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68화 (68/307)

68화. SEZ, 특별 경제 구역

이집트는 GDP의 40%를 ‘회색 경제’가 차지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군사 독재가 이루어진 나라라 군부의 힘은 막강했다.

총 예산의 5%밖에 안 되는 국방 예산 부족분을 충당하기 위해 군부의 영리 활동을 용인한 게 문제가 됐다.

무기와 차량은 물론 생수나 구두약까지 군부가 관여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각종 보조금과 세제 혜택까지 받고 있으니 그야말로 돈을 갈고리로 긁었다. 그게 자신들 권력 유지의 원천이니 군 수뇌부가 그걸 오히려 방조하는 판이었다.

압델은 그런 군 내부의 민감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셰리피에게 압델이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이런 사정을 사업가인 미스터 서가 모른다고 생각하나? 시민들도 트위터를 통해 다 아는 사실을 우리만 감추려고 하고 있어. 내 앞에서는 벌거숭이 임금님 흉내는 그만 내도 돼.”

“……!”

셰리피도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시민들이 군부의 추악한 치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압델이 진혁에게 다시 물었다.

“미스터 서, SEZ라고 들어 봤나?”

“죄송합니다. 처음 듣습니다. 알려 주시면 경청하겠습니다.”

압델의 눈짓에 셰리피가 설명을 해줬다.

SEZ(Special Economic Zone), 특별 경제 구역은 중국의 저우추취(走出去, Go Global) 전략의 일환으로 2002년에 수에즈 운하와 가까운 아인 소크나 항구 인근에 조성된 공단이었다.

“초기 지구 1.34제곱 킬로는 약속대로 중국 정부가 1억 달러를 투자하고 중국 선도 기업이 입주해 완료가 되었네. 문제는 확장 지구인데, 공단 조정은 완료돼 일부 기업들은 들어왔지만 현재는 중단된 상태야.”

진혁은 그 이유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일단 듣기만 했다.

“우리나라의 불안정한 정국 때문에 입주를 기피하고 있는 모양이야. 이미 입주한 중국의 일부 기업도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네.”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중국의 저우추취 전략은 이집트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 19개국에 SEZ와 같은 공단이 있었다. 그런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집트에 투자할 이유가 없었다.

“중국 정부에 항의했지만 기업의 경영에 관여할 수 없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고 있네.”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무시하는 것이지. 최고군사위원회가 이 문제를 내게 떠넘겼어. 중국 놈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어 SEZ의 규약을 변경하고 인센티브를 높여 다른 나라 기업들도 받기로 했네.”

엡델이 마침내 오늘 진혁을 부른 이유를 내놓았다.

“자네가 얼마 전에 영국으로 건너가 유니로브의 메이슨 회장을 만나고 온 것을 알아.”

“……!”

“오해는 말게. 정보국이 자네 같은 일개 사업가를 감시할 만큼 한가하지 않아. SEZ에 활성화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때 알쇼핑의 창업 설명회 TV 광고를 보고 알아본 거야.”

진혁은 수긍했다.

워낙 크게 때린 광고라 TV 시청이 가능한 사람들 중에 그 광고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역시 모든 일에는 대가가 필요했다.

“유니로브의 공장 유치를 원하십니까?”

“역시 눈치가 빠르군. 자네가 숨통을 터 줬으니 이사회가 무조건 막지는 못할 것 아닌가?”

“물론 그렇지만 그게 꼭 이집트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먼저 향상된 인센티브 조건을 알고 싶습니다.”

압델이 들려준 내용은 기존에 비해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다.

부지 임대료는 당연히 없었다. 법인세도 매출 기준이 아니라 이윤의 10%로 낮아졌으며, 그마저도 10년간 면제였다.

자국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생산품의 최소 50%는 수출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도 협의 후 조정이 가능케 했다.

가장 매력적인 건, 외국 기업들의 투자 확대에 장애물로 작용해 온 ‘현지 부품 의무 조달 규정’을 적용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상당히 진전된 안임에는 틀림없지만 임팩트가 부족합니다.”

“값싼 인건비에 풍부한 노동력, 수에즈 운하가 지척인 입지 조건에 이런 인센티브로도 부족하다는 말인가?”

“그 판단은 기업이 하는 겁니다. 이 조건에도 중국 기업이 떠나려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음, 그게 뭐라고 생각하나?”

“예전에는 해외 투자 결정 시 인건비가 최우선 고려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이나 동남아가 주목받았던 거고요. 하지만 지금은 인건비와 세제 혜택은 물론, 기업 이미지, 운송비, 근로자 숙련도, 정치 리스크 등 다양한 경영 환경을 고려해 최선을 찾아 옮겨 다니고 있습니다. 이를 리로컬라이제이션(Relocalisation), 공장 재이전이라고 부릅니다.”

이미 준비라도 한 듯 거침없이 답변하는 진혁의 태도에 압델이 주저하지 않고 물었다.

“뭐가 더 필요할 것 같은가?”

“인건비와 세제 혜택은 충분합니다. 기업 이미지는 생각하기 나름이니 고려 대상이 아니고, 운송비 부분은 수에즈 운하로 해결됩니다. 근로자 숙련도는 대학 졸업 이상이니 문제 될 게 없습니다. 문제는 정치 리스크입니다. 현재 이집트의 경우는 거기에 더해 치안 불안이 최고의 난제입니다.”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그건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야.”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이집트를 지배하는 세력은 군부라는 것을 다 압니다. 입주 기업이 자체적인 경비는 하겠지만, 군이 외곽을 한 번 더 지켜 준다면 충분히 신뢰를 줄 수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충분히 가능한 조건이었다.

“그건 걱정 말게. 남는 게 군인이니 한 개 대대로 공단을 지키게 해 주지. 그럼 된 건가?”

“아닙니다. 이제 겨우 다른 나라와 조건이 같아진 것뿐입니다. 확실히 끌어올 미끼가 필요합니다.”

“뭘 내놓으면 되겠나?”

“투자 결정 시 제일의 관심사는 역시 돈입니다.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이 벌 수 있느냐입니다. 위험, 여건, 혜택, 이건 그다음 고려 대상이지, 최우선은 아닙니다. 장기적으로는 얼마든지 장밋빛 전망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기적으로 손익분기점까지 얼마나 빨리 도달할 수 있냐가 투자 결정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이번에도 압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결국 돈 벌려고 하는 일이니. 하지만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잖나?”

“물론 기업이 노력해야지요. 하지만 정부에서 일부 부담을 덜어 줄 수도 있습니다. 미끼로 말입니다.”

“어떻게 말인가?”

“유니로브가 이곳에 짓는 공장은 생활용품을 생산하게 될 겁니다. 그걸 군에서 일정량 구매해 주시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이미 납품하고 있는 곳들이 있는데. 반발이 심할 거야.”

“계속 구매해 달라는 게 아니라 손익분기점을 맞출 때까지만 한시적인 조항입니다. 그마저도 양보하지 않겠다면 저도 답이 없습니다.”

진혁이 냉정히 선을 그었다.

‘회색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최고군사위원회였다. 조금 양보하고 그 자리를 유지하든지, 아니면 공멸하든지 선택해야 할 상황이었다.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뻔했다.

예상대로 잠깐 고민하던 압델이 눈빛을 굳히며 물었다.

“그 조건을 수용하면 유니로브의 공장을 유치할 수 있겠나?”

“확신은 못 합니다. 하지만 메이슨 회장님이라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으실 겁니다.”

“좋아. 결정되는 대로 바로 연락하지.”

“마지막으로 SEZ의 활성화를 위해 한 가지 더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야기해 보게.”

자신을 위한 일이라 바로 압델이 반색했다.

“이집트에서 사업 진행을 위해서는 78개에 달하는 관련 기관의 인허가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니 투자를 결정해도 사업이 언제 진행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투자청 내에 원스톱 서비스 센터를 설치해 운영해 주셨으면 합니다.”

“원스톱 서비스 센터?”

“쉽게 말해서 사업에 필요한 각종 인허가 절차를 지원해 주는 곳입니다. 투자청, 실질적으로는 최고군사위원회의 일이라면 공무원들도 미적거리지 못할 겁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당장 만들도록 지시하겠네.”

“의견을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내 고민을 해결해 주는 일이니 내가 고마워해야지. 앞으로도 가끔 보면서 좋은 생각을 나누도록 하세. 지금은 해결해야 할 일이 많으니 일단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압델이 자리를 서둘러 정리하려는 모습에 진혁은 일어나 인사를 하고 나왔다. 로비로 내려가자 나예프 대령이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 근처의 숙소까지 타고 오는 중에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오늘 압델과 나눈 대화는 밖으로 내뱉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 * *

압델로부터 연락은 예상대로 1차 자유 총선의 결과가 나온 후였다.

구세력이 기득권을 내려놓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1차 투표 결과 무슬림 형제단의 자유정의당이 43%의 득표율을 얻어 압승을 거두었다.

그 모습에 놀란 최고군사위원회가 압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날, 셰라피 소장으로부터 보안 폰을 통해 진혁에게 전화가 한 통 왔다.

“언제 밥이나 함께하세. 날짜는 알아서 정하게. 다만 너무 늦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진혁은 그 전화를 끊고 나서 영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합니다. 언제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로부터 보름 후, 수에즈 특별 경제 구역 내 투자청에서 유니로브의 공장 설립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부지 52만 제곱미터 규모로 유니로브가 2억 달러를 투자해 생활용품 제조 공장을 짓는 대신 이집트 정부는 각종 혜택을 지원하기로 했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다른 기업의 유치를 받아들이려는 압델의 전략이었다.

물론 일정 기간 군에서 제품을 구매해 준다는 이면 계약은 발표하지 않았다.

진혁은 그 소식을 한국에서 들었다.

메이슨 회장과 셰리피 소장이 참석을 부탁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었다.

강릉에 도착하자 멋지게 지어진 건물이 반겼다.

두 동의 현대식 창고와 한 채의 한옥이었다.

우리씨엔티 사장님이 약속대로 신경을 많이 쓴 듯, 겉모양만 봐서는 전혀 창고 같지 않았다.

희준도 틈틈이 내려와서 일을 도왔다고 했다.

한옥은 아버지 서명수가 퇴직금을 전부 투자해 유명 목수를 초빙해 지은 살림집이었다.

한옥으로 지어 놓으면 할아버지가 한 번이라도 더 오실지도 모른다는 바람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진혁은 도착하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김순근 과장과 함께 간이 천막을 세웠다.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하고 나니 온 몸이 땀범벅이었다.

내일 개소식 행사 준비였다.

“아버지는 그냥 출장 뷔페를 부르시지. 촌스럽게 이게 뭐야?”

“큰 사장님이 손님 대접은 정성이라고 하셨답니다. 만두는 여기서 만들고 아바이순대는 내일 속초에서 오실 때 가져오신답니다.”

할아버지의 엄명이라니 아버지도 어쩔 수 없으셨던 모양이었다.

바깥일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서도 쉬지 못했다.

속초에서 건너온 아주머니들이 거실을 점령하고 평양만두를 만들고 계셨다.

결국 허리가 뻐근할 때까지 만두피를 날라야 했다.

아버지까지 만두를 빚고 계시니 빠지지도 못했다.

다음 날, 김지민이 새벽같이 도착했다.

아침 첫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인사할 겨를도 없이 바로 앞치마부터 두르고 일을 하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어머니와도 살갑게 이야기하며 죽이 맞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혁이 김지민이 없을 때 슬쩍 물어봤다.

“김지민 씨는 서울 교육 때 잠깐 봤을 텐데, 언제 그렇게 친해졌대요?”

“넌 이집트에 있어서 모르는구나. 주말마다 내려와서 포스 사용법은 물론 제품 진열 방법까지 세세하게 가르쳐 줬어. 나나 연희가 어디 이런 경험이 있어야지. 어떤 때는 집에서 자고 일요일까지 도와준 적도 있고.”

“그래요? 한 선배도 직원 엄청 부려먹나 보네요. 휴일에도 대리점 관리까지 하라고 하네.”

“그게 아니야. 내가 한 팀장님께 너무 고맙다고 전화를 드렸는데, 오히려 정말이냐고 묻는 걸 보니 모르시는 것 같더라.”

“한 선배가 시킨 일이 아니라고요?”

진혁이 놀라 물었다.

“그래. 그냥 자기가 마음이 쓰여서 온 거라더라. 아무튼 애가 어른들 공경할 줄 알고 싹싹한 데다 손까지 빠른 게, 누구 집 딸인지 몰라도 참 잘 키웠더라. 딸 삼고 싶더라니까.”

일하는 아주머니가 부르는 바람에 대화가 끊겼다.

그 이후로 손님맞이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작은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오면서 새벽에 찐 아바이순대도 함께 가져왔는데 엄청 많았다.

여기저기서 보낸 화환들과 함께 떡도 도착해 테이블을 세팅하고 나서 조금 쉬고 있자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다. 주변 가게 사장님들이라고 했다.

속초에서 버스까지 대절해 고향 분들이 도착하자 바빠지기 시작했다.

희준이 회사 동기들을 끌고 왔는데 인사할 시간도 없었다.

발에 땀나게 뛰어다니던 진혁이 시계를 보고 손님을 접대하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곧 있으면 점심시간인데 그 전에 개소식 행사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 팀장이 거의 도착했다고 조금 기다리라고 하더라. 높은 사람하고 같이 온다고 그때 하자더라.”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고급 승용차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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