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60화 (60/307)

60화. 좋은 일 하기

“제가 강릉에 땅을 장만해야 하는데 알아봐 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용도로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물류 창고를 지을 겁니다. 2,000평 이상은 돼야 하고요.”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제가 좀 급합니다.”

“이번 일로 어떤 성격이신지 충분히 느끼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최대한 빨리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큰 짐을 덜어 놓고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나려던 진혁이 박이동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이후에 다른 약속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사무실로 들어가 봐야지요.”

“그럼 저랑 잠깐 같이 가시지요.”

진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박이동을 데리고 이태원으로 갔다.

카페에서 기다리자 카심과 나흐얀이 들어왔다.

“여기까지 왔으면 올라오지 왜 귀찮게 불러요?”

“제가 술이 덜 깨서 못 들어갑니다.”

“한국 사람들은 참 이상해. 무슨 술을 죽기 살기로 먹어.”

무슬림인 카심이 알딸딸한 그 기분을 이해하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다.

진혁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나흐얀을 바라봤다.

박이동이 있는 자리라 한국말을 사용했다. 나흐얀은 한국말이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듣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울라마께 더 이상 걱정 마시라고 전해 주십시오.”

“방법을 찾으셨습니까?”

“그 건물을 제가 방금 전 낙찰 받고 오는 길입니다.”

“헉! 미스터 서가 건물을 샀다고요?”

카심이 놀라 물었다.

“산 게 아니라 경매에 나온 걸 낙찰 받았다고요.”

“아무튼 미스터 서가 건물주가 됐다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제 그 건물은 제 소유입니다.”

“아싸!”

“인샬라.”

카심은 주먹을 불끈 쥐었고, 나흐얀은 습관적으로 신을 찾았다.

잠시 그 기분을 느끼게 한 다음 진혁이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옥탑은 불법 건축물이라 철거해야 합니다. 그러니 울라마께서는 비어 있는 방으로 옮기셨으면 합니다. 물론 보증금은 걱정 마시고요.”

“정말 고맙습니다.”

“나머지 세입자들은 법원에서 2,500만 원은 줄 겁니다. 차액 2,500만 원은 나가실 때 정산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보증금 떼일 걱정 마시고 편하게 계약 때까지 지내시라 하세요. 법적인 부분은 여기 박 선생님이 도와주실 겁니다.”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이야기를 들은 터라 박이동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나중에 다시 와서 찾아뵙고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남은 방 세 개의 세입자도 구해야 하니, 아시는 분이 있으면 소개도 부탁드립니다.”

“다들 고마워할 겁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울라마께 가서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 그분을 위해 한 일이 아닙니다.”

“……?”

“여기 카심 씨를 위해 한 일입니다. 그러니 울라마께 말씀드릴 분은 카심 씨가 맞습니다.”

“엥? 미스터 서, 그건 아니지요.”

카심이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진혁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제가 무슬림입니까? 아니면 울라마를 뵌 적이나 있습니까?”

“…….”

“카심 씨가 곤란한 것 같아 도운 겁니다. 이건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사실이니, 그 일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미스터 서야. 내가 이야기했잖아. 세상이 이런 젊은이가 어디 있어.”

카심이 칭찬까지 곁들이자 기분이 한층 고취되던 진혁은 나흐얀의 무심한 눈을 보고 가슴이 뜨끔했다.

세상을 관조하는 눈빛이 자신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결국 진혁이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험험……. 박 선생님이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을요?”

“이번 투자에 대한 성과 분석.”

“예? 정말로 여기서 말하라고요?”

“제발, 그냥 하라면 해 주세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박이동이 입을 열었다.

“이번 경매 물건의 시세는 25억 정도 됩니다. 경매 낙찰가는 제반 비용을 감안해도 10억 5천만 원입니다. 기존 세입자 일곱 분에게 돌려드려야 할 보증금이 1억 8천만 원입니다. 총 들어간 비용이 12억 3천만 원이니 당장 팔아도 두 배는 남는 투자를 하신 겁니다.”

“헐, 그러니까 지금 미스터 서가 이번 일로 떼돈을 벌었다는 겁니까?”

“건물이 위치한 경리단길은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지역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더 많은 수익을 얻으실 겁니다.”

카심의 째려보는 도끼눈에 진혁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번 돈으로 좋은 일 좀 해 보려고 했더니 알라께서 또 이렇게 더 채워 주네요.”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해요?”

“아무튼 제 사정이 이런데 어떻게 울라마의 존안을 뵙겠습니까. 그러니 카심이 대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아, 몰라요. 괜히 사기당한 기분이네.”

투덜거리는 카심을 무시하고 나흐얀에게 머리를 숙였다.

“만났을 때 바로 밝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미스터 서가 순수하게 돕고자 했던 마음을 압니다. 그 결과는 말씀대로 알라께서도 그 마음을 알고 해 주신 일입니다.”

“좋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그 마음 꼭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알라께서도 계속 함께하실 겁니다.”

나흐얀의 덕담에 진혁은 마음 한구석의 찜찜함을 털어냈다.

* * *

진혁이 청담동에 도착한 것은 저녁 7시였다.

바빌리안테이블은 정통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회원제로 운영하고 있었다.

입구에 이름을 말하니 2층으로 안내했다.

엔틱 가구와 영국에서 직수입한 소품으로 채워진 공간은 고풍스러웠다.

야경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정인영이 먼저와 앉아 있었다.

진한 자주색 원피스 차림이 주변의 분위기와 어울려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냈다.

“세프의 추천 요리로 결정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이 자리의 주인이 결정하신 것이니 맛이 있겠지요. 괜찮습니다.”

가볍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스프로 시작해서 가리비 샐러드와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맛보고 나니 메인 요리가 나왔다.

부드럽고 보송보송한 빵을 소스에 푹 찍어서 가리비 관자와 먹어 보니 별미였다. 스테이크도 안에 풍부한 육즙이 꽉 차 있었다. 중간 중간 먹은 와인의 맛도 훌륭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인영이 회사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회의 때 진혁 씨가 이야기한 대로 제품의 일부를 국내 생산으로 병행하자고 했더니 다들 좋아하더군요.”

“당연한 반응입니다. 실무자 입장에서 물건이 없어 손님을 돌려보내는 것만큼 맥 빠진 일도 없거든요.”

“진혁 씨를 만나면 항상 좋은 일이 있어요. 그래서 다음 상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진혁이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고 빤히 바라보는 모습에 인영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아닙니다. 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정소연인지 정인영인지 헷갈려서요.”

“둘 다 저잖아요?”

“아니죠. 정소연은 한지철 팀장님 팀원이고, 정인영은 태후패션 신사업본부장이잖아요. 자리가 다른데 역할이 같을 수는 없죠.”

정인영이 이마를 찌푸렸다.

뭔가 의미가 담긴 말이라는 느낌은 받았지만 정확히 그 실체가 와닿지 않았다.

진혁이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다.

“정인영은 태후패션 신사업본부장이잖아요. 스페이스 워커는 한지철 팀장이 맡고 있어요. 혹시 한 선배가 미덥지 못해요?”

“아니에요. 한 팀장님은 정말 잘해 주고 계세요.”

“그럼 믿고 맡기시고, 인영 씨는 지금부터 신사업본부장 자리에 맡는 일을 해야지요. 언제까지 스페이스 워커의 상품개발팀장처럼 행동하실 겁니까?”

“아!”

의문의 실체가 확실히 보였다.

자신이 처음으로 맡아 추진한 스페이스 워커가 성공한 분위기에 취해 본분을 잊고 있었다.

스페이스 워커는 태후 패션의 많은 브랜드 중 하나일 뿐이었다.

“스페이스 워커 같은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에 집중하라는 말씀이죠?”

인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하지만 진혁의 얼굴은 여전히 마땅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아이템(Item)의 사전적 의미는 항목, 품목입니다. 대신 필드(Field)는 부문, 영역을 의미하지요. 왜 스스로를 패션이란 틀 속에 가둬요? 인영 씨라면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잖아요.”

“넓은 세상…….”

“패션이 사양 사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스페이스 워커가 아무리 크게 성공해도 시대적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어요. 그래서 회사에서 비싼 월급 줘 가면서 미래를 대비하라고 인영 씨를 그 자리에 앉힌 거잖아요. 회장님이 물산에 미래전략본부를 신설하고 기획실은 해외 자원 개발을 맡게 한 이유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정인영의 머리가 정신없이 돌아갔다.

단순히 해외 지사 개편에서 정호영의 독주를 막고자 하신 일인 줄로만 생각했다. 헌데 진혁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안에 깊은 뜻이 들어 있었다.

그제야 진혁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패션과는 다른 사업 영역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앞으로는 힘든 시기가 도래할 겁니다. 그간 지구촌 공장과 소비 시장의 역할을 해 준 중국의 성장세가 조만간 꺾일 겁니다. 거기에 유럽의 경제위기는 더 깊어질 거고요.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그럼 우리는 뭘 해야 해요?”

인영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바로 물었다.

진혁은 어이없었다.

“지금 같은 사업가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질문을 하신 것은 아시죠? 이건 밥그릇을 보여 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또 못 참는 성격이거든요. 그리고 오늘 밥은 제가 사는 건데요. 그리고 앞으로도 제가 계속 살 테니 밥그릇 뺏길 걱정은 마시고 좀 이야기해 줘요.”

“거 밥값 한번 무지 비싸네.”

진혁이 투덜거렸지만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아집으로 뭉친 정호영과 달리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솔직하게 의견을 구하는 인영의 모습이 좋게 보였다.

그래서 털어놨다.

“전 뷰티와 메디컬이 유망하다고 봅니다.”

“그쪽은 시장 규모가 작잖아요?”

인영도 그간 놀고먹지만은 않았다. 나름 공부도 많이 하고 있었다.

두 부문 모두 예전부터 블루오션이라는 말은 있었다. 하지만 시장 규모 자체가 작다 보니 마이너로 평가받아 크게 주목하지 않고 있었다.

“현재 작다는 것이지,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것은 누구도 모르지요. 그리고 인영 씨는 지금 패션을 버리고 새로운 사업을 하자는 게 아니잖아요. 뷰티는 패션과 관련성도 많고, 최근 세계적으로 한류와 K-POP의 열기가 뜨거우니 충분히 관심을 가져 볼 만하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뷰티란 말씀이지요.”

인영이 중얼거리며 생각에 빠지자, 진혁은 내려놓았던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조용히 있었다.

자신이 해 줄 말은 다 해 줬다. 나머지는 그녀가 판단할 문제였다.

* * *

인영이 집에 도착한 시간은 11시경이었다.

거실로 들어서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서재에 계시는데, 너 오면 보자고 하셨어. 회사에 무슨 일 있니?”

“특별한 일은 없는데.”

“이상한 일이네. 부녀가 다 들어오자마자 서로들 찾고. 얼른 들어가 봐라.”

서재의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자 정진호가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찾으셨어요?”

“와서 앉아라.”

긴장한 표정으로 옆에 가서 앉았다.

정진호가 먼저 자신을 찾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회사에서 조금 황당한 일이 있었다. 김선혁 전무가 말도 안 되는 건의를 해서 안 된다고 했더니 네게 의견을 들어 보라고 하더라.”

“제게요?”

“그래. 물산의 일을 너한테 물어보라는 게 이상하지 않냐? 그 양반이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인영은 짐작되는 바가 있었지만 먼저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어떤 내용인데요?”

“얼마 전에 폐쇄한 카이로 지사가 필요하다며 다시 개설했으면 하는데, 그 내용이 황당해. 퇴사한 이전 직원에게 맡기겠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반반씩 투자해서 저쪽에 운영권을 넘겨주자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안 하겠다고 했다더라. 허허.”

정진호는 황당하겠지만 인영은 아니었다.

“그건 무조건 해야 해요. 반반이 아니라 우리가 다 투자하고 운영권을 주더라도 진혁 씨는 무조건 잡아야 해요.”

“진혁 씨?”

“……!”

“네가 그자를 아느냐?”

인영은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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