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66화 (66/307)

66화. 유니로브 런칭

“카이로 대학 학생회장인데, 설명회에 참석하러 온 차량 때문에 일대 교통이 꽉 막혀 있답니다. 아무래도 걸어오시는 게 빠를 것 같답니다.”

진혁도, 카심도 어이가 없었다.

“대체 얼마나 왔길래 교통까지 마비 됐답니까?”

“카이로대 학생들뿐만 아니라 인근 대학의 학생들까지 몰려오는 바람에 강당이 이미 꽉 차서 밖까지 줄이 길게 늘어져 있답니다. 경찰에서 학교 측에 설명회 취소를 요청해 와 논의 중이라는데요.”

“그래서 어떻게 하겠답니까?”

“강행하겠답니다. 대신 두세 번에 나눠서 해야 할 것 같다며, 가능하신지 여쭤봐 달라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말했다.

“돌아갑시다.”

“기다리는 학생은 어떻게 하고요?”

“따로 날을 잡고 장소도 새로 섭외해서 알려 주겠다고 하세요. 우린 이미 오늘의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여기서 욕심 부려 자칫 사고라도 나면 역풍을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하마드가 학생회장에게 진혁의 말을 전하는 사이 카심이 어렵게 차를 돌렸다.

하마드가 입맛을 다셨다.

“방송국에 뇌물까지 써서 취재 차량까지 불렀는데 헛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요. 왔으면 취재하게 시켜야지요.”

“하지만 설명회는 취소됐잖습니까?”

“뻔한 설명회보다 지금의 이 사태가 더 자극적이지 않습니까?”

“아!”

그제야 하마드가 진혁의 생각을 읽었다. 이 상황을 알쇼핑 홍보에 적극 활용할 생각이었다.

“저 좀 내려 주십시오. 담당 PD를 만나야겠습니다.”

“최대한 자극적으로 내보내세요.”

“알겠습니다.”

하마드가 내리고 회사로 돌아가는 내내 진혁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 * *

영국 런던.

가을의 끝을 아쉬워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 유니로브의 CEO인 메이슨은 창가에 서서 오늘따라 더욱 우중충하게 보이는 런던 시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표정이 거리만큼 어두웠다.

대영제국으로 불리며 세계를 지배하며 호령했던 곳이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EU를 만들었다. 그런데 독일과 프랑스가 주인 행세를 하더니, 그리스를 시작으로 회원국들이 줄줄이 경제 위기로 내몰려 부담만 떠안았다.

유럽의 경제는 빈사지경에 이르렀고, 덕분에 유니로브의 실적도 곤두박질을 치고 있었다.

“회장님,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의 말에 메이슨이 고개를 흔들어 무거운 생각을 털어냈다.

오늘은 다 잊고 오랜만에 연락 온 친구와 편하게 술을 마시고 싶었다.

스시 바 ‘아라키’로 들어선 메이슨은 조금 들떠 있었다.

첫 방문이지만 이곳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1인당 저녁 식사 값이 약 450달러인, 영국에서 가장 비싼 레스토랑으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좌석 아홉 개는 몇 주 전부터 예약이 꽉 찬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예약된 방으로 들어서던 메이슨이 주춤했다.

스미스만 있는 게 아니라 웬 낯선 동양 사내가 함께 있었다. 편하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눌 분위기가 아니었다. 좋았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메이슨, 오랜만이네.”

“다시 돌아온 건가? 스미스.”

“마음이야 나도 자네 옆으로 오고 싶지만 사우디의 날씨가 더 좋아.”

JK 모건 젯다 지사장답게 영국의 경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더 기분이 나빠진 메이슨이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 젊은이는 누군가?”

“내 인생 최고의 럭키 가이인 분이시네. 미스터 서, 말씀드린 유니로브의 메이슨입니다.”

“서진혁입니다.”

“메이슨이네.”

스미스의 장황한 소개가 마음에 걸렸지만 메이슨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악수하고 앉았다.

이미 주문했는지 요리가 나왔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남아공산 오징어와 아일랜드산 다랑어, 이탈리아 알바산 송로버섯 등 세계 최고급으로 꾸며졌다.

“마음에 드십니까?”

“오늘 스미스 씨 덕분에 입이 호강하겠습니다.”

“이게 다 미스터 서가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메이슨이 놀란 표정으로 스미스를 바라봤다.

스미스가 런던 부지점장이었을 때 인연을 맺어 10년 넘게 봐 왔다. 하지만 이렇게 정중하게 상대를 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도 스미스에게 투자를 부탁하는 처지라 상대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접대를 했다.

그런 그가 아들뻘로 보이는 동양의 젊은이를 접대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니, 의외였다.

그것도 최고급으로.

놀란 메이슨을 놔두고 두 사람만 대화를 했다.

스미스의 말이 이어졌다.

“며칠 전에 베이커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일본전력이 합의를 요청해 왔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피해 군인들의 뜻에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위한 일이니까요. 무엇보다 원하던 대로 일본 측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섰으니 저는 이만 빠져야지요.”

“그렇기는 하죠. 그럼 공매도 해 놓은 것은 어떻게 할까요?”

“200엔이 무너지면 청산해 주십시오.”

“200엔. 알겠습니다.”

마치 비밀 금고의 번호라도 되는 듯 스미스는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머릿속에 새겼다.

투자 조언을 받던 고객들이 했던 행동을 이번에는 스미스가 따라하고 있었다.

메이슨은 점차 진혁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시선도 주지 않고 회를 음미하고 있었다.

스미스도 시선을 진혁에게서 떼지 않았다.

침묵 속에 식사가 이어질 때 진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고 양해를 구했다.

“회사에서 온 전화인데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진혁이 나가자, 메이슨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체 어떤 자이기에 자네가 그렇게 저자세인가?”

“자네의 감각도 많이 무뎌졌군. 내가 그렇게 힌트를 줬는데.”

“……?”

“일본전력 하면 생각나는 거 없나?”

“설마 NS통신 조나단의 특종에 나오는 베일 속에 가려진 마이더스의 손이란 말인가?”

“맞아. 내가 직접 그 거래를 맡아 진행하고 조나단도 소개시켜 줬지. 선물 투자의 귀재 짐 로저스에 버금간다고 해서 우린 검은 머리 짐이라고 부르네.”

메이슨이 진혁이 나간 문을 바라보고 물었다.

어느새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나를 이 자리에 부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요즘 자네가 코너에 몰렸다는 소문은 들었어.”

“EU 전체가 흔들리는데 유니로브라고 비켜갈 수는 없지.”

“회사 이야기가 아니라 자네 이야기야. 이사회가 계속 딴지를 걸며 공격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

메이슨이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회사 내부 기밀이지만 스미스 정도의 위치라면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유니로브는 비누 판매 세계 1위인 영국의 로브 사와 유럽의 치즈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네덜란드 유니에 사의 합병으로 생긴 회사였다.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로부터 원료를 보다 싸게 사들일 수 있다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인위적인 결합이어서, 합병 이후 많은 문제점들이 튀어나왔다.

런던과 헤이그에 본사가 따로 있고 로브 사 출신의 메이슨이 CEO를 맡고 있지만, 이사회는 유니에가 장악하고 있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었다.

“내가 처한 위기에 왜 저자를 부른 거지?”

“미스터 서가 자네를 소개해 달라고 해서 만든 자리야.”

“무슨 이유로?”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해. 조직의 20%가 나머지 80%를 먹여 살린다는 말은 알 거야. 또한 1%의 수재가 그 20%를 이끌지.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0.1%의 천재야. 에디슨, 모차르트, 아인슈타인이 그 부류지. 난 미스터 서가 0.1%가 될 거라 확신하네.”

“……!”

“마음의 친구로 하는 충고네. 반드시 미스터 서를 잡게. 그래야 자네가 살아. 자네가 그의 손을 잡는 순간 JK모건은 즉시 유니로브 주식 매집에 들어갈 거네.”

“그 정도인가?”

“그에게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발바닥이라도 핥을 거네.”

스미스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혁이 돌아와 앉았다.

“급히 결정할 일이 있어서 실례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십니까?”

“이집트에서 조그마한 무역 회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유통 회사를 차렸는데 신경 쓸 일이 많네요.”

“아무래도 유통은 그렇지요. 이왕이면 성장세에 있는 중국에서 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막차를 타서 조롱거리가 되긴 싫습니다. 무슬림 시장의 발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처럼 말입니다.”

메이슨의 눈이 커졌다.

일부러 떠본 건데 걸려들기는커녕 스미스도 모르는 극비 정책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요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메이슨이 스미스를 노려보는 모습에 진혁이 바로 말을 이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스미스 씨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짐작했을 따름입니다.”

“그걸 믿으란 말이오?”

“얼마 전 미국의 존슨앤존슨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장을 증설하는 대신 내년에 인도네시아에 공장을 짓겠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유니로브의 안마당에 말입니다. 당장 시장이 반응해 유니로브 주가가 곤두박질쳤지요.”

제약 회사로 출발한 존슨앤존슨은 제조업까지 사업을 확장해 현재는 생활용품 분야에서 유니로브의 강력한 적수였다.

지금까지는 중동과 아프리카에 집중해 시장이 겹치지 않았는데, 동남아 시장 진출을 위해 인도네시아에 공장을 짓겠다며 선전 포고를 했다.

유니로브는 인도네시아에 위치한 아홉 개의 공장에서 치약, 비누, 퍼스널 케어, 스킨케어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메이슨이 여기 오기 전에 어렵게 떨쳐낸 기억이었다.

“그래서 긴급 이사회가 열렸는데 나온 대책이 최선을 다해서 방어하겠다는 뻔한 말뿐이라 주가는 지금도 빠지고 있고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적이 심장을 겨누고 있는데 왜 망설이지? 겁쟁이들인가?”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제가 주목한 것은 이사회 결과를 발표한 사람이 이사회장 제프 버넷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메이슨 씨는 다른 의견이지만 밀렸구나, 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스미스 씨에게 자리 주선을 부탁드린 겁니다.”

“좋습니다. 믿지요. 장황한 설명은 이제 됐고, 나를 만나려던 용건을 들읍시다.”

메이슨은 성격답게 정공법을 택했다.

“제가 메이슨 씨가 이사회에 제출한 대응 방안이 실현될 수 있게 돕지요.”

“내가 제출한 대응 방안을 알고 있단 말이오?”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메이슨 씨가 사업가라면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격언대로 하셨을 겁니다. 중동에 공장을 짓자고 했을 겁니다. 안 그런가요?”

메이슨은 답을 하지 못했다. 무언은 곧 긍정이었다.

“공장을 짓는 데 투자하겠다는 생각인 모양인데,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소. 그 전에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 해요. 돈이 없어 실행을 못 하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제가 이사회 결정을 바꿔 드리지요.”

“허, 이봐요. 투자에 크게 성공했다는 것은 들었지만 그래 봤자 1~2억일 텐데, 300억 달러가 넘는 거대 기업을 이끄는 나도 못한 일을 너무 확신하는 것 아니오?”

“자산이 많으면 뭐 합니까. 이사회 승인 없이 1달러도 투자하지 못하는데. 하지만 전 제 생각대로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을 수 있습니다. 누가 더 돈이 많습니까?”

이번에도 메이슨이 답을 못 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사회가 발목을 잡는 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메이슨은 더 이상의 기 싸움을 포기했다.

그래서 솔직히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오?”

“이사회는 분명 중동의 불안한 정세와 존슨앤존슨의 확고한 입지를 이유로 반대했을 겁니다.”

“그렇소.”

“이집트에서 유니로브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지요. 그럼 이사회도 무조건 반대만은 못할 겁니다.”

“어떻게 말이오?”

묻는 메이슨의 목소리가 어느새 갈라져 있었다.

눈앞의 젊은 사업가의 한마디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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