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한국에서 온 손님
엘리베이터에서 정인영이 걸어 나오는 모습에 진혁의 입이 딱 벌어졌다.
진혁만이 아니었다. 로비에 있던 다른 남성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남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몸매와 미모인데, 진혁을 만난다는 생각에 인영이 평소보다 더 치장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어깨를 드러낸 민소매티는 앞부분이 가슴골까지 드러날 정도로 파여 있었다.
그나마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긴 했지만 짝 달라붙는 스키니 진이라 미끈한 하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시선을 받으며 진혁에게 걸어가는 인영의 걸음걸이는 당당했다.
남자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의 미모에 감탄한 게 분명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닙니다만, 중동은 처음이십니까?”
“주로 유럽 쪽으로 휴가를 갔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왔어요.”
“역시 그렇군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양복 상의를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 줬다.
“……?”
“제가 욕심이 좀 많습니다. 나랑 데이트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들이 힐끔거리는 게 싫거든요.”
인영은 자신을 아끼는 것 같은 말에 얼굴이 더 펴졌다.
하지만 진혁은 속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슬람 국가에서 이런 옷을 입은 거야?’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어떻든 멀리 한국에서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었다.
진혁은 인영을 카이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백화점, 카이로 시티스타 내 최고급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이국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인영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오는 동안 진혁이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아웃도어 사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복 광고가 대박을 터트렸어요.”
인영은 흥분된 목소리로 스페이스 워커 바람막이 재킷의 성공을 들려주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한 팀장님의 능력이 대단하시네요.”
“한 팀장님은 그게 서진혁 씨 머리에서 나왔다고 하시던데요.”
“조언을 조금 했을 뿐입니다.”
“들어보니 아니던데요. 그리고 아웃도어 사업 아이템도 진혁 씨 생각이었다면서요?”
“선배님도 참. 왜 괜한 이야기를 하셔서…….”
진혁은 입맛을 다셨지만 한편으로 한지철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도 여쭤봤어요. 그냥 가만있으면 공을 전부 가지는데 왜 그 사실을 굳이 밝히냐고요. 그랬더니 후배의 공을 가로채서까지 성공하긴 싫다고 하시더라고요.”
“하하하하. 역시 한 선배답습니다.”
진혁이 호탕하게 웃었다.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잠시 말이 끊겼다.
인영이 음식을 먹다 말고 시선을 마주쳤다.
“저도 좋은 아이템 하나 주세요.”
“제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요.”
“에이……. 그러지 말시고요. 네에?”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대놓고 아양을 떠는 인영의 모습에 진혁은 참 대책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표현하지는 않았다.
“무슨 아이템입니까?”
“한 팀장님이 휴가 기간 중에 패션 잡화를 하나씩 선정해서 가져오라고 하셨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것은 운동화, 스카프, 모자, 이 정도인데 이런 것은 다른 직원들도 다 생각했을 것 같아서요.”
“혹시 진급했습니까?”
“예?”
인영은 자신도 모르게 찔끔 놀랐다.
혹시 직급을 물어보면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는데 어떻게 하나 걱정했었다.
하지만 진혁은 그걸 오해했다.
“놀라는 것을 보니 진급을 못 했나 보군요. 그럴 것 같아요.”
“뭐예요?”
“아, 미안합니다. 제가 사업 이야기 할 때는 좀 냉정해져서요. 사업은 인정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 이유라면 받아 줄게요. 대신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알려 주세요.”
“첫 번째 광고가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진혁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인영이 답했다.
“타깃층으로 잡은 학생들에게 제대로 어필하지 못한 게 제일 큰 것 같아요.”
“그걸 알면서도 아직도 고리타분한 등산용 잡화를 생각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
“학생들이 필수품이 뭡니까?”
“교복, 그리고…… 가방. 아, 가방!”
“빙고.”
인영이 활짝 웃는 얼굴로 손바닥을 펴서 낯으로 내밀었다.
짝.
진혁이 손바닥을 부딪쳐 하이파이브를 완성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바람에 인영의 어깨를 감춰 준 양복이 흘러내렸다.
진혁이 일어나며 말했다.
“가방도 기존 학생 가방과 다른 백팩 쪽으로 생각해 보세요.”
“백팩.”
인영이 잊어버릴까 봐 머릿속으로 새기는 사이 진혁은 다시 그녀의 어깨 위에 양복 상의를 올려 주었다.
자리로 돌아온 진혁이 말을 이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씀은 들어 보셨죠?”
“네.”
“이슬람은 여성의 자유가 많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노출이 많은 옷은 피하는 게 좋아요.”
“참 미개한 나라 같아요. 어떻게 이런 나라에서 사는지 모르겠어요.”
진혁의 안색이 굳어졌다. 당연히 나오는 말도 무거워졌다.
“패션에 근무하시는 게 맞습니까?”
“……?”
“태후패션 제품은 세계 각국으로 팔려 나갑니다. 비록 재고품이지만 이 나라에도 팔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연 씨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
“이슬람을 이해도 못 하고 이 나라의 국민들을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소연 씨가 만든 제품이란 걸 알면 이 나라 국민들 누구도 사지 않을 겁니다. 그런 편협한 정신 상태로 일할 거면 지금 당장 다른 데를 알아보세요. 괜히 한 팀장님 얼굴에 먹칠하지 마시고요.”
“제가 실언을 했네요. 생각이 짧았어요.”
바로 사과하는 인영의 태도에 진혁이 오히려 놀랐다.
보통 이 정도면 화를 내거나 최소한 얼굴이 붉어져 말도 안 하는데 그녀는 아니었다.
사과하는 태도도 솔직하고 담백했다.
진혁의 말이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제 말이 조금 과격했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말로만 소비자를 위한다고 해놓고는 실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여러 가지로 좋은 충고 고마워요.”
“그렇게 받아들여 준다니 고맙네요. 소연 씨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좋은 상사와 함께 일하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습니다.”
“맞아요. 한 팀장님은 훌륭한 분이세요.”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한 팀장님도 훌륭합니다만, 전 그 위를 말하는 겁니다.”
“……?”
“초기 광고 실패로 내외부적으로 많은 비난에 시달렸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교복 광고에 대한 아이디어를 줬지만 그걸 위에서 받아 줄지는 저도 반신반의했거든요. 어떤 비난이 쏟아질지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요.”
“맞아요. 솔직히 욕을 엄청 먹었어요.”
“그런데 부하 직원의 말을 믿고 그 모든 걸 감수하면서 결단을 내려 주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사람들과 함께 근무하시는 것 자체가 행운입니다.”
인영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이 딱 맞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자기가 그 사람이라고 밝힐 수는 없었다.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 정체를 들킬 것 같아 인영이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한 팀장님에게 듣기로는 물산 직원이었다가 지사 폐쇄로 독립했다고 하던데, 회사에 불만은 없어요?”
“전혀!”
“정말요?”
“안타까울 뿐입니다.”
“안타깝다고요?”
“눈과 귀를 닫고 잘못된 길을 걷고 있어서요. 그래도 내가 한때나마 몸담았던 곳이라 잘되길 바랐는데…….”
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룹 임원 보고 때 물산의 해외 지사 개편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계속 추진한다고 들었었다.
“지금 지사 폐쇄가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건가요?”
“결정의 잘잘못을 떠나서 그 과정이 문제였다는 겁니다. 현장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독단적인 결정이었습니다. 가장 큰 실수는, 중간에라도 제대로 된 의견을 들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일방적으로 진행했다는 겁니다.”
“혹시 진혁 씨가 그 때문에 회사를 나가게 됐다고 너무 한쪽으로만 보시는 건 아닌가요? ……제 말에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말해 놓고 보니 너무 직설적인 것 같아 인영이 사과하자 진혁은 오히려 미소를 머금었다.
“난 사업에는 냉정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기분 나쁘다니요, 그 점은 걱정 마세요. 이곳에 얼마나 머물 생각입니까?”
“휴가는 일주일이에요.”
“그럼 가정을 해 보지요. 지금은 아니지만 소연 씨는 카이로에 오기 전에 미개한 나라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습니다. 맞습니까?”
“맞아요.”
“그런데 잠깐 들른 이곳에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들은 제가 침묵하거나 오히려 맞장구를 쳐 줍니다. 짧은 휴가가 끝나고 돌아간 소연 씨는 친구들에게 이집트는 미개한 나라라고 말할 테고, 그걸 들은 친구는 이집트는 오지 않을 겁니다.”
인영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진혁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었다.
“정보가 잘못됐다는 건가요?”
“정보 제공자가 자의적으로 가공된 정보를 전달한 것은 맞습니다만, 그게 자신의 생각과 같다고 그대로 믿은 사람이 잘못이 크지요. 하지만 가장 최악은 그걸 믿고 이집트를 완전히 잊어버린 마지막 사람일 겁니다.”
“제가 듣기로는 물산의 그 계획은 성공적이라고 했고, 비교 데이터도 발표된 것으로 알아요. 그런데 아니라니 믿기가 힘드네요.”
인영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진혁은 담담했다.
자신이라도 처음 들었다면 바로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진혁은 이쯤에서 그만둘까도 생각했는데, 기왕 시작한 것 마무리는 지어야 할 것 같아 말을 이었다.
“요즘 패션 쪽 시장 상황은 어떻습니까?”
“다 마찬가지겠지만 좋지 않아요. 유럽발 경제 위기에 내수 부진까지 겹쳐서요.”
“그런데 누군가가 이번에 성공한 아웃도어 매출 데이터를 내놓고 태후패션의 사업이 잘되고 있다고 한다면, 그건 맞습니까? 틀립니까?”
“지금 데이터가 조작됐다는 겁니까?”
“조작된 건 아니지요. 다만 자기에게 유리한 데이터만 제시됐다는 게 문제지요. 최소한 해외 현장을 총괄하는 김선혁 상무님께 의견은 물어봐야죠. 그 점이 제일 안타깝습니다.”
“…….”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합시다. 우리가 태후 그룹 후계자도 아니고 그들이 우리 말을 들어 줄 것도 아닌데. 괜히 우리끼리 열을 낼 이유가 없을 것 같네요.”
진혁은 약속대로 더 이상 태후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자 인영도 더 이상 묻기 힘들었다.
이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눴는데, 인영은 대화를 나눌수록 시장을 보는 진혁의 눈이 날카로움을 느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의 테이블에는 빈 맥주병이 쌓여 갔다.
시계를 본 진혁이 말했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죠. 나머지는 나중에 또 만나게 되면 그때 마저 하도록 합시다.”
“그래요. 오늘 도착했더니 조금 피곤하네요. 좋은 이야기 고마웠어요.”
“별말씀을. 갑시다. 제가 호텔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진혁은 예의 바르고 안전하게 인영의 호텔까지 동행해 줬다.
다음 날, 늦게 일어난 인영은 나가기 귀찮아서 룸서비스를 불러 식사를 했다.
커피를 마시며 진혁과 나눈 대화들을 떠올렸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시선. 두 가지 모두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다시 만나 보고 싶었다.
오늘은 자신이 저녁을 사고 싶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진혁에게 받은 명함을 꺼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를 않았다. 그래서 회사로 전화를 했다.
여직원이 아랍어로 전화를 받자 영어로 말했다.
“서진혁 사장님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는 영어로 답이 들려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사장님은 지금 외국 출장 중이십니다.
“예? 어제 저녁에 함께 식사를 했는데요?”
-밤늦게 출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호텔에 바래다주고 바로 공항으로 갔다는 말이었다.
“그럼 언제 돌아오시나요?”
-정확한 일정은 말씀 안 하셨습니다. 아마 한 달 정도는 걸리실 것 같은데, 메모 남겨 주시면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다시 전화하죠.”
전화를 끊은 인영이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