안…….”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려던 진혁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
곧 퇴근 시간이다. 그전에 직원들에게 휴가를 가라는 말을 해야 하고 밀린 보고도 받았다.
인영이 반갑기는 했지만 회사 일이 우선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급히 회사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아니에요. 갑자기 찾아온 제 잘못이지요.”
“묵고 계신 호텔이 어디입니까? 제가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겠습니다.”
“그렇게 안 해 주셔도 되는데…….”
“그건 안 됩니다. 자기 직원한테 소홀히 했다고 한 팀장님께 무지 혼납니다.”
인영의 머뭇거림을 거절로 느낀 진혁이 재차 부탁했다.
하지만 인영의 고민은 지금 그것이 아니었다.
진혁은 자신을 한지철의 팀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사실을 밝혀야 하는데 왠지 머뭇거려졌다.
호감을 갖던 사람도 자신이 오너 일가라는 사실을 알면 어색해하고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곤 했다.
고민하는 사이 진혁이 다시 부탁했다.
“아웃도어 사업의 근황도 듣고 싶습니다. 꼭 좀 시간을 내주십시오.”
인영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아웃도어 사업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굳이 자신의 신분을 밝혀 대화를 어렵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상대는 태후 직원도 아니고 자신은 휴가 중이었다.
“좋아요. 조세르파트너 호텔에 묵고 있어요. 연락 기다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름이…….”
“정소연이에요.”
“아, 소연 씨군요. 그럼 지금 제가 조금 바빠서. 이따 뵙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허겁지겁 사무실로 들어가는 진혁의 뒷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인영은 알 수 없는 기대감을 안고 그곳을 떠났다.
진혁은 갑자기 나타난 것에 놀란 소마야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갈리 이사를 불렀다.
“사장님, 어떻게 되신 일입니까?”
“젯다에 잠깐 일보러 나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모시러 갔을 텐데요.”
“짐도 없는데 바쁜 분들을 부를 필요 없죠.”
소마야가 내온 커피를 마시며 본론을 꺼냈다.
“제가 깜박 잊고 직원들 휴가 가라는 말을 못 했습니다. 이사님이라도 좀 언질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사장님이 튀니지에서 고생하시는 걸 아는데 저희만 쉰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빨리 계획을 세워 휴가를 다녀오라고 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직원회의 때 이야기를 꺼냈는데, 다들 그냥 일해야 하지 않겠냐고 해서 말씀을 안 드린 겁니다. 실제로 상담이 밀려 있어서 쉴 수 있는 상항도 아닙니다. 다들 원해서 반납하는 거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진혁은 입맛을 다셨다.
“상황이 그렇다니 마냥 가라고 할 수도 없고. 뭔가 직원들에게 보답할 방법이 없을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솔직히 다들 사장님을 좋아해서 일은 하고 있지만 힘든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래서 성과급을 지급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얼마나 하면 좋을까요?”
“200% 정도면 적당할 듯싶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말했다.
“500%씩 지급해 주세요.”
“그건 너무 많습니다.”
“성과급입니다. 이왕 지급할 것 충분히 보상도 하고 앞으로도 더 열심히 일하게 하는 게 맞습니다. 돈이 부족하면 제가 더 내놓겠습니다.”
갈리는 진혁이 통이 클 거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직원들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데 확실히 재주가 있었다.
“아닙니다. 지급할 여력은 충분합니다. 직원들을 대표해서 제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직원 회식도 자주 해 주십시오. 저도 참석하고 싶지만 튀니지의 일 때문에 몸을 빼기가 쉽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대신 사장님의 마음을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튀니지는 얼마나 더 있으실 생각입니까?”
“그쪽 상황이 유동적이긴 한데, 한 달 정도는 더 예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갈리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사장님의 부재가 제일 크지만 카심 씨의 공백도 무시 못 합니다. 게다가 오더가 계속 늘고 있어서요.”
“그럼 인력을 더 충원하세요.”
“충원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늘리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카심 씨가 다시 업무에 합류하기는 힘들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사업이 더 늘어날 겁니다. 무역 파트는 이사님이 핫산 씨와 함께 꾸려 간다고 생각하셔야 될 겁니다.”
“…….”
“구체적인 조직 개편은 나중에 돌아와서 하기로 하고, 우선 인력부터 더 충원하도록 하세요. 다만, 이번에는 신규자로 채용했으면 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지난번에는 당장 업무를 맡아야 하니까 경력자들을 채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있으니 젊은 친구들을 뽑아 가르쳐도 될 듯싶습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세요.”
중요한 안건이 끝나자 갈리는 업무 보고를 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바이어로부터 오더를 받아 진행시키고 있었다. 시장 상인들 위주 신규 오더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업무 보고가 끝났을 때는 이미 퇴근시간이 지나 있었다.
진혁은 회식을 같이하지 못하는 것에 거듭 사과하고 서둘러 정인영이 알려 준 호텔로 가서 그녀를 불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