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총판 준비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인영도 더 이상 감출 수는 없었다.
스페이스 워커에 얽힌 사정부터 카이로에 가서 그를 만난 것도 밝혔다.
정진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니까 네가 그자에게 이야기를 듣고 김 전무에게 호영이가 추진하는 일을 막아 달라고 했다는 것이냐?”
“어쩔 수 없었어요. 잘못되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는데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었어요.”
“네가 직접 나를 찾아올 수도 있었다.”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어요. 김 전무님도 같은 생각이었고, 직접 들으시면 바르게 잡으실 거라 믿었어요.”
정진호가 인영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드러웠다. 어리광만 부리던 딸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생각이 깊었다.
“태후가 고개 숙이면서까지 잡아야 할 정도로 그자가 가치 있다는 거냐?”
“충분히요. 지금도 그 사람을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사적으로 만나는 사이인 거냐?”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스페이스 워커에 대한 조언을 들으려고 제가 억지로 만든 자리였어요. 그런데…… 혼났어요.”
“네가 누군 줄 아는데도?”
“진혁 씨는 그런 것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이템에 집착해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고 혼냈어요.”
혼났다면서도 인영의 표정은 더 없이 밝았다.
막내라고 오냐오냐 커서 자존감이 강한 딸이었다. 철이 들고 꾸중 듣는 게 싫다며 자기 할 일은 똑 소리 나게 해서 잔소리한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얻은 것은 있고?”
“진혁 씨가 앞으로 세계 경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며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게 뷰티와 메티컬이라고도 했고요.”
“그거야 예전부터 나왔던 이야기지. 하지만 그쪽은 우리 같은 대기업이 하기에는 너무 영세해.”
“저도 같은 말을 했어요. 그런데 진혁 씨는 앞으로 시장 규모가 커질 거라면서, 별도 회사를 차리는 게 아니라 뷰티를 패션의 한 부문으로 삼을 만하다고 했어요.”
“패션에서 뷰티를?”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말이 있어요. 회사로는 영세할지 모르지만 한 부문으로는 충분히 매력적인 분야라는 생각이 들어요.”
“음.”
정진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생각지 못한 방법이었다.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이 별도 사업으로 바라보니 추진하지 못한 일이었다.
헌데 그걸 패션의 신사업으로 놓고 보니, 사양길로 접어드는 의류 분야의 대체 사업으로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 사람이 아버지에 대한 말도 했어요.”
“내 이야기를?”
“아버지가 미래전략본부를 신설하고 오빠에게 해외 자원 개발을 맡긴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했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아버지도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구나, 하고요. 전 그냥 당분간 쉬면서 자숙하라는 의미인 줄로만 알았거든요.”
“허허. 그놈 참.”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자신만의 복안이었다.
세상은 변한다.
현재 그룹의 주력 사업은 자신 세대에 맞는 사업일 뿐이었다. 정호영에게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 맞는 사업을 준비시키기 위해 한 일이었다.
그걸 알아채다니 보통 놈이 아님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건 속마음이고, 겉으로 드러난 표정은 태연했다.
“세상에 뛰어난 인재들은 많다. 우리 그룹만 해도 한국 최고의 인재들만 들어올 수 있다. 그들이 올린 계획서를 보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최고 책임자의 숙명임을 잊지 말아라. 사사로운 감정에 끌려서는 안 된다.”
“사업은 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그 사람의 지론이에요. 저 역시도 같은 생각이고요. 진혁 씨에 대한 개인감정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에요. 패션에서 뷰티를 하게 도와주세요.”
“조만간 패션 최 사장하고 식사 자리를 가지 마. 하지만 최 사장의 결심을 얻어내는 것은 순전히 너 하기 나름이다.”
“잘 알고 있어요. 철저히 준비해서 반드시 뷰티 부문이 신설되게 할게요.”
“그래, 믿는다.”
그 이후로도 두 부녀는 사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정진호는 인영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했다.
어느새 한 사람의 사업가로 성장해 있었다. 뿌듯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허전함이 느껴졌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딸을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끼는 감정이었다.
* * *
다음 날, 진혁은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주민 센터에 들려 이태원 빌라의 명의 양도에 따른 서류와 강릉 땅 구입에 필요한 각종 서류들을 준비했다.
아버지는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이달 말까지 근무하시기로 해서 진혁이 위임장을 가져가 한꺼번에 처리했다.
서류가 많아 시간이 꽤 걸렸지만, 이집트의 극악한 행정 처리를 경험한 진혁에게는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느껴졌다.
막 주민 센터를 나섰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박이동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강릉에 좋은 땅이 나와서 연락드렸습니다. 교동에 있는 땅인데…….
“지금 어디십니까?”
-왕십리 쪽인데요.
“그럼 이쪽으로 오실 수 있겠습니까?”
-바로 보시게요?
“박 선생님이 좋다고 하는데 더 잴 필요 없지요.”
-아무리 그래도…….
“고덕역으로 오셔서 전화 주세요.”
박이동이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바로 끊었다.
마침 아버지가 오늘 송별회가 있다며 차를 두고 나가신 데다, 고속도로를 타기에는 이쪽이 나았다.
한 시간이 되기도 전에 박이동이 고덕역에 도착해 함께 차를 타고 강릉으로 갔다.
평일이라 막히지 않아 두 시간 삼십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땅은 종합 운동장 인근에 있었다.
“지목은 임야가 2,500평에 대지 200평 정도입니다. 재작년에 15억에 매입한 것인데 그 가격에 다시 나왔습니다.”
“왜 다시 나온 겁니까?”
“수산 회사에서 건어물 창고 부지로 매입한 건데, 일본 원전의 방사능 유출 때문에 수산물 소비가 줄어 회사 자금 사정이 어려워졌답니다. 아는 지인에게 은밀히 부탁해서 급매로 내놓은 거랍니다.”
“급매인데 가격이 같아요?”
“아시다시피 평창 올림픽 유치 이후 강릉 땅값이 평균 15% 가까이 올랐습니다. 해안가는 훨씬 많이 올랐고요. 가격이 같다고 해도 오른 만큼 할인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을 믿으십니까?”
“예?”
박이동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진혁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회사 사정이 어렵다면서요. 그건 매도자가 급하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올림픽 특수는 해안가에 집중되겠지요. 그래서 그쪽 땅값이 더 오른 거고. 여기는 뭐 볼 것도 없잖습니까?”
“그건 그러네요.”
“가격을 낮춰 보세요.”
“어느 수준까지 말입니까?”
“제 생각에 적정가는 13억입니다. 하지만 최대한 낮추세요. 대신 13억 이하로 결정되면 줄어든 금액의 반은 박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반이나요?”
박이동이 놀라 물었다.
“저는 15억을 다 달라고 해도 여기 땅을 살 겁니다. 그런데 더 싸게 살 수 있게 해 주셨으니 당연히 드려야지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낮추겠습니다.”
“그 회사 사정을 더 알아보세요. 은밀히 급매로 내놓았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점심시간이라 두 사람은 근처의 설렁탕집으로 들어갔다.
“회사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말씀대로 저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만뒀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이태원 빌라를 관리하면서 무슬림과 친해지세요. 탈레반이란 선입견을 버리고 보시면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빌라 세입자들과 계약하면서 제가 오해했다고 느꼈습니다. 무지할 정도로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늦었지만 제게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혁은 빌라의 관리를 박이동에게 맡겼다.
세입자들을 월세로 전환하고 들고 나는 사람들의 중계를 하면 떨어지는 수수료가 짭짤했다.
물론 그것 하나로 먹고 살 수는 없지만, 나머지는 박이동 스스로 개척해야 할 문제였다.
박이동이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선생님은 뭐 하는 분이십니까?”
“이집트에서 무역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서 그렇게 돈이 많으신 거군요.”
빌라 구입에 이곳의 땅까지 합치면 30억 가까이 되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로 구매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작별 인사를 했다.
박이동은 남아서 매도자에 대한 조사를 더 하겠다고 하며, 진혁의 차를 보고 한 소리 했다.
“땅 구입도 좋지만 차부터 바꾸셔야겠습니다. 10억이 넘는 돈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결정하시는 분이 타실 만한 차는 아니네요.”
“거의 대부분 외국에 나가 있어서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차는 아버지 차입니다.”
“허, 그럼 더 바꿔 드리셔야지요. 남들이 알면 욕합니다.”
“그런 것 신경 쓰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수고하십시오.”
진혁이 일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그도 차를 바꿔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도 총판에 들어간 자금을 부담스러워하시는데 차까지 바꿔 드리면 오히려 의심만 키우는 일이라 억지로 참고 있었다.
시간을 두고 하나씩 해결하는 게 맞았다.
진혁은 서울로 돌아와서 희준을 만났다.
희준은 그간 한지철에게 넘겨받은 다른 기업 재고품 담당자와 상담한 내역을 들려줬다.
“열 곳 중 규모가 큰 곳 다섯 군데와 통화했는데 그중 두 곳이 적극적이었어. 그런데 한 곳은 자신들의 가격을 고수해서 포기하고, 한 곳만 조건이 맞아 내일까지 오퍼시트를 보내 주기로 했어.”
“고생했다. 그 정도면 일단 물량은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알라딘 컴퍼니에서 현재 확보한 상인들의 규모면 당장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다음은 총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총판 신청서도 작성해야 했고, 함께 낼 사업 계획서도 함께 만들어야 했다.
희준이 도와준 것으로 되어 있으니 알고는 있어야 했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 분이 사이좋게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계셨다.
“밥은 먹었니?”
“희준이 만나서 먹었어요.”
“언제 한번 집에 데리고 와라. 너 외국 나가고는 한 번도 못 본 것 같다.”
“그렇게 해라. 큰 도움을 받고 있는데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알겠어요. 이야기할게요.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방으로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어머니가 과일을 준비하고 계셨다.
자리에 앉자 아버지가 말했다.
“주말에는 시간 비워 둬라.”
“무슨 일 있어요?”
“할아버지께 말씀은 드려야지. 같이 속초에 다녀오자.”
“그렇지 않아도 찾아뵈려고 했는데 잘됐네요.”
과일을 포크로 찍어 내밀며 어머니가 말했다.
“아파트를 부동산에 내놓으려고 갔더니 곧 재건축될 건데 아깝다며 말리더라.”
“그놈의 재건축 이야기는 벌써 십 년도 더 됐다니까.”
“이번에는 진짜라고 했다니까요.”
진혁은 이번에도 소문으로만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집은 두 분의 첫 집이었고 20년 넘게 살아오신 곳이었다. 아쉬움을 남겨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럼 팔지 말고 전세를 내놓고 가세요.”
“그럼 좋지만 이번에 네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갔잖아?”
“어차피 여기도 나중에는 제 집이 될 건데요, 뭘.”
“그렇지. 너도 나중에 결혼하면 살 집도 있어야 하고. 여보, 그렇게 해요.”
“젊은 놈이 은행 빚만 잔뜩 있으면 안 돼. 뼈 빠지게 일해서 이자로 은행 좋은 일만 시킬 필요는 없어.”
“요즘 은행 이자가 많이 싸졌어요. 어머니 말씀대로 재건축되면 그 몇 배는 더 뛸 텐데요.”
진혁이 찬성하자 어머니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진혁이 말이 맞아요. 우리가 조금 싸다고 여기로 온 걸 얼마나 후회했어요. 그때 강남의 아파트를 샀으면 지금은 떵떵거리고 살았을 텐데…….”
“우리 사는 게 어때서. 이만하면 어디 가서 자랑해도 욕 안 먹어.”
“두 분 말씀 다 맞아요. 그래도 이자보다는 집값 오르는 게 더 크다는 것은 사실이니 그냥 전세 주고 갖고 계시는 것으로 하세요.”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
아버지가 마침내 수긍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서명수는 진혁을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더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다 방으로 들어왔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다음 날은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새벽까지 사업 계획서를 작성했다.
어머니와 점심을 함께 먹고 나와 태후 빌딩으로 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의외의 인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