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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54화 (54/307)

54화. 건드린 대가

오너가 화를 내는 경우 물러나야 하지만 김선혁은 그럴 수 없었다. 원하는 대로 됐지만 그룹의 미래를 위해서는 최선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회장님은 처음 근무할 당시 실수도 참 많이 하셨습니다. 메모를 잘못 전달해 오더가 취소될 위기도 있었고, 엉뚱한 자료를 복사해와 회의 진행이 엉망이 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화도 많이 냈었지요.”

“……!”

“기획실장님은 이번이 처음 맡는 일입니다. 해외 지사 개편은 필요한 일이기도 했고, 일부는 실질적으로 개선된 부분도 있습니다. 모두가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보완책을 마련해 봤습니다.”

김선혁 가져간 두 번째 결재판을 다시 펴 놓았다.

잠시 노려보던 정진호가 시선을 내리고 서류를 읽었다.

문제점 지적은 냉정했고, 대책은 적절했다.

추진 계획은 현재의 실적만 보고 당장 시행하는 게 아니라, 향후 전망과 지역적인 특성을 따져 폐쇄를 신중히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폐쇄 결정이 내려져도 일 년간 현지 사무소를 유지하며 바이어의 이탈을 막는 등 합리적이었다.

그에게 교육받던 시절 배우고 싶었던 김선혁의 업무 능력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정진호가 입을 열었다.

“김 상무님이 그 자리에 앉으신 지 얼마나 되셨지요?”

“상무를 달 때였으니 5년이 됐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그동안 참 무심했습니다.”

“…….”

“이 일은 제가 좀 더 생각해 본 다음 결정해서 처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와서 좋은 이야기 좀 해 주십시오. 오늘처럼 옛날이야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하하하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정진호의 모습에서 김선혁은 내내 가슴을 누르고 있던 큰 짐을 내려놓았다.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 * *

튀니지의 진혁은 여전히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잭슨의 장담과는 달리 시민군의 트리폴리 공략은 쉽지 않았다.

카다피 진영도 결사 항전으로 맞서고 있어, 벌써 열흘째 치열한 공방만 벌일 뿐 방어선이 무너지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노천카페에 마주 앉은 잭슨의 얼굴도 좋지 않았다.

“지부장이 괜히 일찍 보고하는 바람에 백악관에서 계속 독촉하고 있어.”

“시간의 문제이지, 언제까지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느긋하게 기다리세요.”

“자네야 그동안 계속 돈을 버니 길어질수록 좋겠지만 우린 아니야. 잘못하다가는 지금까지 한 성과도 묻혀 버릴 판이라고.”

잭슨이 으르렁거렸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느긋하게 커피 잔을 들던 진혁의 시선에 도로 위로부터 빠르게 달려오는 차가 들어왔다.

이곳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창문이 진하게 선팅 된 하얀색 SUV 차량이었는데…… 왠지 거슬렸다.

그사이 가까이 다가온 차의 창문이 열렸다.

그 틈으로 무언가 기다란 게 나왔다.

총구……!

“피해!”

말보다 행동이 빨랐다.

급히 외친 진혁은 이미 바닥에 엎드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총성이 대지에 울려 퍼졌다.

따다다다다다다다다다.

밖으로 나온 총구에서 뜨거운 불이 쏟아져 나왔다.

총탄은 가로막는 것들은 모두 벌집을 만들었다.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으아아악!”

“크으으윽.”

여지저기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혁은 재빨리 잭슨부터 확인했다.

“빌어먹을. 저격이야.”

눈이 마주치자, 입구의 벽에 등을 대고 피해 있던 잭슨이 투덜거렸다.

덩치가 커서 둔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도 CIA 요원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진혁의 경고를 듣고 몸을 숨겼다.

언제 꺼냈는지 손에 권총까지 쥐고 있었다.

타이어 소리가 스쳐지나가고 총탄이 날아오지 않자 잭슨이 바로 일어나 총을 쏘았다.

“개자식들. 이거나 먹어라.”

탕탕탕탕탕탕탕탕!

철컥.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잭슨은 총알이 다 떨어질 때가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SUV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유유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으으으으…….”

옆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에 진혁이 놀라 몸을 일어났다. 죄 없는 웨이터가 대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다가가려고 발을 떼려는 순간 다시 날카로운 소리가 귀에 들렸다.

부룽부룽. 부아아아앙.

골목에서 튀어 나온 모터사이클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2차 공격이야. 젠장!”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던 잭슨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방금 전 총알을 모두 써 버렸다.

검은 헬멧을 쓰고 운전석에 앉은 사내의 한 손에는 가방이 들려 있었다.

폭탄이다.

이건 몸을 숨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잭슨의 몸도 딱딱하게 굳었다.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

진혁이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쓰러진 웨이터 옆에 그가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쟁반이 보였다.

재빨리 들어 힘껏 날렸다.

슉슉. 슈웅!

회전하며 날아간 쟁반이 정확히 오토바이의 앞바퀴를 강타했다.

끼익. 끼이이이익.

중심을 잃은 오토바이가 잠시 비틀거리다가 넘어지더니 길 위를 미끄러져 건너편 건물의 벽에 부딪혀 멈췄다.

꽈과과광!

그 순간 굉음과 함께 뿌연 먼지가 날렸다.

폭탄이 터진 것이다.

먼지가 걷힌 현장은 참혹했다. 무너진 건물 내부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진혁의 주변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부상자에게 다가가려는 진혁의 팔을 누군가 잡았다. 잭슨이었다.

“자넨 자리를 피해야 해.”

“잭슨 씨!”

“곧 경찰이 들이닥칠 거야. 그러면 상황이 복잡해져.”

“응급 전화라도 해 주십시오.”

“그럴 거야. 오늘 항해는 중단하게. 내가 전화하지.”

“기다리겠습니다.”

진혁이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잭슨은 CIA라 상관없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경찰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숙소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잔뜩 굳은 얼굴로 들어온 진혁이 오늘 항해는 취소됐다는 말만 하고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의 휴식이라 좋아해야 하는데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 * *

다음 날 오후, 진혁이 잭슨의 전화를 받았다.

-카이리가 보낸 암살단이었어.

“그자가 누굽니까?”

-카다피의 막내아들로 정부군의 정예 부대인 ‘카이리 여단’을 이끌고 있어. 지금 트리폴리 방어도 놈이 지휘하고 있지.

“그자가 왜 우리를 노린 것입니까?”

-시민군의 보급로가 원활해진 이유를 알아낸 것 같아. 자네의 얼굴을 본 병사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알려질 때도 됐지. 내가 너무 안일했네.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물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당연히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숨어야지. 지독한 놈들이야. 실패한 걸 알게 되면 또 공격해 올 거야. 우리는 놈들을 쫓느라 여유가 없어.

“……다시 전화드리지요.”

-몸조심하게.

전화를 끊은 진혁은 카심에게 바라캇과 선원들을 불러 모으게 했다.

건장한 사내 열여덟 명이 한곳에 모이자 넓은 거실도 꽉 찼다.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들에게 진혁이 말했다.

“오늘 항해는 예정대로 진행됩니다. 다만, 이번 항해는 지금까지와 달리 극히 위험할 겁니다. 최악의 경우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

“그래서 이번에는 순번에 상관없이 희망자만 가게 될 겁니다. 빠지신다고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빠지는 건 절대 비겁한 짓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가족들을 생각해 신중하게 결정하십시오. 선장은 결정되는 대로 항해 준비를 하세요.”

말을 마친 진혁은 수군거리는 그들을 놔두고 방으로 돌아왔다.

잭슨은 숨으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걸리는 것도 많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게 최선이었다.

출항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오자 선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항해에 가기로 결심한 이들이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바라캇과 레자는 포함되어 있었다. 대부분 처음부터 같이했던 이들이었다.

진혁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하고 먼저 걸음을 뗐다.

* * *

그날 저녁, 목적지인 트리폴리 외곽의 해변에 도착하자 연락을 받은 알자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CIA가 작전이 중단됐다고 해서 더 이상 못 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온 건가?”

“총사령관님을 뵙고 싶습니다. 용건은 그때 말씀 드리겠습니다.”

“알겠네. 가지.”

그동안 지켜본 바로 진혁은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알자위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지프차에 오르자 진혁이 옆자리에 탔다.

지휘 본부 막사로 가자 무하마디 총사령관이 있었다. 못 본 사이 얼굴이 피곤에 절어 까칠해져 있었다.

긴 전투로 지친 데다 예상과 달리 트리폴리 진입에 번번이 실패하니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것이다.

“암살 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무사해서 다행이야.”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CIA는 작전을 중단했다는데 왜 온 건가?”

“그들이 제 목숨을 노렸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도망쳐 숨는 것은 제 적성에 맞지 않습니다.”

진혁의 호기로운 답변에 무하마디의 얼굴에 요 며칠 사이 처음으로 웃음이 맺혔다.

“하하하. 어이없지만 그래도 속은 시원하네. 하지만 이번 일을 지시한 자가 카이리야. 지독한 놈이지.”

“들었습니다. 트리폴리 방어도 놈이 지휘하고 있다면서요?”

“그래. 놈이 이끄는 카이리 여단이 길목을 막고 있어서 진입이 쉽지 않아.”

“제가 길을 뚫지요.”

“자네가 무슨 수로?”

“막힌 보급로를 뚫은 게 저라는 걸 잊으신 겁니까? 지니호로 이번에는 시민군을 날라 드리지요. 앞뒤로 공격받으면 놈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겁니다.”

무하마디와 알자위가 눈을 마주치자마자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막힌 묘수였다.

지휘 본부의 막사가 갑자기 바빠졌다.

각 여단의 지휘관들이 속속들이 도착해서 작전 회의가 열렸다.

진혁의 계획에 다들 흔쾌히 동의했다.

침투는 시민군 중 가장 용맹한 순교 여단이 하기로 했다. CIA를 통해 미국에도 작전 계획을 알려 연합군도 지원하기로 했다.

후일 ‘인어의 새벽’이라 불리게 되는 작전은 그렇게 계획되었다.

* * *

시민군과 연합군이 총공세를 감행해서 정부군의 시선을 외곽으로 돌려놓은 사이, 트리폴리 중앙 인근 해상에 대기하고 있던 지니호가 빠르게 해변에 도착해 병사들을 내려놓았다.

결국 ‘카이리 여단’은 앞뒤 협공을 받아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 직후 정부군도 무기를 내려놨다.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었다.

카다피가 빠져나가 잡지는 못했지만, 수도를 함락하는 것으로 사실상 전쟁은 시민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CIA는 약속대로 시민군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암시장 상인들은 카다피가 잡힐 때까지만이라도 계속 물건을 공급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진혁은 남은 물건만 소진하고 거래를 끝냈다.

진혁은 마지막 항해에 참가한 선원들에게는 보너스로 20만 달러,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10만 달러를 나눠 주고 돌아가게 했다.

지니호는 예정대로 잭슨에게 다시 넘겨주고, 돌아오는 길에 카심은 50만 달러가 든 가방을 받았다.

* * *

진혁은 카이로로 돌아와 알라딘 컴퍼니의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가장 시급한 게 새로 뽑은 직원에 대한 결정이었다.

그동안 갈리는 다섯 명의 신입을 뽑아 각 파트별로 배치해 수습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갈리는 그중 반 정도만 받아들이자고 했다. 하지만 진혁은 모두를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게 했다. 앞으로 일이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테니까.

밀린 결재를 하던 진혁은 전화를 받고 시장의 한 카페에 들어섰다. 알트라드가 이미 와 있었다.

“리비아 영웅의 귀환을 축하하네.”

“영웅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무슨 소리? 트리폴리 함락의 일등 공신인데. 나중에 시민군이 정권을 잡으면 한자리 얻어서 건너가는 거 아니야?”

“이미 대가는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있을 곳은 여기 카이로입니다.”

“아무튼 대단했어. 어둠을 뚫고 LCU를 몰고 나타날 때부터 나는 자네가 큰일을 할 거라고 예상했네. 아, 그 전에 내 앞에서 당당히 폭탄이 든 가방을 보여 줄 때부터 알아봤다고 해야겠지.”

이후 쓸데없이 과거의 일을 들추며 시간을 끄는 알트라드의 모습에 진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유가 있어 불러낸 게 분명했다.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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