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신경전
“그거 돈이 많이 든다던데…….”
“일반적으로는 그렇지요. 하지만 말씀드린 대로 희준이 선배가 책임자라, 아버지가 하시게 되면 조건을 대폭 낮춰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건 제가 그간 모은 게 있으니 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진혁이 아버지, 진혁이 말대로 해요. 우리한테만 특별히 싼 가격에 해 준다잖아요.”
어머니는 특별 대우를 해 준다는 말에 안달이 났다.
서명수의 마음이 더 흔들렸다.
그 역시 뱃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지 않았다. 동생도 극구 말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집을 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회사 사정과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혁의 말대로만 된다면 자신의 경험을 살릴 수도 있고 아버지에게 죄송스러울 일도 없으니 금상첨화였다.
“알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마.”
“시간이 없습니다. 내일 당장 결정을 알려 줘야 합니다.”
“그렇게나 빨리?”
“방금 어머니 말씀 들으셨잖아요. 지역 유지들이 돈 보따리 싸들고 찾아오고 있어요. 선배가 내 말 듣고 영동은 어렵게 빼 놓은 거라니까요.”
“아이고, 진혁이 아버지, 그냥 합시다. 진혁이가 어디 우리한테 해를 끼칠 자식이오? 제가 다니던 회사인데 얼마나 꼼꼼히 알아봤겠어요. 예?”
어머니가 애간장이 탔다.
“끙……. 알았다. 하기로 하고, 돈은 퇴직금이 나오면 넣는 것으로 해라.”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뭔데?”
“총판 위치를 강릉으로 해야 합니다.”
“뭐?”
아버지의 눈꼬리가 당장 올라갔다.
그럼 할아버지를 모시는 것에 문제가 생긴다.
진혁이 얼른 진화에 나섰다.
“강릉에서 속초까지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아요. 금방이라니까요. 아버지 지금 출근하시는 데도 그보다 더 걸리잖아요?”
“그건 그렇다만은…….”
“진혁이 말이 맞아요. 서울보다는 훨씬 가깝잖아요. 아버님도 당신이 자신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는 걸 아시면 더 안 좋아하실 거예요. 당신 일하시는 동안 내가 더 잘할게요.”
“당신이 모신다면…….”
서명수가 허락하려는 순간, 진혁이 얼른 끼어들었다.
이렇게 되면 어머니는 자신을 희생해야만 했다. 그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당장 모시는 건 힘들 것 같아요.”
“……?”
“총판의 조건 중에 1호 대리점은 직접 운영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어요. 강릉 시내 중심가에 매장을 오픈하는데 처음부터 남에게 맡길 수는 없잖아요. 안정될 때까지는 어머니가 봐주셔야지요.”
어머니의 얼굴이 활짝 폈지만 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내색을 하지 못했다.
서명수가 결정을 못 하고 미적거리자, 진혁이 마지막 대안을 내놓았다.
“숙모께는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부탁드려야지요. 대신 사촌 여동생을 대리점에서 일하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연희를?”
“지난번에 갔을 때 숙모님께서 걱정이 많으시더라고요. 여상에 다니는데 내년에 졸업이잖아요. 요즘 고졸로 어디 취직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요.”
어머니가 얼른 거들었다.
“연희가 공부는 못하지만 사교성도 좋고 적극적이라 매장에는 딱 맞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당신이 제수씨한테만 맡겨 놓고 소홀하면 안 돼.”
“그건 걱정 마세요. 가게를 아침부터 열 건 아니니까 제가 아침은 꼭 챙겨 드릴게요.”
“말로는 누가 못 해. 밥이나 내와.”
“알았어요. 금방 내올게요.”
어머니가 언제 싸웠냐는 듯이 바로 답하고 냉큼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에 서명수가 혀를 찼다.
“쯧쯧. 시아버지 안 모셔도 된다니 좋아 가지고는.”
“어머니 생각도 해 줘야지요. 아무도 아는 분이 없는 곳에 아버지 믿고 따라가시는 거잖아요.”
“여필종부인데 당연히 따라와야지.”
말씀은 그렇게 했지만 더 이상 반대하지 않으시는 게, 아버지도 마음속으로는 어머니를 데려가는 게 미안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내내 집안을 누르고 있던 고민이 해결되자 술자리가 즐거웠다. 어머니도 오늘은 아버지를 말리지 않고 오히려 거들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모습에 진혁의 마음도 푸근했다.
* * *
다음 날, 늦게 일어난 진혁은 물을 마시려고 주방으로 갔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식탁에 음식이 가득한데도 어머니가 부침개를 부치고 있었다.
“오늘 집에서 모임 하세요?”
“모임은? 너 먹으라고 만든 거지.”
“이걸 다요?”
“간만에 왔잖니. 얼른 씻고 와.”
진혁은 어이가 없었지만 마음은 뿌듯했다. 어머니가 왜 이러시는지 충분히 짐작이 됐다.
그날 식사를 하고 집에서 나온 진혁은 얼른 상가의 약국으로 가서 소화제를 사 먹었다.
접시가 비는 족족 어머니가 새 음식을 계속 올려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과식해 버렸다.
* * *
진혁이 태후물산으로 가 김선혁 전무에게 면담을 요청했더니 바로 허락이 떨어졌다.
아침에 전화가 와서 한번 들르라고 했었는데 데스크에 미리 언질을 준 모양이었다.
미래전략사업본부는 37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손민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사장님.”
“이 사람이, 언제 적 이야기인데 아직도 지사장이라고 불러?”
“그래도 제게는 영원히 지사장님이십니다.”
“호칭이야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웃으며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가자, 전무님이 기다리신다.”
본부장실로 들어가자 김선혁이 바로 일어나 다가왔다.
“오랜만이구나.”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다 네 덕분이다.”
자리에 앉자 비서가 차를 내왔다.
“카이로의 사업은 어떠냐?”
“겨우 먹고살 만합니다.”
“요즘은 겨우 먹고살 만하면 사무실을 확장하고 직원을 충원하나 보지?”
진혁의 눈이 날카로워지는 모습에 김선혁이 얼른 변명했다.
미리 밝히지 말라는 정인영의 부탁이 떠올랐다.
“오해는 하지 마라. 다른 폐쇄된 지사와 달리 기존 바이어의 이탈도 없고, 오히려 신규 바이어까지 발굴되고 있어 조금 알아본 거야.”
“직원들이 열심히 해 준 덕분입니다.”
“물론 그렇겠지만 그들을 이끌어 준 사람이 너라는 것이 중요하지. 역시 카이로 지사는 폐쇄하는 게 아니었어. 거기가 빠지니 아프리카 대륙으로 가는 연결 고리가 끊겨.”
“그건 이미 충분히 건의를 한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도 폐쇄 결정이 내려진 겁니다.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고요.”
진혁은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김선혁도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되돌릴 수는 없지. 하지만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두는 것도 옳은 방법은 아니지 않나?”
“제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는 겁니까?”
“카이로 지사를 다시 개설할 생각이다. 네가 그걸 맡아 줬으면 좋겠다.”
진혁이 허리를 펴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정은 정이고 사업은 사업이다.
과거의 태후물산 직원이 아닌 알라딘 컴퍼니 사장으로 말해야 할 상황이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 태후물산 직원으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지사를 재개설하는 문제는 전략적 파트너 계약을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계약서 관련해서는 법무팀에 자문을 구했더니 문제가 없다고 했다. 파트너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한 것이지, 우리가 직접 나서는 것은 별개라고 하더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사 폐쇄에 따른 많은 문제를 떠넘겨 놓고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됩니다.”
“물론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사업에서는 그게 큰 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도 잘 알 것이다. 이 일을 가장 원활하게 푸는 방법은 네가 거길 다시 맡는 거다.”
진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김선혁이 이런 식으로 나올지는 몰랐다.
그는 이미 법무팀의 자문까지 구할 정도로 준비를 철저히 하고 내놓은 의견이었다.
진혁은 계약서를 쓸 때 좀 더 철저히 했어야 한다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몇 년 후라면 모르지만 지금 당장 태후와 맞서 싸워서는 득보다 실이 컸다. 그렇다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진혁의 침묵이 길어지자 손민한이 거들고 나섰다.
“사업이 잘된다고 해도 결국 구멍가게야. 하지만 태후 지사는 달라. 모든 제품을 무한정 공급받을 수 있잖아. 너한테 득이 됐으면 됐지 손해는 없어.”
“…….”
“전무님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집트 사업을 지킨 네 공을 생각해서 결단을 내리신 거야. 대리가 부장급 지사장으로 가는 인사는 전례도 없어. 이건 대단한 특혜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직장인으로 있을 때 의미가 있었다.
겨우 지사장 자리 받자고 자신의 목에 다시 올가미를 쓸 수는 없었다.
진혁이 눈빛을 굳히고 말했다.
“태후가 태후 식으로 문제를 풀겠다면 제가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저대로 해결책을 찾겠습니다.”
“서로 갈라서서 싸우자는 말이냐?”
“싸움은 태후에서 먼저 걸어온 겁니다. 전 그 싸움을 피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리는 거고요.”
진혁의 눈빛을 받은 김선혁은 속으로 당황했다.
설마 그가 이렇게 강하게 반발할 줄은 몰랐다.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들어온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한 가지는 재고품 구매 건 때문입니다. 태후 패션의 재고품이 다 소진되어 다른 기업 제품을 가져가야 할 상황입니다.”
“……!”
“알라딘 컴퍼니가 거래하는 품목 중에 태후만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제품이 있습니까? 지금 실적을 가지고 다른 대기업을 찾아가면 그들이 어떤 대우를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서 대리!”
“저를 아직도 태후물산의 직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두 분이 지시하면 따라야 하는 서진혁이 아니란 말입니다.”
손민한이 나섰다가 진혁의 싸늘한 호통에 급히 입을 닫는 모습에 김선혁은 눈을 감았다.
웅덩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올챙이가 아니었다. 그사이 다리가 나와 바깥세상을 본 개구리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더 크면 더 이상 품에 가둘 수 없었다.
그런데 그를 설득시킬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자신이 세운 구상을 위해서는 카이로 지사 재개설은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힘으로 누르면 누를수록 튕기는 놈이었다. 싸우면 모두가 피투성이로 엉망진창이 될 게 불을 보는 뻔했다.
고민하는 김선혁에게 진혁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카이로 지사를 현지 법인화해서 독립시켜 주십시오.”
“합작하자는 말이냐?”
“아닙니다. 알라딘 컴퍼니는 그대로 존속시킬 겁니다. 새로 생기는 법인은 제가 별도로 투자하는 형태가 되겠지요. 지분은 반반씩하고 경영은 제가 한다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야, 아니, 서 사장. 아무리 우리가 다급하다고 해도 태후는 대기업이야. 그런데 지분도 똑같이 내면서 경영권까지 넘기라는 것은 말이 안 되지.”
“그럼 안 하시면 됩니다. 제가 내놓을 수 있는 최종안입니다.”
진혁은 최대한 버텼다.
자신도 태후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들 거라고 생각해 책임 회피용으로 내놓은 제안이었다.
최악의 경우 태후가 지사를 재개설해도 바이어를 설득할 구실은 됐다.
잠시 생각하던 김선혁이 물었다.
“꼭 그 방법밖에 없겠냐?”
“그 방법도 전무님과의 인연 때문에 양보해 내놓는 겁니다.”
“알겠다. 나중에 전화하마.”
진혁은 고개를 숙이고 나왔다.
편하게 축하 인사 하러 왔다가 고민을 떠안은 꼴이라 발걸음이 당연히 무거웠다.
하지만 아래층의 패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물산에서의 일은 잊었다.
여기서는 여기서 할 일이 또 있었다.
한지철의 자리는 비어 있었는데 다행히 김지민은 있었다.
“팀장님은 본부장님께 보고하러 가셨어요. 조금 기다리시면 오실 거예요.”
“오늘은 지민 씨를 뵈러 왔습니다.”
“저를요?”
“어제 이야기한 총판 건 때문이에요.”
“아, 총판.”
반짝였던 김지민의 눈이 일순간 빛을 잃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니에요. 먼저 회의실에 들어가 계시면 제가 자료를 챙겨서 갈게요.”
진혁이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자, 얼마 후 김지민이 두꺼운 서류철 위에 커피를 올려서 들어왔다.
“결정은 하셨어요?”
“네. 하시기로 했습니다.”
“잘됐네요. 이게 모집 요강이에요.”
지민이 내민 서류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어제 들은 이야기와 큰 차이가 없었다.
“보증금 5억, 물류 창고 부지 2,000평에 1,000평 규모의 창고를 갖추면 되는 거네요.”
“맞아요. 일단 자격 조건은 그래요. 하지만 본부장님 면접이 제일 중요해요. 어느 분이 하실 건데요?”
무심코 물었던 김지민은 진혁의 답변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정말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