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정인영
진혁이 답을 하려는 순간 문이 열리며 한지철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데 지민 씨 표정이 저래?”
“총판을 제 아버님이 하실 거라니까 그러네요.”
“뭐? 아버지?”
이번에는 한지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그건 아닌데. 네 아버님이 하신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동안 네가 도와준 게 얼마인데.”
“특별 대접은 사양합니다. 그냥 원칙대로 해 주십시오.”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아니요. 그게 맞습니다. 원칙을 지키는 게 스페이스 워커가 장수하는 길입니다. 그게 제 아버지를 돕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 주세요.”
“끙. 일단 알았다.”
틀린 말이 아니기에 한지철이 수긍하고 앉았다.
“아버님이 뭐 하시는 분인데?”
“중소기업 관리부장으로 근무하고 계신데 곧 사표를 제출하실 겁니다.”
“그런 이력이라면 이 일에 맞는 분이시긴 한데, 문제는 돈이지.”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야기해 봐. 내 선에서 도울 수 있으면 도와드려야지.”
서민에게 20억은 준비하기도 버거운 큰 금액이었다.
전 재산으로도 부족해 은행 대출까지 받아 만들 수 있다면 그래도 능력이 있을 정도였다.
진혁이 당연히 보증이나 은행 대출로 부담을 줄이는 방법을 부탁할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진혁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벙찐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보증금은 원래 10억이었는데 5억으로 줄여 준 거고, 땅만 준비하면 건물은 우리가 무상으로 지어 준다고 말씀드리라는 말이냐?”
“평생 18평짜리 주공 아파트에서 검소하게 사신 분입니다. 20억이 들어간다면 당장 관두라고 하시고 배를 타실 분이에요. 그러니 선배가 적당히 자료 하나 만들어서 슬쩍 보여 주고 특별 대우하는 것으로 해 주세요.”
“허어. 효자네, 효자야.”
한지철의 말에 김지민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효자는요. 맨날 속만 썩인 자식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좀 편하게 사시게 해 드리려고요. 도와주실 거죠?”
“당연히 도와줘야지. 좋은 일이고, 조건을 건드리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 지민 씨?”
“맞아요. 아무 문제 없어요. 제가 안 들키게 잘 준비할게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부탁할 게 있어요. 총판이 무조건 1호 대리점을 열어야 한다는 점도 조건에 넣어주세요.”
“대리점까지 하려고?”
“어머니 때문에요.”
진혁이 어쩔 수 없이 가정사까지 밝혀야 했다.
“평생 살림하느라 자신의 생활을 포기하신 분이거든요. 이번 기회에 본인의 인생을 찾아 드리고 싶어서요. 착한 분이시지만 아무도 없는 데서 하루 종일 시아버지까지 모셔야 한다면 너무 힘드실 것 같아서요.”
“허, 참. 내가 할 말이 없다.”
진혁이의 마음 씀씀이에 감탄하는 한지철과 달리 김지민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신청서와 준비할 서류들에 대해 안내를 받고 총판 건에 대한 이야기는 마무리를 지었다.
김지민이 나가자 한지철이 메모지를 꺼내 줬다.
“국내 메이저 의류업체 재고 담당자 연락처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당연히 갚아야지, 본부장님과의 약속. 아, 잠깐 기다려.”
갑자기 말을 끊은 한지철이 회의실을 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들어왔다.
“본부장님과 통화했는데 마침 시간이 되신다고 지금 보자고 하신다.”
“그거 잘됐네요. 가시죠.”
“아니, 너만 올려 보내라고 하시는데?”
“급히 처리하실 일 있어요?”
“그건 아닌데, 아무튼 너만 오래. 사무실은 바로 위층이니 찾기 쉬울 거야.”
“알았어요. 다녀올게요.”
진혁은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신사업본부장실이란 푯말을 보고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여자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 소연 씨가 여기에 왜?”
“오랜만에 뵈어요. 소연은 제 태명이고, 주민 등록에는 인영으로 올라가 있어요.”
“이건 대체…….”
진혁의 눈에 책상 위의 명패가 들어왔다.
신사업본부장 정인영.
그 순간 진혁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놀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반응이 격할 줄은 몰랐어요.”
“지금 이게 놀란 모습으로 보입니까?”
“아닌가요?”
“화가 난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습니까?”
“전 속인 것 없어요. 이름에 대해서는 방금 이야기했고. 한 팀장님이랑 같이 근무한다고 했더니 부하 직원이라고 짐작한 것은 진혁 씨였어요.”
“그건 그렇지만…….”
“오랜만에 봤는데, 앉아서 이야기해요.”
정인영이 먼저 소파에 앉자 진혁도 따라 앉았다.
“제가 정소연이 아니라 불편하세요?”
“편하진 않네요.”
“이럴 것 같아서 오해하는 줄 알면서도 이야기 안 했던 거예요. 제가 처음부터 정인영이라고 밝혔으면 그때 그렇게 편하게 이야기하실 수 있었을 것 같아요?”
“…….”
“난 그때 휴가 중이었어요. 외국에 나가 쉬는데도 오너 일가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이는 게 싫었어요.”
“끙.”
결국 진혁은 다시 침묵했다.
그녀의 말은 틀린 게 없었고, 신분이 어떻든 자신이 상관할 일도 아니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의도했든 안 했든 속인 것은 속인 겁니다.”
“그 점은 사과할게요.”
깔끔한 성격은 여전했다.
오해가 풀리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한 팀장님에게 총판 신청을 할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오는 길입니다. 제 아버지가 하실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진혁 씨가 아버님께 권할 정도라면 이건 무조건 성공하는 사업인 거네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사업이란 게 100%로 확신을 할 수는 없죠. 그래도 후회는 없을 겁니다. 가족이 행복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 있는 일이거든요.”
“사업은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닌가요?”
“돈 벌려고 하는 건 맞지만, 돈도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 버는 거잖아요. 돈은 수단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인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논쟁을 벌이고 싶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왔는데 스페이스 워커 겨울 상품에 대해 좋은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준비를 잘하고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피……. 그러지 마시고요. 아버지까지 하시는 일인데 좀 더 관심을 가져 주세요.”
인영이 거듭 말하자, 진혁은 더 이상 거부하지 못했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초심을 잃지 않는 겁니다. 학생, 고퀄리티, 고가. 이 세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잊지 않고 있어요. 이번 겨울에도 욕을 엄청 듣겠네요.”
“욕 한 번 들을 때마다 100벌씩 팔린다면 감사히 들으셔야죠.”
“그건 그래요.”
서로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둘 다 사업가였다.
그렇지 않아도 빼어난 미모인데 인영이 활짝 웃으니 사무실이 당장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진혁은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 같아 얼른 말을 꺼냈다.
“생산은 어디서 합니까?”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전량 생산하기로 했어요.”
“음.”
진혁이 고심하는 모습에 인영은 불안한 얼굴이 됐다.
“문제가 있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지만 전량을 한곳에서 생산한다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바람막이 때 있었던 일은 잊으신 겁니까?”
“아!”
인영이 바로 알아차렸다.
예상치를 훌쩍 넘는 판매에 물량을 제때 맞추지 못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분산해야 할까요?”
“이미 늦은 것 아닙니까?”
“그렇기는 해요. 원부자재도 그렇고 공장 스케줄도 이미 확정이 돼서.”
진혁은 고심에 고심을 했다.
원래는 이 정도에서 끊는 게 맞았다.
품절도 판매 전략 중에 하나였다. 희소성을 부여해 제품의 가치를 높이고 향후 구매 대기자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부모님에게는 새로운 인생의 첫 번째 시즌이었다. 기쁨을 안겨 드리고 싶었다.
“겨울 시즌의 주력은 패딩입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고 준비를 많이 하고 있어요.”
“패딩만이라도 국내에서 병행 생산하면 좋겠습니다. 단가는 올라가겠지만 기간이 단축되니 비상시에는 쓸모가 있을 겁니다.”
“좋은 생각이네요. 역시 진혁 씨를 만나니 좋은 생각이 마구마구 쏟아지는 것 같아요.”
“그건 좀 과한 칭찬 같습니다.”
“아니요. 전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부족하죠.”
“그런 이야기 계속하면 그만 일어날 겁니다.”
“알았어요.”
인영이 웃으며 입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저랑 식사하는 게 싫어서 차를 마시자고 하셨다면서요?”
“선배도 참. 그것까지 이야기하면 어쩌라고…….”
“계속 추궁해서 겨우 알아낸 거니 모른 척해 주세요. 이제 저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때 얻어먹은 것 보답하게 해 주세요. 퇴근 시간이 다 됐는데.”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며칠 미룬 것이라 도저히 안 됩니다. 내일 합시다.”
“알았어요. 속인 제가 잘못이니 오늘은 양보할게요. 대신 내일은 꼭 약속 지키셔야 해요.”
“전화 주십시오.”
내일 보기로 하고 정인영과 헤어져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얼굴을 보자마자 당장 한지철이 회의실로 끌고 들어갔다. 직속 상사에 관련된 일이니 궁금한 게 당연했다.
진혁이 입을 열려고 할 때 김지민이 다시 차를 가지고 들어와 앉았다.
그녀 역시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왜? 이야기가 안 좋게 끝났어? 그럴 리가 없는데.”
“그게 아니라 감쪽같이 속았어요.”
진혁은 정인영이 카이로에 찾아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헉, 본부장님이 너 만나러 카이로로 가셨다고?”
“절 만나러 온 것이 아니고, 휴가를 즐기러 왔다가 만난 거죠.”
“우리한테는 유럽으로 가신다고 했어요.”
“맞아. 그리고 사무실까지 찾아왔다며. 그런데 전혀 몰랐어?”
“그렇다니까요. 선배랑 같이 근무한다고 해서 당연히 전 부하 직원인 줄 알았지요. 본인도 아무 말 안 하고. 암튼 얼마나 놀랐는지, 식겁했습니다.”
진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서 이야기는 잘됐어?”
“잘되고 말 게 뭐 있어요. 그냥 차 마시며 오해를 푼 거죠.”
“식사는?”
“오늘은 희준이 만나야 해서 안 된다고 했어요.”
“이 자식이 미쳤나? 그분이 어떤 분인 줄 알고도 겨우 그딴 것 때문에 거절해?”
“그딴 건 아니죠. 어제도 집에 일이 있어 그냥 갔는데, 오늘까지 빵구 내면 맞아 죽어요. 희준이 그 자식 보기보다 뒤끝 있거든요.”
어이없어하는 한지철과는 달리 김지민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래도 선배 얼굴 봐서 내일 저녁 먹기로 했어요.”
“잘했다, 잘했어.”
이번에는 한지철의 얼굴이 활짝 펴진 대신 김지민의 인상이 구겨졌다.
한지철과 헤어진 후 회사 앞 커피숍에서 기다리자 희준이 퇴근하고 바로 달려왔다.
두 사람은 바로 홍대로 직행해 젊음을 불살랐고, 결국 그날은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텔에서 잤다.
* * *
출근하는 희준과 같이 나와 애오개역에서 내려서 서울서부지방법원으로 갔다.
이태원 빌라의 경매가 열리는 날이었다.
박이동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지금이라도 말려야 한다는 생각임이 분명했다.
“그 입 열지 마세요.”
“합.”
“그냥 지켜보세요.”
진혁이 경고하고 얼마 후 경매가 개시되었는데 입찰자는 한 명뿐이었다.
당연히 진혁이 최저 가격에 낙찰자로 선정됐다.
진혁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잔금을 입금시켰다. 이제 명의 변경만 하면 된다.
“아침 드셨어요?”
“제가 아침은 원래 안 먹습니다.”
아침을 안 먹는 사람은 없다. 출근하기 바빠 못 먹은 게 습관이 됐을 뿐이다.
직장인의 비애였다.
“같이 가서 해장국이나 먹읍시다.”
어제 희준이랑 먹은 술이 아직도 깨지 않았다.
인근의 뼈다귀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자 속이 좀 가라앉았다.
“경매 컨설팅을 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3개월째 되어 갑니다만,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물건을 분석하시는 것에 비해 사람 속이는 일은 어설퍼 보여서요.”
박이동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모습에 진혁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은 말을 했나 봅니다.”
“아닙니다. 은행에서 기업 대출 업무를 봤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유 부동산에 대한 분석도 하게 되어 여기까지 온 겁니다. 명퇴 전에 공인중개사하고 경매 상담사 자격증을 따서 걱정을 안 했는데, 막상 나와 보니 쉽지만은 않네요.”
“이론하고 현장은 다르지요. 아, 맞다!”
말을 하던 진혁이 갑자기 소리치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