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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69화 (69/307)

69화. 고래표 통조림

한지철이 운전석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 주자 내린 사람은 놀랍게도 정인영이었다.

진혁이 얼른 달려갔다.

“인영 씨가 총판 개소식까지 참석하러 다닙니까?”

“여긴 진혁 씨 아버님이 운영하는 총판이잖아요. 당연히 와야죠.”

그렇지 않아도 눈에 확 띄는 외모에 화려한 정장까지 차려입으니 모두의 시선이 쏠린 것은 당연했다.

아버지, 어머니와 차례로 인사를 나눈 정인영이 자리에 앉자 개소식 행사가 진행됐다.

사회는 희준이 봤다. 재치 입는 입담에 행사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돼지 머리에 절을 하고 나자 정인영과 태후 패션 직원들이 차례로 절을 하며 돼지 입에 봉투를 물려 줬다.

손님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손이 부족했다.

허겁지겁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진혁의 모습을 보고 인영이 일어났다.

한지철이 물었다.

“서울로 돌아가시게요?”

“아니요. 앞치마 좀 구해다 주세요.”

“앞치마를요?”

“빨리요.”

한지철이 급히 김지민에게 말해 앞치마를 가져오자, 정인영이 허리에 두르고 음식을 날랐다.

놀란 아버지가 달려와 말렸지만 그녀는 괜찮다며 사양하고 계속 일을 했다.

정인영이 그러니 직원들이 그냥 앉아서 받아먹기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도 일을 거들었다.

사람 손이 무섭다고, 모두가 달려들자 그 많던 설거지거리도 금방 없어졌다.

정인영은 그렇게 두 시간이나 더 일해 주고 서울서 보자며 돌아갔다.

저녁 때 오는 손님치레까지 하고 나니 11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할아버지께 주무시고 가시라고 했는데, 큰일 치렀으니 편히 쉬라며 작은아버지를 따라 속초로 가셨다.

온몸 뼈마디가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절로 앓은 소리가 났다.

“아이고, 힘들어.”

“젊은 놈이 엄살은.”

“아버지는 그냥 앉아서 술만 드셨잖아요.”

“그럼 네가 술 먹고 아비가 일하리?”

“그건 아니지만……. 엄만 안 힘들어요?”

말에 밀린 진혁이 얼른 어머니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힘들지. 나야 아는 손님 오면 잠깐씩이라도 쉬었지만, 희준이랑 지민이는 새벽같이 와서 한 번도 못 쉬고 일했는데 그냥 보낸 게 영 마음에 걸린다.”

“내일 아침에 일이 있어서 가야 한다고 했잖아요?”

“으이구, 눈치 없는 놈. 네가 와서 잘 방이 마땅찮으니까 간 거지. 어쩜 그런 건 네 아버지를 꼭 빼닮았니.”

“어허. 왜 가만있는 나는 또 걸고 넘어가? 암튼 그 아이들이 여러모로 고생하며 많이 도와줬다. 서울 가면 꼭 인사를 해라.”

진혁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옆에서 결산을 하던 연희가 봉투 하나를 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어머. 이게 얼마야?”

“대체 뭔데 그러냐?”

“백만 원짜리가 열 장이나 들어 있어요.”

“누가 그렇게 큰돈을 넣었다니?”

“가만있어 보세요. 태후패션 정인영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한 선배가 모시고 온 정인영 본부장이 낸 거네요. 받아도 되는 돈이니 부담 갖지 마세요.”

진혁의 말에도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건 그냥 받기에는 너무 큰돈이다. 나중에 서울 가면 찾아뵙고 돌려드려야겠다.”

“괜찮아요. 낼 만하니까 낸 거예요.”

“낼 만하다니. 우리가 모르는 무슨 이유가 있냐?”

“그게…… 그러니까, 인영 씨가 회장님 손녀딸이거든요.”

스페이스 워커의 탄생과 성공이 자신이 알려 준 것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어 변명을 했는데, 그게 오히려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뭐? 태후 그룹 정 회장님 손녀딸이라고?”

“어머, 어머. 그 언니가 드라마에서 나오는 재벌가의 공주란 말이야?”

“아이고, 이걸 어째. 그런 귀한 분을 앞치마 두르고 일하게 했으니.”

더 있다가는 질문 공세에 시달려 밤을 새울 것 같다는 공포감에 진혁이 벌떡 일어났다.

“저 먼저 씻고 잡니다.”

“진혁아!”

“오빠!”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얼른 화장실로 도망쳤다.

다음 날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들방에서 등 지지면서 푹 쉬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 * *

진혁은 카심과 마르와를 만났다.

‘슈퍼 트위터’로 활동해서인지 마르와의 외모가 많이 화려해져 있었다.

히잡이 가리고 있지만 오히려 그게 더 이국적으로 보이는지, 지나가는 남성들의 시선이 한두 번은 스쳤다.

진혁이 그녀에게 가져간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네가 올린 트위터를 보고 물건을 구매한 것에 대한 누적 판매 장려금.”

신기하다는 듯 봉투를 열어 본 마르와의 눈이 동그래졌다.

“헉! 이게 얼마예요?”

“만 달러.”

마르와의 실적은 독보적이었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이유가 컸지만, 아무래도 한국의 자유분방한 문화를 직접 접하다 보니 화장법이 세련된 탓도 컸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집트에서는 고소득자에 속하지만 주급이 200달러에 불과했다. 그의 일 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진혁이 물었다.

“내년에 졸업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직 고민 중이에요.”

“난 네가 이집트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널 이집트 최고의 트위터 스타로 만들어 줄게.”

“정말요?”

“조만간 스스로 그걸 느낄 때가 있을 거야. 아직 시간이 있으니 고민해 봐라.”

진혁은 무조건 밀어붙이지 않았다. 스스로 결정하는 것과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세 사람은 진혁이 렌트한 차를 타고 춘천으로 향했다.

가는 중에 마르와가 말했다.

“클래스메이트 중에 인도네시아에서 온 친구가 있는데, 거기서도 우리 화장품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대요. 걔네 아버지가 유통업을 하시는데 원하면 도움을 줄 수 있대요.”

“나도 생각은 하고 있는데, 일단 알쇼핑부터 안정화시킨 다음에. 내가 알아보라는 것은 어떻게 됐어?”

“색조 화장품 다음으로는 기능성 스킨케어의 선호도가 가장 높았어요. 이집트는 사막 기후라 덥고 건조하고 실내외 공기 차가 심하잖아요. 보습과 진정 작용이 추가된 제품과 강한 자외선으로 인한 피부 손상도 심한 편이라, 노화 방지와 잡티 제거 기능을 갖춘 제품이 유망할 것 같아요.”

진혁은 한국에 오기 전에 마르와에게 모스크를 방문하는 무슬림 여성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하게 했다.

지금 그 결과를 보고 받고 있었다.

이후 마르와는 현재 한국에서 판매되는 제품들의 장단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스킨, 로션, 에센스, 크림별로 가장 적합한 제품을 선정해 들려줬다.

심지어 마스크 팩에 대해서도 조사해 들려줬다.

남자인 진혁으로는 반도 알아듣기 힘든 내용들이었다.

뒷자리의 카심은 아예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유닉스에 도착해 송승용을 만났는데 그새 얼굴이 까칠해져 있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서 사장 때문 아닙니까. 주문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밀어 넣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럼 줄일까요?”

“그건 또 아니죠.”

즐거운 농담이었다. 제조업체 사장 입장에서 몸은 힘들어도 이럴 때가 가장 기분이 좋은 시절이었다.

즐거운 기분으로 시작된 회의는 마르와가 그간 조사한 것을 이야기하자 무거워졌다.

“기능성 스킨케어 제품을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쉽지 않아요.”

“예? 제가 알기로는 유닉스에서도 생산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생산은 할 수 있어요. 문제는 공장의 생산 여력이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도 3교대로 돌리고 있어요.”

유닉스의 생산 능력을 확인하지 못한 실수를 저질렀다.

“공장을 추가로 확보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작년에 중국 칭다오에 공장을 세우려고 했었소. 땅도 알아보고 기계부터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갑자기 중국 정부가 최저 임금을 20%도 넘게 올린다고 발표하는 바람에 포기했소. 이미 중국에 나가 있는 사장들이 자기들도 동남아로 갈 생각이라며 오지 말라고 말립디다.”

그간 싼 임금을 무기로 세계의 공장을 빨아들였던 중국이 이때부터 본격적인 임금 인상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송승용에게는 다행이지만 진혁에게는 악재였다.

“한국의 공장을 증설하는 것은 어떠십니까?”

“지금의 가격으로는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가격을 올리면 경쟁력이 떨어져 거래처들이 공장을 바꿀 겁니다.”

“…….”

“나도 아쉽지만 현재 내 능력으로는 더 이상은 무리요. 원한다면 다른 곳을 소개시켜 주겠소.”

송승용은 도전보다는 안전을 택했다.

억지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었다. 고민하던 진혁이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중국에 세우시려고 했던 공장, 이집트에서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이집트요?”

“거긴 인건비가 엄청 쌉니다. 해외 투자 기업 유치에 적극적이라 혜택도 상당하고요. 자금이 부족하면 저도 투자하겠습니다.”

“자금도 자금이지만, 내 건강이 좋지 않아요. 의사가 무리하면 안 된다고 해서 집에서는 지금 하는 사업도 접으라고 하고 있어요.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오.”

송승용으로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모습에 진혁은 더 이상 자신의 생각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업체를 소개받아 생산하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럼 제가 자금과 운영을 맡고 유닉스는 기술을 제공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공인 기관으로부터 평가를 받아, 해당되는 만큼의 지분을 드리겠습니다.”

“난 내 기술을 팔고 싶은 생각이 없소.”

“사장님이 평생에 걸쳐 어렵게 쌓은 기술입니다. 이대로 사장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사장님을 위해서도 세상에 당당하게 선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승용의 마음이 흔들렸다.

기술 이전을 주저한 것은 자신의 땀과 열정으로 만든 분신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혁의 말을 듣고 보니 그의 말도 맞았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 그들이 꽃도 피우지 못하고 사라지게 하는 것도 옳지 않았다.

그동안 지켜본 진혁이라면 자신의 분신을 세상에 멋지게 내보일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좋소. 서 사장을 믿고 하겠소. 그렇게 합시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진혁도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알라딘 컴퍼니와 유닉스 간의 기술 이전에 따른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송승용이 한국기업기술가치평가원에 기술 평가를 신청하기로 하고, 세 사람은 산청으로 향했다.

두리식품과의 이야기는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가격을 낮출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크기를 다양화해 줄 수 있냐는 말에, 자신들이 보유한 크기에 맞춘다면 고려해 보겠다며 확답을 주지 않았다.

별도의 제작을 원하면 금형부터 제반 비용을 모두 부담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참고 잘 부탁한다며 인사까지 하고 나왔다.

카심과 마르와도 화가 났지만 진혁의 얼굴이 너무 굳어 있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진혁은 마르와에게 양해를 구해 터미널로 가서 그녀를 먼저 서울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그와 카심은 부산으로 가서 해운대 근처의 호텔에 방을 잡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박이동이 객실로 찾아왔다.

서울 모스크 근처의 빌라를 관리하고 있어 카심과도 안면이 있었다.

그가 찾아온 것은 진혁이 미리 부탁해 놓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회사는 수산물 유통업을 하는 이병진이란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는데, 숨어 지낸다고 합니다.”

“공장 상황은 어떻습니까?”

“공장 가동은 중단되어 있고, 직원들이 밀린 두 달치 임금과 퇴직금을 요구하며 점거하고 있답니다.”

“우리나라 통조림업계 1위였던 기업이 어떻게 하다 그 지경까지 간 거랍니까?”

고래표 통조림은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제품이었다.

고래표 통조림을 생산하는 주식회사 동성은 60년대 한국종합식품으로 출발해 꽁치 통조림과 복숭아 통조림으로 유명해졌다.

경영 악화로 대그룹에 인수됐지만, 외환 위기로 모 그룹이 부도나면서 결국 함께 최종 부도처리 됐다.

그 후 경매로 나온 것을 이병진이 낙찰을 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이병진은 회사를 살리려고 낙찰받은 게 아니었습니다. 상표권 때문이었습니다.”

회사를 낙찰받자마자 이병진은 여러 업체가 고래 상표를 무단 사용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는데 얼마 전 패소하고 말았다.

부도나기 직전 사주가 상표권을 몰래 판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애초부터 상표권을 이용해 회사를 비싼 값에 넘기려던 위인이라, 패소하자마자 잠수를 탄 겁니다. 그 와중에 죽어나는 것은 직원들과 납품업체들입니다.”

“판결문을 봅시다.”

진혁은 마르와와 별도로 박이동에게도 일을 시켰다.

두리식품의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동성에 대해 조사하게 해 두었던 것이다.

“흠…….”

판결문을 확인한 진혁의 눈이 반짝였다.

특허권이 취소된 품목에 수산물이 들어 있는 게 아쉬웠지만, 다행히 원하는 품목은 빠져 있었다.

“이병진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범어동 원룸에 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조심성이 많은지 계속 숨바꼭질만 하다가, 사장님이 이집트로 돌아가신다고 했더니 겨우 만나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가 보시게요?”

“아닙니다. 그 전에 먼저 가 볼 곳이 있습니다.”

진혁이 서두르는 모습에 박이동과 카심도 빠르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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