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압델과의 만남
진혁이 말 대신 핸드폰을 꺼내 유튜브에 올라온 이집트 국영 TV 뉴스를 틀어 줬다.
-금일 카이로 대학 인근의 교통이 하루 종일 통제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알쇼핑 창업 설명회에 1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몰려와 벌어진 일로 파악……. 주관사인 알라딘 유통은 안전사고를 우려해 행사를 취소하고 추후 일정을 다시 잡아 행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꽉 막힌 도로를 배경으로, 행사 취소가 아쉽고 다음번에는 반드시 참석하겠다는 학생과 시민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진혁이 핸드폰을 끄고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조금만 무리했으면 행사를 진행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취소하고 바로 여기로 온 겁니다. 내내 찜찜한 게 있었거든요.”
“그게 뭡니까?”
“이제 막 오픈한 쇼핑몰이다 보니 제품이 몇 개 안 됩니다. 전혀 구색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회원들만 밀려오면 뭐 합니까, 살 게 없는데. 그다음은 말씀 안 드려도 잘 아실 겁니다.”
“우리 제품을 팔 수 있게 해 달란 말이오?”
“지금까지는 사전 홍보 없이 대학 강당에서 했습니다. 그런데도 반응이 이 정도입니다. 유니로브 런칭 기념이라고 광고하고 넓은 장소에서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참여하게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그 모습을 보고도 이사회가 반대한다면 주주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이 정도까지 들었는데 이해 못할 메이슨이 아니었다.
이건 대단한 기회였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무조건 받아들여야 할 제안이군요. 내일 당장 양해각서를 체결합시다. 투자가 아니니 이사회도 딴지 걸지는 못할 겁니다.”
“하하하하하. 역시 화끈하십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건 제가 부탁드려야지요.”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내내 긴장한 채 지켜보던 스미스도 미소를 머금었다.
이어진 술자리는 당연히 즐거웠다.
다음 날, 진혁과 메이슨은 유니로브 회장실에서 양해각서와 물품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오늘 메이슨 회장의 기분은 근래 들어 최고조였다.
어제 술자리가 끝나자마자 일이 있다고 급히 떠난 스미스가 약속대로 주식 매입을 하는지, 하락하던 주가가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뿌듯한 마음으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 * *
카이로 돌아오자 뜻밖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영재였다.
태후에서 과장 직함을 달아 보냈다.
“이번에 카이로 지사로 발령받아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기획실의 업무가 바뀌면서 팽 당해 투명인간처럼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곽충호라는 신규 직원도 함께 왔다.
도대체 김선혁 전무가 무슨 생각으로 최영재를 보냈는지 의심스러웠다.
핫산과 차를 마시며 생각하고 있을 때 최영재가 물었다.
“저희 목표는 어떻게 책정됐습니까?”
“없어요. 카이로 지사는 개인 목표를 정하지 않습니다. 지사 목표도 없습니다.”
“예?”
“최 과장님은 곽충호 씨와 한국 관련 업무를 맡아서 처리해 주시면 됩니다.”
“그건 너무…….”
이견을 달려는 최영재의 모습에 진혁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이봐요, 최 과장님. 당신 지금 굉장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예전의 카이로 지사는 없어졌어요. 왜 그렇게 됐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 테고.”
“…….”
“핫산 씨가 지사장입니다. 앞으로는 의견이 있으면 지사장에 이야기하세요. 내 방침이 맘에 안 든다면 언제든지 돌아가도 상관없어요.”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이렇게 모욕을 줬는데도 고개를 팍 숙이며 수긍하는 모습이 더 맘에 안 들었다.
기분을 잡친 진혁이 사장실로 들어서자, 카심이 얼른 달려왔다.
“저 인간이 왜 다시 온 겁니까?”
“저도 궁금합니다.”
“한국의 태후에는 돌대가리만 있나. 관계를 확실히 끊었어야 하는데…….”
“하마드 사장님께 제가 보자고 한다고 하세요.”
계속 투덜거릴 것 같아 카심을 얼른 내보냈다.
자신도 태후 물산과 직접 얽히는 건 싫었다. 하지만 아직 정면 대응하기에는 이르다는 판단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건데, 최영재까지 보내니 짜증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일개 직원 때문에 중요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이제는 핫산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잠시 후 들어온 하마드는 유니로브와의 양해각서와 계약서를 보고 입이 찢어질 정도로 좋아했다.
두 사람은 향후 일정에 대해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 * *
타흐릴 광장으로 속속들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젊은 학생들은 물론 노인과 아이들 손을 잡은 주부의 모습도 보였다.
무바라크의 퇴진을 이끌어낸 ‘백만 인 행진’ 이후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렸다.
경찰들이 아침 일찍부터 나와 교통을 통제하고 질서 유지를 해 주어서 지난번 같은 혼란은 없었다.
대규모 행사에 이집트 국영 TV는 물론 해외 언론까지 취재를 나왔다. 그중에 NS통신도 보였다.
사이트는 유니로브의 제품들로 풍성해져 있었고, 서버도 증설해 접속자 증가에 대비했다.
알쇼핑.
유니로브 런칭 기념 창업 설명회.
초대형 현수막이 걸린 강당에 오른 진혁은 차분하게 ‘슈퍼 트위터’ 사업에 대해 설명을 했다.
특유의 화법으로 이집트 혁명을 ‘트위터 혁명’이라 지칭하며 참석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사은품도 풍성했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 메이슨이 판촉물을 충분히 보내 준 것이다.
그날 저녁, 이집트 국영 TV는 물론 해외 언론에서 해외 토픽으로 이날의 행사를 내보냈다.
다음 날에는 NS통신이 조나단의 칼럼을 게재했다.
유니로브의 역습, 중동 진출의 교두보 확보, 유니로브 CEO 메이슨의 신의 한 수.
알쇼핑의 창업 설명회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게다가 존슨앤존슨의 동남아시아 진출로 위기를 맞은 유니로브가 기습적인 알라딘 유통과의 제휴로 중동에 교두보를 확보하며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켰다.
칼럼에서는 이를 메이슨의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 때문이라고 평했다.
* * *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슈퍼 트위터 신청이 쇄도했고 그에 따라 주문도 꾸준히 늘었다.
한 제품을 100개 이상 한 번에 주문하는 슈퍼 트위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카이로의 거점 상점을 추가 확보하고, 중요 도시인 알렉산드리아, 룩소르, 아스완까지 영역을 넓혔다.
심지어 알트라드의 소개로 시나이 반도에도 알쇼핑의 물건을 받을 상점이 생겼다.
직원들도 크게 늘어 아래층을 임대해 알라딘 유통 전용으로 꾸며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알쇼핑의 성공에 들뜬 직원들과는 달리 진혁은 고심에 빠져 있었다.
유니로브 제품도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운영비만 포함시킨 가격에 판매하다 보니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유니로브만 좋은 일 시키고 있었다.
화장품은 유닉스가 3교대로 생산하고 있지만 물량을 맞추기 힘들어 적극적으로 홍보할 수도 없었다.
우려한 대로 두리식품은 추가 발주를 넣었더니 단가 인상을 요구해서, 팔면 팔수록 손해나는 구조가 되어 버렸다.
상품을 맨 뒤 페이지에 배치해 판매를 최대한 억제하고 있지만, 늘어난 직장 여성들에게 간편식으로 입소문이 퍼져 꾸준히 나가고 있었다.
하마드가 판매 장려금을 인하하자고 했지만 진혁은 단번에 반대했다.
이 일의 핵심은 슈퍼 트위터였다. 어렵다고 처음의 약속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고민만 깊어지고 있을 때 반가운 전화가 걸려 왔다.
세스의 아버지인 마제드 대위였다.
간간히 통화하며 몇 번 가족과 함께 식사도 했었다.
“대위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아버님이 카이로에 오셨는데 뵙자고 하십니다.
“당연히 뵈어야지요. 언제 댁으로 찾아뵈면 됩니까?”
-집이 아니라 퇴근 시간에 맞춰 차를 보내신다고 합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금 이상했지만 진혁은 이내 잊고 업무에 집중했다.
퇴근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오자 셰리피 소장의 부관 나예프 대령이 차를 대기시키고 기다다리고 있었다.
“어디에 계십니까?”
“가 보시면 압니다.”
오늘따라 나예프 대령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느껴졌다.
나일 강변에 위치한 가든 시티로 가서 인터콘티넨털 카이로 세미라미스 호텔에 차가 멈췄다.
나예프는 로비 엘리베이터 앞까지만 안내했다.
“최상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딱딱한 표정의 양복 입은 사내들이 몸수색을 했는데 척 보기에도 군인이었다.
스위트룸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전면의 통유리로 내려다보이는 나일 강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상할 상황이 아니었다.
셰리피 소장이 비슷한 연배의 사내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와서 앉게.”
진혁이 조심스럽게 셰리피 소장 옆에 앉았다.
“인사드리게. 내가 모시는 분이네.”
“처음 뵙겠습니다. 서진혁입니다.”
“압델이네. 요즘 카이로에서 가장 핫한 젊은 사업가라고 해서 보자고 했어.”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혁은 조심스럽게 인사를 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작은 키에 평범한 인상이었다. 다만 중동인 특유의 들어간 눈두덩에 자리한 눈빛만은 심상치가 않았다.
술이 몇 순배 돌 동안 압델은 셰리피와만 이야기를 나눠, 진혁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 있어야 했다.
지루함에 어두워진 나일 강의 야경을 감상하다 눈을 돌리는 순간 압델의 시선과 딱 마주쳤다.
“요즘 하는 사업은 잘되는가?”
“아, 예. 덕분에 잘되고 있습니다.”
“셰리피 말대로 예의가 바른 청년이군. 타흐릴 광장까지 열어 줬는데 안 된다면 사업가를 그만둬야지.”
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바로 했다.
행사 신청을 할 때 지난번 일도 있고 해서 경찰이 타흐릴 광장을 개방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외곽의 람세스 광장을 알아봤었다.
그런데 행사를 허가해 준 것은 물론 경찰 병력까지 보내 도와준 것은 의외였다.
그런데 느낌에 뒤에 압델이 있는 것 같았다.
셰리피가 말했다.
“국방부 정보국장님이시네. 최고군사위원회(SCAF) 위원이시기도 하고.”
진혁의 표정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축출된 뒤 다음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최고군사위원회가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었다.
압델이 표정 없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라면서 셰리피의 카이로 입성을 막은 사람치고는 너무 놀라는군.”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가볍게 술 한잔하자고 부른 거야. 편히 있어.”
그 말에 곧이곧대로 편하게 있을 사람은 없었다.
“이번 하원 선거를 어떻게 예상하는가?”
“…….”
진혁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이집트에서 가장 큰 이슈는 며칠 앞으로 다가온 하원 선거였다.
이집트의 총선거는 특이하게 지역별로 나누어 3차에 걸쳐 진행된다.
무슬림 형제단의 ‘자유정의당’ 압승은 해외 언론까지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얼마나 획득하는지가 관심사였다.
그건 여당인 국민민주당이 패배한다는 의미였다.
압델이 셰리피가 따라 준 술잔을 비웠다.
“무바라크의 그림자를 지우지도 못하고 무슬림 형제단의 정치 놀음에 당했으니 선거에 이기기를 바라는 게 무리겠지. 그런데 말이야. 자넨 그걸 반년 전에 알고 셰리피에게 경고를 했다는 거야. 어떻게 알았나?”
“……”
“말씀드리게.”
진혁이 계속 침묵하자 셰리피까지 나서서 재촉했다.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는 분위기였다
“지금은 바빠서 뜸하지만 매일 저녁 카릴리 시장을 돌면서 영업을 했었습니다. 상인들로부터 전해들은 시민들의 불만이 상당했습니다.”
“먹고살기 힘드니 그럴 수밖에 없지. 굶어 죽겠는데 무바라크면 어떻고, 무슬림 형제단이면 어떻겠어. 빵만 준다면 이스라엘 놈들에게도 고개를 숙일 거야.”
“국장님!”
“자네도 사태를 똑바로 직시해야 해. 경제 문제를 풀지 못하면 시민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어.”
셰리피에게 호통 치는 압델의 모습에서 진혁은 그의 상황 판단이 남다름을 느꼈다.
맞는 이야기였다.
이집트는 계속된 시위로 관광 수입이 줄고 있는데도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보조금을 오히려 늘렸다. 그 바람에 중앙은행의 외환 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이었다.
급히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한 게 지난 5월. 그런데 IMF에서는 아직 아무런 답변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 등 인근 중동 국가들에게 구걸을 하며 버티고 있는 실정이라, 떠난 민심을 잡기 위해 생필품을 수입해 공급하려고 해도 대금을 지급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다들 고생하고 있으니 조만간 외부에서 돈을 들여올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나아질 겁니다.”
“동부에 처박혀 있더니 감각이 많이 무뎌졌어, 셰리피. 그자들이 시민을 위해 돈을 들여오려는 게 아니야. 자신들이 관리하는 회사의 보조금이 떨어질까 봐 그런 거지.”
“취하신 것 같습니다, 국장님. 이만 미스터 서를 돌려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셰리피가 진혁을 내보내려 했다. 압델의 발언이 남 앞에서 할 수준을 넘어섰다.
하지만 압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