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마르와
다음 날, 숙모가 챙겨 준 반찬거리를 가득 싣고 서울로 올라오다가 교동에 들렀다. 구입할 땅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였다.
박이동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경계를 알려 주자 부모님이 여기저기 둘러보는 사이 박이동이 얼른 진혁에게 말했다.
“사장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사정을 알아봤더니 회사 사정이 아주 심각하더군요. 이번 달에 돌아올 어음 20억을 막지 못하면 부도가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까지 해 준답니까?”
“11억까지 낮췄는데 그 이상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뒤로 돈 빼돌려서 부도내고 도망치지 않은 것을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닌 모양입니다.”
박이동의 심성을 보여 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사업가였다.
“10억으로 최종 제안을 하세요.”
“아이고, 11억도 사정사정해서 겨우 낮춘 겁니다.”
“대신 계약금, 중도금 없이 바로 전액 입금시키겠습니다. 안 그럼 이집트에 갔다 와서 보자고 하세요.”
“…….”
“그냥 그대로 전하기만 하세요.”
“알겠습니다.”
박이동은 수긍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결정은 진혁이 하는 거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구경을 마친 아버지가 흡족한 얼굴로 다가왔다.
“땅 모양이 네모반듯한 게 좋다. 도로도 바로 접해 있어 고속도로를 타기도 수월하겠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만 올라가시죠.”
“잠깐만 기다려라.”
무슨 일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택배 차량 한 대가 도로가에 멈췄다.
운전석에서 젊은 사내가 내리더니 빠르게 뛰어왔다.
“부장님, 제가 늦었습니다.”
“아니야. 갑자기 전화해서 만나자고 한 내가 실례한 거지.”
“오실 거면 미리 연락을 주시지요. 그럼 오늘은 시간을 비워 놓았을 텐데요.”
“바쁘게 사는 사람 시간을 뺏으면 안 되지. 그래, 일은 할 만해?”
“수입은 서울에서만 못하지만 마음은 편합니다. 그러니 저 때문에 더 이상 마음 쓰지 마십시오.”
어두운 얼굴의 사내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김 과장님, 안녕하세요?”
“아이고, 사모님도 함께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이가 김 과장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리시나 봐요. 요즘도 술만 드시면 말씀하세요. 저도 그렇고요.”
“그게 어디 부장님 잘못입니까. 회사 방침이 그러니 어쩔 수 없으셨던 것을 압니다. 저는 잘 살고 있으니 그만 잊으셔도 됩니다, 두 분 다.”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아버지가 멀뚱히 서 있는 진혁을 보고 소개했다.
“내 아들이야. 여긴 예전 직원이었던 김순근 과장이고.”
“서진혁입니다.”
“외국에서 근무하신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김순근입니다.”
인사가 끝나자 아버지가 말했다.
“김 과장, 나도 이번에 사표를 냈어.”
“아니, 부장님.”
“이야기를 더 들어 봐. 여기 아들이 소개해 줘서 태후패션의 영동 지역 총판을 맡았어. 여기에 물류 창고를 크게 지을 생각이야. 김 과장이 창고 관리를 맡아줬으면 해.”
“제가요?”
“자네만큼 성실한 사람을 보지를 못했어. 그러니 나 좀 도와줘.”
“부장님!”
눈물이 글썽이는 김순근을 보고 서명수가 혀를 찼다.
“이제 사장이야.”
“예, 사장님.”
“처음 시작하는 거라 많이 힘들 거야. 하지만 둘이 열심히 하면 좋은 날이 오지 않겠어?”
“그럼요. 부장, 아니, 사장님이라면 믿고 열심히 일만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된 거야. 그동안 미안했고 고마워.”
서명수의 얼굴에도 이슬이 맺혔다.
마음에 응어리져 있던 감정 하나가 사라졌다.
진혁은 박이동에게 마지막 조율을 하면서 어머니의 대리점이 들어갈 자리도 알아보라고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 * *
다음 날, 태후물산으로 가서 김선혁 전무와 함께 카이로 지사 법인 설립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금액과는 상관없이 해외 투자를 결정하는 일이라 논의하고 확인할 것들이 많았다. 법무팀까지 동원되었는데도 세 시간이나 걸렸다.
“하이고,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네요.”
“이 정도는 약과야. 큰 투자는 하루를 넘길 때도 있어.”
“이제 제가 이집트로 돌아가서 법인 설립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만 남았군요.”
“기대가 크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악수를 하고 태후 빌딩을 서둘러 나와 인천으로 향했다.
* * *
주식회사 우리씨엔티는 물류 창고 전문 시공업체답게 단순한 기능뿐만 아니라 외관의 미적 감각까지 고려한 시공으로 유명했다.
인천 총판의 물류 창고도 창고라는 느낌 없이 잘 지어진 건축물처럼 보였다.
“본사에서 이야기 들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라는데 도와줘야지요. 나도 사장님 같은 아들이 있습니다. 내 건물같이 잘 지어 줄 테니까 걱정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비밀 유지도 부탁드립니다.”
“그것도 걱정 마십시오. 한 팀장도 모자라 본부장님까지 전화해서 신신당부한 일인데 허투루 할 수는 없지요. 현장 소장도 본사에서 하는 것으로 아니까 안심하십시오.”
“고맙습니다.”
후덕한 인상의 사장에게 다시 한번 부탁을 하고 나올 때 전화가 왔다.
“서진혁입니다.”
-서 사장님, 유닉스의 송승용입니다.
“송 사장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마침내 할랄 인증이 나왔습니다.
“우와, 축하드립니다.”
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생산하려면 상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언제나 들어오십니까?
“마침 한국입니다. 내일 찾아뵐 테니 샘플을 준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두 달여간의 오랜 기다림 끝에 이룬 결실이었다.
한껏 기분이 올랐던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두리식품입니다.
“사장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누구시라고 전해 드릴까요?
“이집트 알라딘 컴퍼니의 서진혁입니다.”
얼마 후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 사장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할랄 인증은 아직 안 됐습니까?”
-아무 연락이 없는 것을 보니 더 기다려야 하나 봅니다.
“다른 업체에서 진행한 것은 나왔다고 합니다. 확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알았소. 알아보고 연락 주리다.
이쪽의 말은 듣지도 않고 끊었다.
살짝 기분이 나빠진 진혁이 머리를 털고 카심에게 전화해 내일 출장 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 * *
다음 날 아침, 차를 끌고 고덕역으로 가자 카심과 함께 히잡을 쓴, 이목구비가 시원스럽게 생긴 젊은 아랍 여성이 함께 있었다.
“마르와라고 해요.”
“서진혁이야. 갑작스럽게 부탁했는데 응해 줘서 고마워.”
“아르바이트 비용만 넉넉하게 챙겨 주시면 돼요.”
큰 입을 활짝 벌리고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주문하기 전에 샘플을 최종 확인해야 하기에 카심에게 적당한 인물을 물색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마르와는 또래의 여자애처럼 쉬지 않고 떠들었다.
카이로에 있는 명문 아인샴스대의 한국어학과에 다니다가 교환 학생으로 고려대에서 경영학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동방신기 유노윤호의 열성 팬으로 콘서트에도 여러 번 갔다고 했다.
1970년대 여학생들이 오빠 부대에 열광하는 모습을 본 진혁이라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카심은 아니었다.
“여자가 조신해야지. 네 부모님은 네가 이렇게 생활하는 것을 아시기나 하냐?”
“아, 고리타분해. 제 인생을 왜 부모님에게 물어봐요? 페이스북을 본 어머니는 제가 한국에 정착하기를 원하신대요.”
“거참 이상한 분들이시네.”
“요즘 카이로 치안이 악화된 틈을 타서 지하철에서 막 더듬는 이상한 아저씨들이 많아졌다는데, 혹시 아저씨도?”
“조그만 게 어디서 어른을 놀려.”
“나흐얀 이맘께서 이슬람이 제시하는 인간의 모든 권리와 의무는 남녀 모두에게 동등하게 부여되었다고 하셨어요. 아저씨는 좋은 것을 좋다고 표현하면서 저는 여자라고 안 된다고 하는 건 잘못이에요.”
이맘이 그렇게 말했다는데 카심도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불편해 보였다.
진혁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켜봤다. 한국적 사고나 서구적 관점에서 이슬람을 보고 판단하는 건 무관심한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그들의 습관과 관습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들의 문제로 남겨 줘야 했다.
춘천의 유닉스에 도착하자 송승용 사장이 반갑게 맞더니 바로 팩스로 온 할랄 인증서를 보여 줬다.
회의실로 가자 테이블 위에 샘플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가 이번 일에 얼마나 성심을 다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은 역시 마르와였다.
“어머, 그럼 이게 다 할랄 인증을 받았다는 거예요?”
“맞아요. 어렵게 받은 겁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저씨 짱!”
송승용에게 한국식 표현으로 엄지를 척 내미는 마르와의 행동에 카심이 마뜩찮은 시선을 보냈지만 진혁은 아니었다.
“어때? 이집트로 가져가서 팔면 괜찮을 것 같아?”
“괜찮다뿐이에요? 이건 대박이에요, 대박. 가만. 이럴 게 아니라 이 사실을 얼른 친구들에게 알려야지. 한국 화장품도 이제 마음 놓고 쓸 수 있게 됐네.”
신이 난 마르와는 핸드폰으로 인증서는 물론 제품을 하나하나 찍었다.
그 모습에 진혁과 송승용 모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카심은 아니었지만.
진혁이 송승용에게 물었다.
“바로 양산이 가능하시겠습니까?”
“제품을 만드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만 디자인 작업이 걱정입니다. 포장지와 사용 설명서를 아랍어로 바꿔야 하는데, 전문가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단순히 직역만 해서는 안 되잖습니까?”
“어, 그거 제가 하면 안 될까요?”
마르와의 말에 두 사람이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안성맞춤일 것 같지만 그래도 확인은 필요했다.
“일단 테스트부터 하자. 이것부터 번역해 봐.”
진혁이 제품과 함께 놓여 있는 설명서를 건네줬다.
마르와는 자신 있다는 듯이 그 자리에 앉아 빈 종이에 거침없이 써 내려 갔다. 그 행동 하나만 봐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마르와가 번역한 것을 카심과 함께 검토했는데 역시 완벽했다.
“좋아. 네가 해 봐.”
“아싸! 동방신기 부산 콘서트 예약!”
마르와의 가감 없는 표현은 보는 사람을 즐겁게 했다.
번역이 해결되니 더 이상 문제 될 게 없었다.
진혁은 할랄 인증을 받은 제품 15종에 대해 10만 개씩 생산해 달라고 하고, 바로 알라딘 컴퍼니에 전화해서 신용장을 열게 했다.
그 뒤 즐거운 기분으로 춘천을 떠나 두리식품이 있는 산청으로 향했다.
사장이 전날 늦게 전화를 했다. 인증서는 일주일 전에 나왔는데 자킴에서 연락을 주지 않았다며 투덜거렸다.
한꺼번에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늘 간다고 약속했다.
이천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먹고 나올 때 여지없이 마르와의 탄성이 터졌다.
“와! 반응이 대단해요. 댓글 올라오는 거 봐요.”
┖ 대박. 화장품에 할랄 인증이라니.
┖ 이 제품은 대장금의 이영혜가 했던 거잖아.
┖ 주몽의 손혜진이 했던 건 어떤 거야?
┖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해?
계속 올라오는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한국이란 나라가 어디냐는 뜬금없는 댓글도 있었지만 대부분 놀라며 사고 싶다는 글들이었다.
진혁의 기분은 당연히 올라갔다.
다들 차에 탔는데 같이 핸드폰을 확인하다 보니 마르와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게 되었다.
“이거 소셜타이징에 관한 리포트 숙제에 딱 맞을 것 같네.”
끼이익!
“윽.”
진혁이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차가 급정거를 했다.
뒤에 있던 카심이 앞자리의 목 받침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그나마 휴게소 안이어서 다행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그랬다면 큰일 날 뻔했다.
“대체 운전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방금 뭐라고 했어?”
“지금 나한테 반말하는 겁니까?”
“아니, 마르와, 방금 뭐라고 했냐고!”
갑자기 소리치는 진혁의 모습에 마르와가 겁에 질린 눈으로 입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