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서울 모스크
알트라드도 더 이상 감추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아직 카다피도 잡히지 않았는데 서둘러 사업을 정리한 이유가 뭔가?”
“카다피가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래? 그럼 왜……?”
“카다피가 잡히면 앞으로 시민군 내부에서 본격적인 권력 투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극심한 혼란이 오겠지요. 그때부터는 누가 친구고 누가 적인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될 텐데, 돈 몇 푼 때문에 목숨 걸고 싶지는 않습니다.”
“혼란은 우리 암거래 상인에게는 가장 큰 기회야. 그래서 그쪽에서 계속 거래를 원하고 있어. 더 높은 가격까지 제시하면서.”
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알트라드가 보자고 할 때 그의 목적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아무리 위험하다고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알트라드가 아니었다.
“리비아 암거래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있네, 아주 많이. 하지만 자네가 튼 거래야. 아무리 욕심난다고 친구 밥그릇을 빼앗을 수는 없지.”
“전 괜찮습니다. 이미 손을 뗐으니 알트라드 씨가 거래를 지속한다고 해도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자넨 단순히 소개만 해 줬는데도 내게 생필품 공급권을 줬어. 그런데 내가 아무런 인사 없이 그냥 받을 수는 없지. 미스터 서가 기름을 공급해 주게.”
진혁은 순간적으로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저었다.
그렇게 하면 손을 턴 이유가 없었다.
“그 말씀으로 선물을 받았으니 됐습니다. 그러니 제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러는 건 아닌데.”
“계속 이러시면 다시는 안 볼 겁니다.”
“참, 사람도. 더 말 못 하게 하네. 좋아. 이번 건 내가 알아서 하지. 하지만 자네에게 빚진 것은 맞아. 언제건 자네가 원할 때 나도 도움을 주지.”
“그거면 됐습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트라드가 비록 어두운 일은 하고 있지만 은원은 확실한 사람이었다. 작은 이득을 취하느니 빚을 남겨 두는 게 더 나았다.
* * *
알라딘 컴퍼니의 일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진혁은 한국으로 늦은 휴가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두 달간 리비아의 일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어서 휴식이 필요했다.
갈리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카심에게도 휴가를 주라고 지시했다.
사장실에서 휴가 가기 전 마지막 업무를 점검하고 있을 때 카심이 찾아왔다.
“한국에 간다고요?”
“쉬려고요. 부모님도 뵈어야 하고요. 그동안 카심 씨도 좀 쉬세요.”
“나도 한국에 함께 가 보고 싶습니다.”
“한국에 함께 가시겠다고요?”
“왜? 불편할 것 같아요?”
“무슨. 저야 당연히 대환영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는 한번 같이 가려고 했습니다. 한국 상품을 계속 가져올 건데, 거기에 대해서 알아 두는 게 좋지요.”
진혁의 신이 난 표정에 카심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혹시라도 그가 불편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럴 게 아니라 비행기 표도 알아보고 호텔도 예약해야겠습니다.”
“호텔은 안 잡아 줘도 됩니다. 묵을 곳은 있습니다.”
“한국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서울에 모스크가 있습니다. 제 사촌이 이맘으로 있으니 거기서 함께 지내면 됩니다.”
무슬림은 하루 다섯 번 예배를 드린다. 그때 신자 중 한 명이 앞으로 나가 예배를 인도하는데, 그를 이맘이라고 불렀다.
진혁이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런 지인이 있었으면 진작 말씀하시지요. 그럼 예전에도 같이 갔을 텐데.”
“지금까지는 회사 일로 계속 바빴지 않습니까. 사는 데 여유도 없었고. 이번에는 휴가라 한번 다녀올 생각입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내일 출발할 것이니 서둘러 준비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이번 한국행은 출장으로 처리할 테니 그렇게 아십시오.”
“그럼 나야 좋죠.”
카심의 얼굴이 활짝 폈다.
카이로에서 인천 공항까지 비행기 값만 2,000달러가 넘는다.
그런데 출장이면 그것 외에도 모든 경비 일체를 회사에서 부담하니 돈 걱정이 확 줄었다.
이제 그도 회사원이 다 되어 있었다.
* * *
이틀 후 진혁은 카심과 함께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고 이태원역 정류장에 내렸다. 모스크가 이태원역 근처의 우사단길에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갈 테니 미스터 서도 그만 집에 가 보세요.”
“아닙니다. 그래도 제가 모스크까지는 데려다 드릴게요.”
“사람 참.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한국말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 갈 테니 어서 가 보시라니까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카심은 한국이 처음이지만 한국어가 가능하니 충분히 물어서 갈 수도 있었다.
“제 핸드폰 번호 가지고 계시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셔야 합니다.”
“여기 이렇게 적혀 있잖아요. 혹시 모른다며 부모님 핸드폰 번호에 집 전화번호까지 직접 적어 줘 놓고는. 얼른 가기나 해요.”
카심에 떠밀려 지하철역으로 향하며 진혁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카심을 믿지만 그래도 자꾸 마음이 쓰였다.
그럴 때마다 카심의 인상 쓴 얼굴을 보고 얼른 돌아서야 했다.
이태원까지 들렀다 오느라고 진혁이 고덕동의 집에 도착한 건 7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왔습니다.”
벨도 누르지 않고 소리치자 현관문이 기다렸다는 듯이 열렸다.
며칠 전부터 오늘 도착한다고 전화드렸다.
“어머니, 저 왔어요.”
“왔니. 들어와라.”
평소와 달리 어머니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따라 들어간 진혁이 텅 비어 있는 거실을 보고 물었다.
“아버지는요?”
“술 약속이 있다고, 너 오면 저녁 먹으라고 하더라.”
“선물 사 왔어요. 이번에는 가방이에요.”
“그래, 고맙다. 저녁 차릴 테니 얼른 씻고 와라.”
선물을 확인도 않고 옆에 내려놓고 힘없이 돌아서 주방으로 가는 어머니의 모습에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으로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상이 차려져 있었다. 좋아하는 갈비와 잡채에 콩나물국까지 놓여 있었다.
그런데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늘진 어머니의 얼굴 때문이었다.
일부러 이집트에서의 일을 재미나게 각색해 들려주며 분위기를 띄우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어렵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 진혁은 커피를 앞에 두고 물었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없어. 외국 나가서 고생하는 너도 있는데 한국에서 뭐가 힘들겠니.”
“그러지 말고 말씀해 보세요. 아버지가 술 많이 드시는 것 때문에 그러세요?”
“…….”
“맞네. 아버지 오시면 제가 따끔하게 말씀드릴게요.”
“그러지 마라. 네 아버지도 힘드실 거야.”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진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 있어요?”
“휴. 회사에서 다시 구조 조정을 한다며 직원 중에 한 명을 또 내보내라고 한단다. 지난번에 내보낸 직원도 택배 일을 하면서 어렵게 산다고 하던데…….”
진혁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IMF로 한국인들에게는 구조 조정이란 단어가 익숙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상황이 더 심각했고, 앞으로도 계속 심해지게 된다.
“그리고…… 할아버지 건강이 안 좋으시다.”
“예? 할아버지가요? 어디가 안 좋으시대요?”
어머니가 당장 전화를 하려는 진혁을 말렸다.
“괜히 전화해서 걱정 끼치지 마. 특별히 어디가 아프신 게 아니라 연세 때문에 그러시는 거지. 사람이 세월을 이길 수는 없잖니.”
“그렇기는 하지요. 그래서 아버지가 걱정이 많으셔서 술을 자주 드시는가 보군요.”
“술을 드시는 거야 이해할 수 있지만, 퇴직하고 고향에 내려가자고 그렇게 성화시다.”
“속초로요?”
“그래. 할아버지가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냐며, 그때까지는 자신이 모셔야 한이 없겠다고 고집을 부리신다. 그 마음은 알지만 할아버지 보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잖니.”
“그건 그렇지요.”
진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마음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퇴직금하고 이 집 판 돈으로 배 하나 사서 바다 일 하면 된다고 하시는데, 평생 그 일만 한 어민들도 먹고살기 힘들다는데 네 아버지가 어떻게 하신다고……. 그렇게 해서 퇴직금 모두 날리고 신용 불량자가 된 사람이 주변에 한둘이 아니야.”
“아버지께 말씀드려 보시지 그랬어요?”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 그런데 들은 척도 안 하신다. 같이 안 가면 이 집 줄 테니 나 혼자 여기서 살라고까지 하신다. 에휴.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서 살아야 하는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하시는 무심한 사람이다, 네 아버지가.”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그냥 부부 싸움이 아니었다. 상황이 심각했다.
“제가 아버지 오시면 말씀 나눠 볼게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그래 봐라. 이젠 나도 모르겠다.”
어머니도 지치셨는지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대화 시간은 가질 수 없었다.
술에 취해 늦게 오신 데다 아침에 출근해야 해서 다음을 기약했다.
결국 진혁은 어머니만 달래 주고 집을 나섰다.
이태원역 3번 출구로 나가 두 번째 골목에 접어들자 히잡을 쓴 관광객들이 눈에 띄었다.
아랍어로 된 간판에 상점들도 눈에 띄었다.
모스크는 계단 끝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몸가짐을 확인한 진혁은 우두에서 몸을 씻고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3층의 예배실로 가자 카심이 이슬람 전통 복장인 토브에 머리에는 구트라를 쓴 아랍인과 함께 있었다.
“사촌인 나흐얀입니다.”
“서진혁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심 형님에게 우리 형제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나흐얀은 신을 모시는 사람답게 차분한 인상이었다.
예배 시간이 아니기에 한쪽에 마련된 상담실에서 대화를 나눴다.
“제가 서울에 살면서도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한국인에게 이슬람은 조금은 낮선 종교지요. 하지만 통일신라 때 처음 전파되었으니 역사가 짧은 것은 아닙니다. 한국 내 무슬림이 이미 10만이 넘고, 그중 한국인이 3만 5천 명 정도입니다.”
“생각보다 많군요.”
“그 수는 앞으로 꾸준히 늘어날 겁니다. 2025년이 되면 무슬림이 전 세계 인구의 25%인 22억이 될 거라는 보고도 있습니다.”
“대단하군요.”
“한국인들은 중국의 12억 인구에 열광하면서 그보다 많은 17억 무슬림에 대해서는 너무도 관심이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던 차에 카심 형님으로부터 미스터 서의 이야기를 듣고, 뵙고 싶어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진혁도 같은 생각이었다.
비록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지만 그들의 잠재력은 중국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깨닫는 이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무슬림 하면 중동이 생각나고 그곳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테러부터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오사마 빈라덴의 9・11 테러였다.
TV를 통해 쌍둥이 빌딩에 여객기가 처박히는 모습을 본 전 세계인의 머릿속에는 ‘무슬림은 테러 집단’이란 인식이 심어졌다.
이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흐얀은 진혁이 무슬림에 대한 인식이 남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슬림에 대해 우리 신자들보다 더 많이 아시는 것 같습니다.”
“아시겠지만 전 무슬림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슬림을 상대로 사업을 하는데 그들에 대해 이해를 못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비록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지만, 제가 하는 일이 무슬림에게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 마음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많은 이들이 앞에서는 우리를 위한다고 하면서 뒤로는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이간질시키고 이용만 하는 형태를 너무도 많이 봐 왔습니다. 그래서 미스터 서의 진솔한 말이 더 마음에 와 닿는 모양입니다. 앞으로 그 마음이 끝까지 변치 않으셨으면 합니다.”
“변치 않을 겁니다. 만약 변한다면 여기 카심 씨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당연하지. 그러면 나한테…….”
카심이 차마 말을 못 하고 주먹을 쥐어 보여 줬다. 무언의 협박이었다. 가벼운 농담에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그때 신자 한 명이 찾아와 귓속말을 하자 나흐얀이 양해를 구했다.
“까디께서 부르신다고 하니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일 때문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 다녀와.”
인사를 하고 나가는 나흐얀이나 남아 있는 카심이나 표정이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느낌에 진혁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