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62화 (62/307)

62화. 합작 법인

손민한이었다.

-어디냐?

“밑입니다. 패션에 일이 있어 막 도착했습니다.”

-전무님이 보자신다.

“그럼 지금 올라갈까요?”

-잠시만.

손민한이 김선혁과 상의하고 말했다.

-일 보고 퇴근 후에 저녁을 같이 먹자 신다. 괜찮겠냐?

“괜찮습니다. 약속 장소 정해지면 문자 넣어 주세요.”

전화를 끊고 한지철을 찾아갔는데 김지민만 있었다.

신청서를 가져왔다는 말에 함께 회의실로 가서 서류를 검토했다.

꼼꼼하게 체크한 김지민이 고개를 들었다.

“잘 만들어 오셨네요. 서류도 완벽하고요.”

“그럼 이제 면접만 남은 건가요?”

“팀장님이 말씀 안 하셨어요?”

“연락 못 받았습니다만,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건 아니고, 서 사장님 아버님이시라고 하니까 본부장님이 면접은 됐다며 바로 처리하라고 했대요.”

“별로 원치 않은 친절이네요.”

진혁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모습에 지민이 말을 이었다.

“팀장님도 사장님이 원칙대로 해 달라던 말씀을 드렸대요. 그런데 회사에서 특혜를 주는 것처럼 거짓말해야 하는 게 불편하시다고 했대요.”

“끙.”

진혁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원망하기도 뭐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곧 땅은 구해질 건데, 물류 창고를 건축하는 일이 걱정입니다. 혹시 이번에 총판으로 선정된 곳의 창고 중에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추천 좀 해주세요.”

“이번에 인천 총판을 신청하신 사장님이 대형 물류 창고 건축업을 하세요. 그래서 그런지 물류 창고도 제일 잘 만들어 놓은 것 같아요.”

“잘됐군요. 연락처 좀 알려 주십시오.”

“잠시만요.”

김지민이 바로 나가 연락처를 적어왔다.

앞으로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손민한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회사 인근의 일식집이었다.

진혁은 김지민에게 다음 주에 아버지를 모시고 와서 계약을 하겠다고 하고 나왔다.

약속 장소에 가서 조금 기다리자 김선혁이 손민한과 함께 도착했다.

회를 주문하고 김선혁이 말했다.

“회장님께서 허락하셨다.”

“……?”

“카이로 지사를 반반씩 투자해서 현지 법인으로 만들자는 제안 말이다.”

“운영권을 제가 갖는다는 것을 알고도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겁니까?”

“그래. 네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이건 도대체…….”

진혁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대그룹 태후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기로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선혁이 이런 일로 농담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머리가 복잡해 회가 나올 때까지 진혁은 입을 열지 못했다.

“원하던 대로 됐는데 왜 말이 없어?”

“솔직히 받아들여질지 몰랐습니다.”

“나도 그래. 정 본부장이 설득한 모양이야.”

“……!”

“카이로에서 너를 만나고 나를 찾아왔었어. 기획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회장님께 알려 달라고 부탁하더라.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된 거야.”

그제야 진혁은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됐다. 정인영에게 너무 말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선혁이 귀신같이 그 마음을 읽었다.

“정 본부장을 탓할 일 아니다. 네 생각을 믿어 주고 널 인정해 준 사람이다. 그것만으로도 보통분은 아니시다.”

“덕분에 전 머리 아파졌습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지금도 잘하고 있지만 이젠 태후라는 날개까지 단 거야. 너한테 득이 됐으면 됐지,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도 회장님을 찾아뵌 거고.”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략적 파트너라고는 하지만 태후가 직접 투자한 것과는 공신력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에이전시라는 한계 때문에 규모가 작은 시장 상인들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공식적으로 태후의 이름을 걸고 기업이나 정부를 상대로 상담할 수 있었다.

게다가 태후 제품을 원가에 제공받을 수 있으니 현실적인 이득도 적지 않았다.

진혁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다가 입가에 미소가 맺히는 모습에 김선혁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말을 100% 이해했다는 의미였다.

생각할수록 아까운 놈이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붙잡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기도 했다.

진혁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정 본부장에게 해라.”

“그래도 전무님이 믿어 주셔서 된 일입니다.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

김선혁이 진혁이 술병을 잡아 가는 것을 막았다. 공식적인 업무를 술 마시면서 할 수는 없었다.

“자본금은 얼마로 할 생각이냐?”

“사무실만 얻고 태후 관련 업무를 하는 직원들을 옮겨 가면 되니, 많이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50억 정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같다만, 너도 반을 내야 하는데 가능하겠냐?”

“어떻게든 준비해야지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혁이 자신의 자금 사정을 감추려고 두리뭉실하게 말했지만 김선혁의 날카로운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지철에게 들은 말대로라면 총판에 들어가는 비용도 진혁이 내는 거였다. 거기에 25억까지 합치면 40~50억 가까이 되는 거금이었다.

그가 아는 정보로는 1/10인 5억을 준비하기도 벅차야 맞았다.

이집트에서 그 사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김선혁의 표정은 평온했다. 속마음을 감출 정도로 노련했다.

“이제 됐습니까?”

“아직 한 가지 더 남았다.”

“아직도요?”

“네가 알아서 잘 운영하겠지만, 반을 투자하고 관심을 안 둘 수는 없다. 우리 측 사람을 직원으로 채용해 줬으면 좋겠다.”

진혁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업자로서 당연한 요구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태후의 이름은 쓰지만 별도 법인이라 임금 체계가 다릅니다. 그렇다고 특별 대우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부분은 우리 쪽에서 보전해 주는 것으로 하지.”

“그렇다면 문제없습니다. 일 잘하는 사람으로 보내 주시면 대환영입니다.”

“대충 중요한 이야기가 끝난 것 같으니 나머지는 천천히 맞춰 가기로 하고, 이제 편하게 마시자.”

“그 말씀 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진혁이 얼른 술을 따랐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고 김선혁이 말했다.

“정 본부장과의 관계는 신중해야 한다.”

“이제 겨우 몇 번 봤을 뿐입니다.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는 아닙니다.”

“남녀 관계는 만난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니야. 둘 사이 문제는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어떻게 되든 네가 하는 일에 영향을 미칠 거다. 심사숙고해서 행동해라.”

“전무님이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사업에 신경 쓰기도 바쁩니다. 사적인 부분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전 편한 게 좋습니다.”

진혁은 가볍게 생각하고 넘겼지만 김선혁은 아니었다. 정인영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어 우려되는 바가 없지 않았다.

* * *

다음 날 아침부터 부모님이 서둘렀다. 할아버지를 뵈러 속초에 가기로 한 토요일이었다.

“빨리 준비하라니까. 왜 자꾸 핸드폰만 보고 미적거려.”

“조금 있으면 행락객들 때문에 고속도로가 막힌다. 서둘러라.”

두 분의 성화를 들으며 가져갈 선물을 들고 밑으로 내려오자 아버지가 벌써 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출발했다.

점심때쯤 속초에 도착했다.

미리 들은 게 있어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할아버지가 야윈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장손들이 함께 몰려오자 표정이 한없이 밝았다.

숙모가 만들어 놓은 평양만두로 점심을 먹은 후 부모님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산책을 가시고 진혁은 쉬었다.

한국에 들어온 이후 정신없이 뛰어다닌 탓인지 피곤이 몰려왔다.

방바닥에 등을 대자마자 잠이 들었다.

깨어나 밖으로 나오자 벌써 해가 져 있었다.

어르신들은 평상에 앉아 있고 사촌동생들이 숯불을 피우고 있었다.

진혁의 입에 바로 침이 고였다.

“이거 생선구이 할 거지?”

“그렇긴 한데, 오빠 것은 없어요.”

“왜?”

“잠만 자느라 아무것도 한 게 없잖아요.”

“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됐어요.”

“알았어. 굽는 건 내가 할게. 너희들은 그만 쉬어.”

진혁이 얼른 사촌 동생들을 밀어내고 생선을 굽기 시작했다.

서울에도 생선구이집이 있다지만 살아 있는 생선을 바로 구워 먹는 맛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내고 나서 술상이 나오자 아버지가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 제가 이제 고향에 내려와 곁에서 모시려고 합니다.”

서명수는 그간 서울에서 벌어진 일을 알렸다.

“진혁이가 애를 많이 써서 전에 다니던 직장의 총판을 맡게 됐습니다. 물류 창고를 강릉에 짓고 있으니 여기에 집을 구해 아버님을 모시면서 출퇴근하면 됩니다.”

“잘 생각해서 결정한 것이냐?”

“많이 알아보고 여러 사람에게 자문도 구했는데, 다들 부러워할 정도로 잘된 일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될 듯싶습니다.”

“네가 어련히 잘 생각해서 결정한 일이니 걱정은 안 한다. 그래도 집은 강릉에다 구해라.”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뭐든 처음에 자리를 잘 잡아야 한다. 게다가 창고라면 비싼 것들이 잔뜩 들어 있을 텐데, 거길 두고 여기서 편히 잠이나 오겠냐?”

“괜찮습니다. 길이 잘 뚫려 있어 차로 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불에 타는 건 한순간이다. 쓸데없는 말 말고 안정될 때까지는 강릉에서 지내. 주말에 올라와 이렇게 보면 된다.”

“형님, 그렇게 하세요. 처음에는 신경 쓰실 일이 많으실 테니 가까운 곳에서 지내시는 게 맞습니다. 주말에도 형님이 바쁘시면 제가 아버지 모시고 가면 됩니다. 우선은 아버님 말씀대로 하세요.”

동생까지 나서서 말리자 서명수는 난감했다.

사업을 생각하면 다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곳에 내려온 건 아버지를 곁에서 모시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네 마음은 안다. 하지만 말이다. 부모는 자식이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라지 자식에게 짐이 되는 건 원치 않는다.”

“짐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은 내 말대로 해라.”

집안의 제일 어르신인 할아버지가 결론을 내렸다. 그럼 끝난 것이다.

어두운 아버지의 표정과는 달리 어머니는 찢어지는 입을 억지로 다무느라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반대로 숙모의 얼굴은 죽을상이 되어 있었다.

그때 한창 가꾸는 데 정신이 팔린 사촌동생 연희가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물었다.

“오빠, 근데 무슨 브랜드야?”

“스페이스 워커라고, 새롭게 나온 아웃도어 브랜드야.”

“바람막이 전설의 그 스페이스 워커!”

“응. 너도 아네?”

“그럼. 요즘 그거 모르면 간첩이야, 간첩. 나도 두 개나 있는데.”

연희의 자랑질에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한 숙모가 한 소리 안 할 수가 없었다.

“쌀 한 가마니보다 비싼 옷을 두 벌이나 걸치고 다니는 게 자랑할 일이냐?”

“엄마는 맨날 쌀하고 비교해. 우리 반 민정이는 깔별로 다 있어.”

“걔는 공부라도 잘하지. 공부도 못하는 게 옷 욕심만 있어 가지고는. 그만하자.”

할아버지를 의식해 숙모가 겨우 참았다.

그 모습에 어머니가 나섰다.

“동서, 진혁 아빠의 총판하고 별도로 나도 대리점을 오픈해서 운영해야 해. 그래서 말인데, 연희가 와서 일해 줬으면 하는데, 어때?”

“연희를요?”

“연희가 예쁘고 늘씬해서 옷태가 좋잖아. 조금 덜렁대기는 하지만 성격이 싹싹한 게 손님들도 좋아할 타입이고.”

“그건 그렇지요.”

“연희라면 믿고 맡길 수 있으니 내가 아버님 찾아뵙는 것도 수월할 것 같아서 그래. 부탁할게.”

“형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그럼 나 취직된 거네? 아싸! 얼른 자랑해야지. 어어. 아악!”

얼굴이 활짝 핀 채 떠들던 연희의 입에서 난데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쿵.

연희가 기쁜 나머지 평상을 내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어머, 너 괜찮니?”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큰 엄마.”

“으이그, 저 칠칠이. 형님이 고생이 많으실 거예요.”

“그게 연희의 매력이잖아.”

그렇게 강릉에 머무르는 것으로 원만하게 결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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