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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53화 (53/307)

53화. 진실 알리기

그는 처음부터 자신을 다시 만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외국 출장에 대해 자신에게 미리 알려 줘야 했다.

정인영은 그런 결론을 내고 나서야, 어제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진혁이 자신에 대해 한마디로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훗, 그저 한지철 팀장의 직원이라고 생각해서 친절을 베풀었을 뿐인가?’

남으로부터 이런 평범한 대접을 받는 게 처음이었다. 자신이 애초에 의도한 대로 됐지만 기분이 묘했다.

잠시 진혁에 대해 더 생각하던 인영은 서둘러 짐을 쌌다.

한국의 일이 급했다.

한편, 튀니지에 도착한 진혁은 잭슨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기쁜 소식이었다.

잔주르를 함락시킨 시민군이 조만간 수도 트리폴리 공략에 나선다고 했다.

-시민군이 삼면에서 포위하고 있으니 트리폴리 장악은 시간문제야. 그럼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났다고 봐야지.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그럼 우리 작전도 끝나. 더 이상 군수품을 지원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미스터 서도 마무리할 준비를 해야 할 거야.

“그래야겠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서로 돕고 사는 거지. 카다피를 때려잡고 편하게 한잔하자고.

“좋습니다. 제가 모시지요.”

전화를 끊은 진혁은 카심을 불러 물품 구입을 일주일 단위로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과하게 매입했다가 트리폴리가 함락되어 CIA가 구입을 중단해 버리면 처리가 곤란해진다.

지원하는 시민군이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모든 것이 여유로웠다.

진혁은 지중해가 바라다 보이는 노천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즐기며 휴가를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 * *

한국에서는 은밀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강남의 유명한 일식집의 VIP 룸 앞에서 김선혁 상무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정인영 본부장이 한지철을 통해 비밀스럽게 만남을 청해 왔다.

그룹 신년회 때 얼굴만 본 사이로, 하는 일이 달라 자신을 이렇게 몰래 보자고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유를 먼저 물을 수도 없었다. 비록 직급은 낮지만 그녀 역시 후계자 중의 한명이었다.

심호흡을 한 김선혁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인영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어났다.

“갑자기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궁금하실 테니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는 천천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산에서 진행하고 있는 해외 지사 개편은 잘되고 있나요?”

김선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기치 못한 질문이었다. 게다가 굉장히 민감한 사항이라 함부로 답하기도 곤란했다.

“그룹 임원회의 때 보고가 됐는데 이렇게 따로 불러 물으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보고 데이터가 조작됐다는 말을 들었는데, 맞나요?”

“그건 아닙니다. 데이터는 정확합니다.”

“아, 제가 단어를 잘못 선택했군요. 유리한 데이터만 제시됐냐고 묻는 게 맞을 것 같네요. 사실인가요?”

김선혁은 쉽게 답을 하지 않았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걸 쉽게 내뱉을 수는 없었다. 기획실장 정호영의 치부를 들추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상대도 후계자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인영이 이렇게까지 불러서 이야기할 때는 어느 정도 심증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니 무조건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잘못하면 후계자 간의 권력 투쟁에 휘말릴 수가 있었다.

난감해하는 김선혁의 표정에서 서진혁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김선혁이 갈등하는 이유도 짐작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언젠가 한번 약주를 잡수시고 오셔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후계자 수업 시절 김 상무님께 참 많이 배웠다고 하시더군요.”

“……!”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숨겨진 이야기였다.

회장 정진호가 회사에서 처음 근무할 당시 김선혁이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었다.

오너 일가라 과장으로 들어온 정진호에 비해 직급은 낮았지만 김선혁이 실무에서는 선배로 교육을 맡았다.

그때만 해도 혈기 왕성했고 정진호에 대해 아무도 이야기해 주지 않아 원칙대로 심하게 굴렸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기억이었다.

“상무님이 어떤 걱정을 하시는지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전 오빠를 누르고 후계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아니, 오빠가 당당히 인정받기를 원해요.”

“…….”

“뻔히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것은 오빠를 위해서도, 아버지를 위해서도, 더 나아가 태후를 위해서도 옳지 않은 일입니다.”

김선혁은 더 이상 침묵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영은 이미 사실을 알고 추궁하고 있었다.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상무님은 해외 현장을 총괄하고 계십니다. 당연히 이번 해외 지사 개편에 관련해서 의견을 개진할 권한도 가지고 계시고요. 기획실에서 막는다면 회장실에 직보라도 하셔야지요.”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연말 실적이 집계되면 감추고 싶어도 감춰질 수 없는 일입니다. 해외 지사에서는 이미 기획실의 문제점을 다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오빠를 위하는 길인지 고민해 주셨으면 합니다.”

“……!”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제가 나서면 상무님이 걱정하시는 것 이상으로 후폭풍이 불 겁니다. 그 전에 물산 내부에서 정리되는 게 가장 이상적입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며칠 내로 회장님을 찾아뵙겠습니다.”

마침내 김선혁이 결단을 내렸다.

인영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애초에 제가 했어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불러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무슨 비난을 듣더라도 제가 나서서 막겠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그럼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그건 이 일을 묻어두는 것만도 못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든 회장님을 설득시킬 거고, 그 책임도 제가 떠안을 겁니다. 그러니 본부장님도 더 이상 머리에 담아 두지 마시고 잊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상무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따르겠습니다. 그럼 이제 음식을 주문해요.”

인영이 벨을 눌러 종업원을 부르려는 것을 김선혁이 막았다.

“그 전에 저도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요?”

“이 일을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

“발설자를 찾아 추궁하자는 게 아닙니다. 민감한 일이고,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정보를 알고 대비해야 합니다.”

이마를 찌푸리며 잠식 고민하던 인영이 입을 열었다.

“이번 휴가 때 카이로에 들렀습니다.”

스페이스 워커의 성공에 진혁의 도움이 있었다는 한지철의 말을 듣고 호기심에 찾아가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허어……. 그놈이라면 충분히 그런 말을 하고도 남은 놈입니다. 정말 아까운 인재입니다.”

“실은 서 사장님은 제가 누군지 모르시고 한 말씀이에요.”

“……?”

인영은 오해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들려주었다.

“혹시 나중에 만나시더라도 제게 들었다는 말씀을 먼저 하시면 안 돼요.”

“알겠습니다.”

“아무튼 서 사장님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가요?”

“오더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놈입니다. 감각은 물론 추진력까지 뛰어나지요.”

진혁의 이야기가 나오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진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 *

그 시각, 미국과 일본은 난리가 났다.

NS 통신의 특종 기사 때문이었다.

‘친구에게 농락당한 미군’이란 자극적인 제목에다 동일본 대지진의 재건 작업에 참여한 미군이 방사능 피폭 후유증에 시달리는데도 백악관과 국방부는 쉬쉬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폭로성 기사였다.

당시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의 승무원이었던 마크 씨가 격렬한 허리와 등 통증, 기억 상실의 면역계 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인터뷰도 실렸다.

기사가 공개되자 당장 백악관이 움직였다. 그들은 일본전력과 일본 정부의 발표를 믿었다며, 당시 참여한 미군 전원에 대한 방사능 검사를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는 별도로 대형 로펌인 폴헤잉스가 그동안 자체적인 조사를 통해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암이 발병한 미군 50여 명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해 일본전력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20억 달러 이상의 대형 소송을 미국 지방 법원에 제기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접한 일본 내 피해자들은 일본전력이 소송에서 지면 파산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서둘러 피해 소송을 법원에 접수했다.

그 바람에 일본 정부가 겨우 만들어 놓은 여론이 무색해졌다.

다음 날 열린 주식 시장에서 그동안 꾸역꾸역 올라왔던 일본전력 주가가 단번에 내리 꽂히기 시작했다.

* * *

회장실 앞에선 김선혁 상무가 다시 한번 옷차림을 점검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입니다, 김 상무님. 그동안 너무 내외하신 것 아닙니까. 얼굴 잊어버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주 찾아뵀어야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제가 소홀했습니다.”

정진호의 얼굴은 좋아 보였다.

세계 경기의 하락으로 그룹의 실적이 지지부진했지만 그건 태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들 정호영은 해외 지사 개편 작업을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고, 크게 기대하지 않은 딸 정인영이 스페이스 워커를 당당하게 성공시키자 아비로서 기분이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파에 앉고 비서가 커피를 내오자 정진호가 물었다.

“얼굴이나 보자고 찾아오신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용건입니까?”

“해외 지사 개편 건으로 보고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건 기획실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아는데, 왜 김 상무님이 따로 보고하러 오신 겁니까?”

어느새 정진호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져 있었다.

회사 내에서 그 눈초리를 제대로 받아낼 인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김선혁은 심호흡으로 배에 힘을 주고 말을 이었다.

“해외영업본부장으로 현장의 상황을 보고드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서 왔습니다.”

“음, 틀린 말은 아니군요. 일단 봅시다.”

김선혁은 가져간 결재판 중 첫 번째 것을 정진호가 앞에 보기 편하게 펼쳐 놓았다.

첫 부분은 이미 기획실에서 보고한 것과 마찬가지로 1단계 개편이 성공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지표들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은 처음 보는 내용들이었다.

서류를 넘길수록 정진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지막 장을 닫은 정진호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데, 눈빛은 싸늘하다 못해 비수가 되어 있었다.

“지금 기획실의 보고가 잘못됐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기획실의 보고에 대한 판단은 제가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해외 지사 총괄 책임을 맡고 있어 현장의 상황을 보고드리는 겁니다.”

김선혁은 답변에 신중을 기했다. 자칫 잘못 말했다가는 정호영을 비난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었다.

그런 처신이 마음에 들었는지 정진호의 눈빛이 한풀 꺾였다. 하지만 여전히 날카로움은 유지하고 있었다.

“김 상무님이 갑자기 찾아와서 잘못된 자료를 내놓으실 분도 아니고. 결국 기획실의 보고와 달리 해외 지사 쪽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건데,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설마 기획실에서 허위 보고를 했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기획실의 보고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일부에 국한된 데이터만 참조하다 보니 전체적인 내용을 담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이번에도 김선혁의 답변은 신중했다.

기획실에 보고에 문제가 있다는 언급을 극도로 피했다.

하지만 정진호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김선혁이 가져온 자료로 정호영의 해외 지사 개편이 실패했다는 것은 명확했다.

이 지경이라면 당장 추가 계획의 진행을 막는 것은 물론, 이미 진행된 것도 되돌려 놀아야 할 판이었다.

허탈함에 정진호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자신은 유학을 포기하고 바로 후계자 수업을 받아야 했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아쉬움을 느꼈다.

그래서 정호영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도 무리해 책임을 맡겼는데 그게 실책이었다.

현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일이 벌어졌다.

생각을 굳힌 정진호가 입을 열었다.

“당장 해외 지사 개편 계획을 중단하고, 기존에 진행된 것도 복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세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회장님.”

“김 상무!”

자신의 지시에 토를 다는 김선혁의 모습에 정진호가 노기를 터트렸다. 호칭도 지금까지와 달랐다.

일순간 장내가 싸늘하게 식으며 긴장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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