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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70화 (70/307)

70화. 사기꾼 발라먹기

과메기로 유명한 구룡포로 가자 동성의 통조림 공장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한때 이곳 주민들을 먹여 살렸던 큰 공장이었지만, 그동안 전혀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흉물스럽게 변해 있었다.

정문은 굳게 닫힌 채 붉은 머리띠를 한 중년인이 지키고 있었다.

묻는 말이 곱지 않았다.

“어떻게 왔수?”

“책임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이병진이 보내서 온 놈이군. 썩 꺼져라!”

“말씀 조심하십시오. 이분은 회사를 인수해서 살리려고 오신 분입니다.”

박이동이 참지 못하고 나서서 한 말에 사내가 움찔했다.

“그 문제로 책임자와 상의하고 싶습니다.”

“잠깐 기다려 보슈.”

사내가 어디론가 서둘러 전화하더니 쪽문을 열어 줬다.

현관으로 들어가자 30여 명의 직원들이 모여 있었는데 시선이 곱지 않았다.

진혁은 개의치 않고 뒤편에 문이 열려 있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양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는 일어난 반면, 작업복 차림의 초로의 노인은 싸늘한 시선을 한 채 앉아 있었다.

정중히 인사를 했다.

“서진혁이라고 합니다. 회사 인수를 결정하기 전에 직원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 왔습니다.”

“영업 이사를 맡고 있는 김상조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권기남 공장장님이십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진혁이 자리에 앉자 권기남이 바로 물었다.

“만신창이 되어 껍데기만 남은 회사를 인수해서 뭐 할기가?”

“당연히 정상적으로 운영되게 해 예전의 명성을 되찾게 해야지요.”

“이병진이도 처음에는 그렇게 말했어. 간나 새끼. 너도 그놈이랑 똑같아.”

“그때는 상표권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아니지, 바짝 독이 오른 여러분들이 있군요.”

권기남이 노려봤지만 진혁은 이미 김상조에게 시선을 돌린 다음이었다.

“직원들의 요구 조건이 뭡니까?”

“밀린 임금과 퇴직금, 그리고 보상을 요구합니다.”

“보상이라니요?”

“당장 일자리를 잃을 텐데,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동안 먹고는 살아야지 않겠습니까?”

“그런 보상금을 지급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아무튼 밀린 임금과 퇴직금은 얼마나 됩니까?”

“세 달치 임금에 퇴직금을 합치면 5억 정도 됩니다.”

이병진은 임금이 두 달 밀렸다고 했는데 세 달이었다.

“협력 업체에 밀린 외상값은 또 얼마입니까?”

“4억 원 가량될 겁니다.”

“생각보다 많지 않네요.”

“생산하는 물량이 적어서 그렇습니다. 소문이 좋지 않아 외상도 거의 주지 않았고요.”

진혁이 조용히 두 사람을 바라봤다.

박이동의 보고대로라면 동성의 핵심은 바로 눈앞의 두 사람이었다.

김상조는 1985년 한국종합식품에 입사해 지금까지 동성 통조림을 지키고 있었다.

권기남은 김상조보다 더해 1968년 이 공장이 설립될 때 꼬마로 들어왔으니 평생을 이 공장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혁이 침묵하자 김상조는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뿐만 아니라 밖에서 문에 귀를 붙이고 있는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도망간 이병진을 어렵게 잡아도 이미 가산을 탕진해 갚을 능력도 없었다. 공장을 팔아도 은행 빚을 갚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거기에 협력 업체에 밀린 대금까지 감안하면 자신들이 돈을 받아 낼 방법은 전무했기에 이렇게 띠를 두르고 공장을 점거하고 있었다.

희망은 진혁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인수하지요.”

“와!”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만세를 불렀던 김상조는 슬그머니 손을 내려야 했다.

“첫째. 밖에 있는 직원분들이 한 명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지, 직원들까지 모두 받아들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직원이 없는데 공장을 어떻게 돌립니까? 김 이사님이 책임지고 직원들을 붙잡으십시오.”

“알겠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부탁하고 싶은 일이었다.

“공장장님도 약속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소.”

권기남이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반말은 아니었다.

“이집트로 가 주셔야겠습니다.”

“이…… 뭐?”

“이집트라고, 사막에 있는 나라입니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유명하다고 TV에도 나오잖아요.”

김상조가 얼른 설명해 주자, 권기남이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거기 복면 쓴 놈들이 납치해서 돈 내라 하고 안 되면 막 사람 죽이는 곳이잖아. 내래 인질로 잡아가겠다는 기가?”

카심이 참지 못하고 나무랐다.

“아저씨, 어디서 되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나 본데, 난 한국이 더 이상해. 거기서는 여기 사장 같은 놈은 잡아다가 손목이나 발목으로 죗값을 치르게 해. 그런데 여긴 이렇게 대책 없이 죽치고 앉아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하잖아. 미스터 서니까 당신들 돈 다 돌려주겠다고 하는 거야.”

찔끔한 권기남이 아무 말도 못 하자 김상조가 대신했다.

“공장장님을 왜 이집트로 데려가시려고 합니까?”

“이집트에 통조림 공장을 세울 겁니다. 공장장님이 봐주셔야지요.”

“그럼 이곳은 폐쇄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여긴 수산물을 맡고, 이집트는 콩 통조림을 생산할 겁니다. 이 제품입니다.”

진혁이 가방에서 두리식품에서 만든 통조림을 꺼내 내밀자, 권기남이 재빨리 낚아채더니 따서 맛을 봤다.

숟가락도 필요 없이 직접 손으로 집으며 촉감을 느꼈다.

이리저리 입 안에 굴리고 조금씩 씹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진혁이 물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이 정도는 일도 아니니 걱정 마시오. 대신 약속은 지켜야 하오. 이 공장이랑 식구들을 지키겠다는 약속 말이오.”

“그건 직접 보여 드리겠습니다.”

한동안 이야기를 나눈 진혁은 부산으로 돌아왔다.

해가 져 날이 어두워지자 자갈치 시장 뒷골목에 위치한 허름한 횟집으로 들어갔다.

박이동과 함께 들어서자 50대 초반의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병진입니다.”

“전화드렸던 박이동입니다. 이쪽은 회사를 인수하실 서진혁 사장님입니다.”

“서진혁입니다.”

“생각보다 젊군요. 운이 좋은 줄 아시오. 내가 사정이 급하지만 않았으면 절대 안 파는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고래표 통조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이병진이 자리에 앉자마자 여지없이 사기꾼 기질을 드러냈다.

진혁이 이집트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 사정을 모르는 멍청이라고 생각해 구라를 치고 있었다.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회사를 넘기시겠습니까?”

“12억은 받아야겠소.”

“전화로 11억에 넘긴다고 했잖소!”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낮게 부른 것 같아…….”

“박 선생님, 일어납시다.”

진혁이 말을 끊고 일어나려 하자 이병진이 급히 말렸다.

“젊은 사람이라 성질이 급하네. 알았소. 약속대로 11억에 팔리다.”

“10억입니다.”

진혁이 가져간 하드 케이스를 열어 보여 주자 100만 원짜리 자기앞 수표 열 뭉치가 들어 있었다.

“이건 약속하고 다르지 않소?”

“생각해 보니 제가 급한 마음에 너무 높게 부른 것 같아서요.”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모습에 얼굴이 벌게진 이병진이 말을 못 하자, 진혁이 가방을 다시 닫았다.

“생각이 없으신 것 같으니 일어나겠습니다. 비행기 탈 시간이 되어서요.”

“잠깐!”

이병진이 얼른 가방을 잡았다.

마지막 기회였다.

진혁이 지금은 기고만장하지만 공장에 가 보면 자신이 얼마나 골치 아픈 짐을 떠안았는지 알게 될 거다.

“좋네. 10억에 넘기지.”

이후 일은 박이동이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계약서에 서로 사인을 한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이병진, 이놈!”

권기남이 맨 앞에서 뛰어 들어와 멱살을 잡자마자 따귀를 사정없이 때렸다.

쫙, 짝!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병진의 얼굴이 이리저리 돌아갔다.

김상조가 얼른 말렸다.

“공장장님, 그만하십시오. 뒤의 사장님들도 화풀이할 기회를 주셔야지요.”

외상값을 받아야 할 협력 업체 사장들도 와 있었다. 맨 뒤에는 그들을 안내해 온 카심이 있었다.

잠깐 멈춘 틈을 타 이병진이 소리쳤다.

“이건 사기야, 사기! 경찰을 불러, 경찰!”

“핸드폰 여기 있습니다. 부르시죠, 경찰. 그럼 이 계약서는 무효가 될 거고, 전 이 돈 가지고 돌아가면 됩니다.”

“……!”

“그럼 이분들의 채무는 사장님이 지셔야 하는데, 껍데기만 남은 회사를 팔아 다 갚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안 되면 감옥에 들어가 갚으셔야겠네요.”

진혁의 말이 맞았다.

그 이후로 이병진은 더 이상 소리치지 못했다. 여기서 경찰을 부르면 인생이 끝난다.

진혁이 가방을 열고 다섯 뭉치를 권기남 앞에 놓았다.

“5억입니다. 이걸 받고 잊으시겠습니까?”

“으드득. 저놈을 죽이고 싶지만, 기다리는 공장 식구들을 위해서 내가 참지.”

이번에는 협력 업체 사장들에게 네 뭉치를 내놓았다.

“사장님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야 돈만 받으면 되지.”

진혁은 남은 한 뭉치를 이병진에게 흔들어 보였다.

“그래도 하나가 남네요. 이거라도 가지고 가서 조그만 가게라도 하시며 사시겠습니까, 아님 그냥 없던 일로 하고 감방으로 가실 겁니까?”

“계약서대로 합시다.”

이병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겨우 한다는 말이 각서를 써 달라는 정도였다.

* * *

다음 날, 진혁은 카심과 함께 구룡포 공장으로 갔다.

김상조로부터 소식을 들은 직원들이 자진해서 청소를 하고 꽃다발까지 준비해 새로운 주인을 반겼다.

진혁은 일일이 악수를 하며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를 들려주었다.

사장실에서 권기남, 김상조와 마주 앉았다.

“저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두 분이 해 주실 일이 있죠.”

“좋소. 어디건 공장을 돌리 수 있다면 거기가 내가 있을 곳이지. 갑세다.”

“그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공장을 짓는 것이야 건설사가 알아서 해 줄 일이지만, 공장 구조나 기계는 공장장님이 검토해 주셔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지, 내 새끼들인데.”

당연하다는 반응에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옮겼다.

“앞으로 구룡포 공장은 수산물만 생산합니다. 나머지 제품은 단종시키십시오. 다른 회사 제품을 받아 생산하는 OEM도 중단합니다.”

“그럼 공장 가동률이 너무 떨어져서 직원들이 나와도 할 일이 없습니다.”

“휴가를 주세요. 당연히 유급입니다. 그동안 공장 설비를 점검하십시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나중에는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게 될 테니 지금 푹 쉬라고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직원들이 좋아할 겁니다.”

희희낙락하는 김상조에게 진혁이 말했다.

“김 이사님은 따로 처리해 주실 일이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본사를 다시 서울로 옮겨야겠습니다. 박이동 선생님과 함께 사무실을 알아봐 주세요. 우리 제품에 대한 할랄 인증도 함께 준비해 주시고요.”

퇴근 시간까지 회사 운영에 대해 논의를 하다가 인근의 식당을 빌려 전 직원과 함께 회식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카심을 모스크에 내려준 진혁은 인근의 하이야트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부모님이 고덕동의 아파트를 전세를 주고 강릉으로 가는 바람에 이제는 갈 곳이 없었다.

늦게 일어난 진혁은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모스크로 갔다.

카심이 나흐얀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집트에 공장을 세우기로 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제품을 생산하는데 여러 가지로 애로점이 있어서요.”

“좋은 결정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사업을 위해 내린 결정인데 칭찬해 주시니 오히려 제가 민망합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우리 민족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니, 고마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거듭된 인사에 민망해진 진혁이 얼른 용건을 꺼냈다.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어 뵙자고 했습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제게도 도움이 되지만 모스크에도 큰 힘이 될 일입니다. 한국에 할랄 인증 기관을 만들어 주십시오.”

“할랄 인증 기관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은 비록 저 하나지만, 조만간 다른 기업들도 무슬림 시장의 중요성을 깨달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할랄 인증의 요구가 급격히 늘어날 것은 자명합니다. 기업으로서는 시간과 비용이 절약되는 일이고, 모스크는 재원을 확보하고 이슬람을 알리면서 선교할 수 있으니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닙니까?”

“좋은 생각이십니다. 돌아가면 당장 울라마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굉장히 기뻐하실 겁니다.”

나흐얀이 기뻐하는 모습에 진혁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맘을 뵈면 언제나 즐겁습니다.”

“미스터 서가 찾아오면 항상 모스크에 좋은 일이 생기니 기대감에 흥분이 됩니다. 사업가시니 이익을 쫓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그 이익이 누군가의 고통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기를, 도움이 되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명심하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서로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박이동을 만나 본사를 이전할 사무실을 알아봤다.

이전에 본사가 있던 빌딩에 빈 사무실이 있어 그곳을 임대하기로 했다.

박이동에게 회사 이름을 새롭게 동성F&B로 변경해서 정식 이전 절차를 밟으라고 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파티오’는 강남역 인근에 위치한 분위기 있는 파스타 집으로 유명했다.

진혁이 네이버로 폭풍 검색해서 찾아낸 집이었다.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정인영이 들어왔다. 오늘은 사무실에서 바로 와서인지 오피스룩을 입고 있었다.

여성스러움과는 또 다른 커리어우먼의 매력이 있었다. 주변 직장인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아졌다.

앞에 앉자마자 그녀가 물었다.

“오늘은 먼저 연락을 주시고, 어쩐 일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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