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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57화 (57/307)

57화. 아버지의 고민

“안녕하세요.”

김지민이었다.

“지민 씨가 요즘 대리점 개설 때문에 고생이 많아서 고기 좀 먹이려고 같이 왔어. 괜찮지?”

“저야 오히려 고맙죠. 그렇지 않아도 그 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잘 오셨어요.”

“걱정했는데 반겨 주셔서 감사해요.”

김지민은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고양이 눈이 인상적이었는데, 눈웃음까지 치니 가슴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정소연에 대한 생각은 저 멀리 달아났다.

얼른 시선을 피했다.

얼마 후 세 사람은 인근의 삼겹살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지철이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김지민이 고기를 구웠다.

“다 익었어요. 소고기를 드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이게 정말 먹고 싶었거든요.”

진혁이 얼른 고기를 한 움큼 집어 쌈과 함께 입에 쑤셔 넣었다. 맛이 예술이었다.

김지민이 순식간에 비워지는 불판에 새로 고기를 올렸다.

익은 고기를 모두 배로 보내고 진혁이 김지민에게 물었다.

“총판하고 대리점 모집은 잘되고 있습니까?”

“대도시는 신청이 많은데 지방은 아무래도 저조해요. 이제 막 한 제품 히트 친 것이라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것 같아요.”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는 말이 있지만, 때론 과감할 필요도 있는데.”

“그러게 말이다. 그것 때문에 지민 씨가 설득하느라 애를 먹고 있어.”

“그냥 두세요. 이번 겨울이 지나면 자신들이 주저한 걸 땅을 치며 후회할 겁니다. 내버려둬요.”

“하하하하하. 하여튼 말 하나는 시원시원하게 해.”

“저도 막힌 가슴이 확 뚫리는 기분이에요. 제 술 한잔 받으세요.”

술잔을 받으며 다시 물었다.

“강원도 쪽 총판은 어떻습니까?”

“영서 쪽은 원주에 사업하시는 분이 신청했는데, 영동은 아무래도 시장이 작아서 그런지 신청하신 분이 없어요.”

“그럼 거긴 제가 하겠습니다.”

“사장님이요?”

지민이 놀라 자신을 쳐다보자 한지철이 입을 열었다.

“우리야 네가 한다면 좋지만, 조건이 좀 까다로워.”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보증금이 5억이야. 하지만 그보다 총판이 물류 창고 기능까지 갖춰야 해. 창고만 해도 최소 2,000평의 땅에 1,000평 이상은 지어야 하고. 강원도 땅값이 아무리 싸다고 해도 다 갖추려면 20억은 넘을 거야. 일정 기간의 운영비까지 감안하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선배는 아직도 스페이스 워커의 성공을 의심하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우리 같은 서민들한테는 큰돈이라 그렇지.”

“지를 때는 질러야 한다니까요. 어찌어찌하면 그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혁의 능력이라면 당장이라도 내놓을 수 있지만 그걸 그대로 밝힐 수는 없었다.

돈이 많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자랑할 일도 아니었다.

돈이란 것은 요물 같아서 사람을 망가트리기도 하고 사람 간에 벽을 만들기도 했다.

굳이 밝혀서 좋을 게 없었다.

한지철의 표정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이집트의 사업이 잘된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그런데 돈만 준비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본인이 직접 운영해야 한다는 조건이야. 정리하고 넘어올 게 아니면 어려워.”

“그건 걱정 마십시오. 마침 적당한 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마지막으로 면접에서 통과를 해야 해. 본부장님이 직접 대화를 나눠 보고 사업 의지를 확인하시겠단다.”

“면접은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면접은 당연히 해야 합니다. 애써 만든 제품을 돈 많은 졸부에게 넘겨 망가지게 할 수는 없죠. 본부장이란 양반, 들을수록 괜찮은 것 같네요.”

“그렇지 않아도 본부장님이 너 들어오면 식사 자리를 마련하라고 하시더라. 시간 좀 내라.”

“에이. 전 싫은데요. 선배가 적당히 핑계대고 넘기세요.”

진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한지철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마음이 통하고 편해서 괜찮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은 이미 태후를 떠난 사람이었다. 굳이 만나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한지철의 입장은 달랐다.

어떻든 상사가 부탁한 일이었다.

“왜 안 보려는 건데?”

“높은 사람이랑 밥 먹으면 체할 것 같아서요. 이렇게 마음이 맞는 우리끼리 보면 좋잖아요. 안 그래요, 지민 씨?”

“전 좋아요. 하지만 팀장님은 입장이 다르시잖아요.”

“그런가?”

“넌 어떻게 된 게 지민이보다 직장 생활을 더 모르냐? 하긴 그러니까 여기저기 치받다가 나가서 사업하고 있지. 날 봐서 밥 한번 먹어 줘, 인마.”

“알았어요. 대신 그냥 차 한잔 마시는 것으로 해 줘요. 어색한 사람이랑 밥 먹는 거 엄청 곤욕인 거 아시죠?”

“알았어. 차로 하자.”

그제야 한지철의 얼굴이 겨우 펴졌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진혁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희준이 이 자식은 왜 안 온대요?”

“회의가 있어서 좀 늦는다고 하더니 길어지나 보다.”

“이거, 이거, 나 없다고 바로 뒷말을 하시네들.”

넉살을 떨면서 오희준이 다가왔다.

“너도 양반되기는 틀렸다.”

“양반이나마나 지금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었습니다. 먼저 고기부터.”

자리에 앉으려던 희준이 말을 멈췄다.

그제야 김지민을 본 것이다.

“혹시…… 형수님?”

한지철이 인상을 썼다.

“그럼…… 제수씨?”

이번에는 진혁이 눈알을 부라렸다.

“물산에서는 여직원 성희롱하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교육도 안 시키나 봐요, 오희준 대리님.”

“이런, 가족이 아니라 동료셨군요. 제가 사과의 술 한잔 따르겠습니다.”

“처음이니까 봐줄게요. 팀장님이랑 같이 근무하는 김지민입니다. 두 분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김지민이 가볍게 넘겨주자 분위기가 다시 좋아졌다.

그때 진혁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뗐다.

“대신 저도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뭔데?”

“다른 기업의 재고품도 좀 소개시켜 주세요.”

“그 정도로 장사가 잘돼?”

“원하는 상인들이 계속 늘고 있어요. 태후 것은 이미 다 소진해서 없다고 하고요.”

가리 사장뿐만 아니라 새로 오픈한 모하메드 상회의 재고품 가게도 옷이 날개 달린 듯이 팔려 나갔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인근 가게의 상인들이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재고품은 수량이 한정되어 있어 원하는 물량을 맞출 수 없었다.

“노준복 과장님에게 말씀드렸더니, 다른 기업들은 영업부에서 관리한다며 선배에게 부탁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긴 한데…….”

한지철이 말끝을 흐렸다.

당연히 도와줘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맡고 있는 업무가 만만치 않아 선뜻 돕겠다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알고 진혁이 먼저 말했다.

“꼭 선배가 움직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여기 놀고 있는 놈 있지 않습니까.”

진혁의 시선이 막 삼겹살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으려는 희준에게 향했다.

갑자기 시선들이 자신에게 향하자 희준이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왜, 왜?”

“네가 맡으라고.”

“뭘?”

“이 자식은 정신줄을 놓고 사나……?”

진혁이 그간의 대화 내용을 간추려서 들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선배님이 너한테 실적 쌓게 해 주신단다.”

“고맙습니다, 선배!”

“인사는 진혁이에게 해야지.”

희준도 천생 상사원이었다. 실적이란 말에 당장 표정이 환해졌다.

예전에는 그룹 내 거래라 희준에게 돌아갈 몫이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항상 친구라고 말만 했는데 도와주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었다.

그때 한지철이 물어왔다.

“너, 김선혁 상무님이 영전한 것 모르지?”

“전무님이 되신 겁니까?”

“전무로 승진된 것은 물론 미래전략본부장이 되셔서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 무역까지 총괄하고 계셔.”

한지철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김선혁과 면담이 끝나고 얼마 후, 정진호는 미래전략본부를 신설하고 김선혁을 전무로 승진시켜 본부장에 앉힌 뒤 무역 업무를 총괄하게 했다.

당연히 축하할 일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가 찜찜했다.

“그럼 기존 그룹 기획실 업무와 겹치는 건 아닌가요?”

“거긴 정부 시책에 따라 해외 자원 개발 업무에 집중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런지 기획실장도 거의 해외에 나가 있어. 얼굴 보기도 힘들어.”

“그거 쉬운 일이 아닌데요.”

“알아서 하셨겠지. 아무튼 회장님이 큰 결심을 하셨다고 하더라. 자식을 내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한지철의 말에 진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든 정에 끌리지 않고 김선혁을 택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자신이 태후물산의 일에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웃고 떠드는 사이 벌써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김지민이 일어나자 진혁도 따라 일어났다.

“야, 우린 더 해야지?”

“오늘은 봐주라. 집에 일이 있어.”

“씨, 얼마 만에 만나는 건데.”

“당분간은 한국에 있을 거야. 그러니 나중에 마시자. 선배님, 저 먼저 들어갈게요.”

“그래. 오늘만 날은 아니지. 대신 나랑 한 약속 있지 마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간 잡히면 연락 주십시오.”

택시 정류장으로 가서 김지민을 먼저 보내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마침 오늘은 아버지가 일찍 귀가해 계셨다.

“일을 좀 처리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남자가 일하다 보면 늦을 수도 있지.”

“밥은 먹었니?”

“아직요.”

“그럼 씻고 있어. 금방 차릴게.”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머니도 같이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기에 자리를 피하려는 것을 막았다. 아버지도 짐작은 하시는지 말리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아버지 생각은 들었습니다.”

“젊어서는 내 입신을 위해, 그리고 나중에는 너를 키운다는 핑계로 할아버지를 동생에게 맡기고 모른 체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도리를 해야겠다.”

“당연히 하셔야지요. 하지만 가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건 걱정 마라. 이미 배도 알아봤다. 동생도 있고 친구들이 있으니 내 한 몸 간수할 자신은 있다.”

“저도 아버지가 잘하실 것이라 믿어요. 하지만 할아버지 마음은요?”

“……!”

“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서울 생활 다 때려치우고 어머니도 두고 혼자 와서 뱃사람을 하겠다면 좋아하실까요?”

진혁은 안다.

아버지의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다. 유일하게 약한 부분이 할아버지에 대한 마음이었다.

예상대로 아버지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더 서울 생활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상황이다. 나 살자고 또 네 또래 젊은이를 길거리로 내몰 수는 없다. 할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사정을 들으시면 이해하실 거다. 그러니 걱정 말아라.”

“아버지께 회사를 그대로 다니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직원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회사는 더 이상 다니실 필요 없어요. 내일 당장 사표 쓰고 나오세요.”

“진혁아!”

자신의 뜻과 다른 말에 어머니가 소리쳤지만 진혁은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의 계획에는 동조할 수 없어요.”

“이놈이…….”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싶듯이, 저도 아버지가 어머니와 헤어져 혼자서 배 타고 나가 고생하시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할아버지가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진혁은 태후패션이 새롭게 선보인 스페이스 워커의 성공에 대해 들려줬다.

“나도 뉴스에서 봤다. 좀 비싸긴 해도 이쁘긴 하더라. 학생 애들도 많이 입고 다니고.”

“앞으로는 더 입고 다닐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 지역 총판하고 대리점을 모집한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영동 지역 총판을 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영동 지역 총판을……?”

“마침 그 일을 맡고 계신 분이 희준이 학교 선배님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제게 기회를 주신답니다. 이건 무조건 성공하는 사업이에요. 그리고 지금까지 해 오셨던 관리 업무와도 연관이 되니 아버지에게 딱 맞는 일입니다.”

약간은 부풀린 홍보에 서명수가 흥미를 보였다.

대기업이 직접 관리하는 브랜드의 총판이라면 망할 일은 없었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만…….”

하지만 또 다른 걱정거리 때문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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