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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71화 (71/307)

71화. 첫 데이트

“지난 개소식의 인사도 드릴 겸해서요.”

“제가 보고 싶은 것은 아니고요?”

직설적인 말에 진혁이 당황한 얼굴로 얼른 답했다.

“물론 그것도 있고요.”

“오늘 올라오신 길이에요?”

“아니요. 행사가 끝나고 바로 올라왔는데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느라 좀 바빴습니다.”

“이집트의 사업이 엄청 잘되시나 봐요?”

“아직은 아니지만 가능성이 보여서 물품 생산을 늘리려고 하는데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예 이집트에 공장을 세우려고 하다 보니 이것저것 일이 많았습니다.”

“공장까지 세우시게요?”

정인영이 놀라 물었다.

한두 푼 들어가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게 결심했다면 사업이 잘된다는 의미였다.

진혁이라는 남자에게 개인적인 관심이 있지만 그보다는 사업가 서진혁의 행보가 궁금한 인영이었다. 그래서 집요할 정도로 질문을 했다.

진혁은 지금까지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아버지의 일로 도움을 받아야 하기에 그간의 일을 숨김없이 들려주었다.

그동안 사업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 답답했던 심정도 한몫했다.

“슈퍼 트위터요?”

“기업들이 제품 홍보에 파워 블로거를 활용하는 예는 들었을 거예요. 중국도 ‘인터넷’의 ‘왕뤄(網絡)’와 ‘유명인’, ‘홍런(紅人)’이 합쳐져 ‘왕홍’이라는 소셜 스타들이 활동하고 있어요. 거기에 착안해서 이집트는 트위터가 대세라 제가 고안한 마케팅 전략인데, 젊은 층들에게 제대로 먹힌 것 같습니다.”

‘파워 블로거, 왕홍, 슈퍼 트위터.’

인영은 속으로 중요 단어를 머리에 각인시켰다.

진혁은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먹으면서 현지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창업아이템 설명회의 성공담도 들려주었다.

“주문량은 느는데 한국의 공장에서 그걸 감당 못 할 것 같으니까 공장을 세우겠다는 거네요?”

“그런 이유도 있고, 아무래도 내 공장도 아니고 거리에 문제도 있고 해서 차라리 짓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돈이 많이 들 텐데. 자금이 부족하면 제도 조금 보탤 수도 있어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닙니다.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요.”

진혁이 손사래까지 치며 거절하는 모습에, 인영은 조그맣게 짓는 공장이나 보다 지레짐작하고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의 불만을 털어놨다.

“진혁 씨는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결행하는데 난 아직도 결정만 기다리고 있어요.”

진혁을 내세워 정진호를 어렵게 설득했지만 태후는 개인 회사가 아니었다.

적지 않은 투자가 들어갈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데 사장 혼자서 결정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주주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태후패션 최석민 사장은 안전하게 스페이스 워커의 겨울 시즌 판매 결과를 보고 내년 3월 정기 주총 때 뷰티 사업 진출에 대한 안건을 상정해 의결을 받아 처리하겠다며 미루고 있었다.

“이번 겨울에도 스페이스 워커의 열풍이 이어질 테니 걱정 말고 사업 준비를 철저히 하는 시간으로 생각해요.”

“그래도 자꾸 뒤처지는 것 같아 마음이 좀 심란해요.”

“설마 저를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겁니까?”

“경쟁보다는 진혁 씨 옆에 당당하게 서고 싶어요.”

“남들이 들으면 웃습니다. 태후가의 일원인 인영 씨가 나 같은 일개 개인 사업가를 목표로 해서는 안 되지요.”

“난 배경보다는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반드시 성공할 테니 두고 보세요.”

“그럼요. 인영 씨는 잘해 내실 겁니다.”

진혁의 위로에도 인영의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곳을 나와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서까지 이야기를 들어줘야 했다.

원래는 저녁만 먹고 헤어져 희준을 만나기로 했었는데, 도움을 받은 터라 매몰차게 대할 수 없었다.

결국 12시가 넘어서야 인영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 * *

다음 날부터 정신없이 바쁘게 보냈다.

서울로 올라온 김상조 이사와 함께 새로운 사무실을 둘러보고 본사 이전을 준비를 지시했다.

그사이 권기남 공장장과 함께 인천의 통조림 기계 설치 전문회사인 영진에프엠씨를 방문해 상담을 받았다.

저녁에는 태후빌딩 근처에서 김지민을 만났다.

원래는 한지철과 함께 보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 둘만 만났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오늘은 드시고 싶은 것 다 사 드릴게요.”

“전 아무거나 잘 먹어요. 사장님 드시고 싶은 것 드세요.”

“아이고, 그럼 안 됩니다. 그럼 저 어머니께 맞아 죽어요. 지민 씨 칭찬하며 꼭 맛있는 거 사 주라고 얼마나 신신당부하시던지. 귀에 딱지가 질 지경입니다.”

진혁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어머니가 그만큼 신신당부한 일이었다.

“여자들은 양식을 좋아한다는데, 스테이크나 파스타 어떠세요?”

“요즘은 어디서 주무세요?”

“예?”

“어머님께서 사장님이 서울에서 편히 쉬실 곳이 없다고 걱정하셨거든요.”

“어쩔 수 없이 호텔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두 분이 행복한 모습을 보니까 좋기는 한데, 먹고 자는 일이 곤욕이긴 하네요. 하하하.”

허탈한 웃음을 짓는 진혁을 보고 지민이 결심했다.

“먹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런데 좀 멀어요.”

“이집트 가서 먹자는 것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그럼 가요.”

두 사람은 돈암동으로 갔다.

진성여대 근처의 허름한 밥집으로 들어가려는 지민의 손을 얼른 잡았다.

“아니, 좋은데 가자니까 겨우 여깁니까?”

“여기 밥이 얼마나 맛있는데요. 학교 다닐 때 내내 먹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먹고 싶은 것 사 주신다면서요. 오랜만에 집밥이 먹고 싶어서 그래요.”

지민이 붉어진 얼굴로 아직도 잡고 있는 손을 빼고 먼저 들어가며 씩씩하게 소리쳤다.

“이모! 저 왔어요.”

“어머, 지민이 왔구나. 얼굴 잊어버리겠다.”

“회사 일이 바빴어요.”

“그래. 힘들겠지. 그런데 뛰어왔니? 얼굴이 왜 빨개.”

푸근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뒤에 진혁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어머. 지민이가 드디어 남자 친구를 데리고 왔네.”

“남자 친구 아니에요.”

“가시나, 까칠하기는. 알았다, 알았어. 얼른 앉아. 맛있게 한 상 차려 올게.”

아주머니는 뭐가 그리 좋은지 주방으로 가면서 연신 진혁의 얼굴을 훔쳐봤다.

“이모가 좀 짓궂으세요. 신경 쓰지 말고 앉으세요.”

“정말 자주 왔던 곳이었나 봐요.”

“진성여대를 다녔어요. 방학 때는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했거든요.”

“그랬군요.”

지민이 직접 가서 물과 수저를 가져다 세팅하고 기다리자 음식이 나왔다.

진수성찬이었다.

가짓수도 많았지만 스테인리스 밥그릇, 투박한 사기그릇에 담긴 반찬이 집에서 먹는 음식 그대로였다.

“무슨 반찬을 이렇게 많이 줘요?”

“사위 사랑은 장모, 아니, 이모라잖니.”

“이모!”

“됐어. 많이 먹어요. 다음에는 닭 잡아 놓을 테니까 꼭 또 오고요.”

아주머니도 강적인지, 지민이 노려보건 말건 진혁에게 할 소리는 다 하고 갔다.

얼굴이 활활 타오른 지민은 여길 오는 게 아니라며 자책했다.

진혁이 계속 밥을 사 먹는 게 마음에 걸려 집밥을 먹게 해 주고 싶어 온 건데 이모가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지민 씨를 많이 아끼나 봐요?”

“원래 정이 많으신 분이세요. 그리고 저를 4년 내내 보셔서 딸같이 대하시고요.”

“그럼 앞으로 저도 여길 자주 이용해야겠습니다.”

“예?”

“그동안 계속 어머니가 해 주신 밥만 먹다가 요 며칠 사 먹어 봤더니 영 아니네요. 우리 어머니에 비해 쪼금 부족하지만 그래도 엄청 맛있어요.”

진혁은 진심인지 정말 맛있게 먹었다. 고봉밥인데도 세 공기나 비웠다.

이모가 주방에서 지켜보다가 반찬 그릇이 비면 잽싸게 다시 가져다준 영향도 있었다.

지민도 나중에는 마음이 안정되는지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계산할 때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지민이 기어코 만 원짜리 하나를 쥐어 주고 나왔다.

“잘 먹고 갑니다.”

“씨암탉 먹으러 꼭 와요.”

“다신 안 와요!”

지민이 꽥 소리를 지르고는 얼른 진혁을 데리고 나가 근처의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어머, 지민 학생!”

“그동안 잘 계셨어요?”

“나야 뭐 똑같지. 그런데 남자 친구?”

“아니에요.”

여기 주인도 지민을 알고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쳐다보는 진혁에게 지민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도서관에 자리가 없을 때 여기서 공부해서 아세요.”

“그런다고 다 아나요. 게다가 졸업한 지 꽤 됐는데.”

얼마 후 주문한 커피를 주인이 직접 테이블로 가져다주었는데 쿠키까지 내왔다.

“이건 저희가 안 시킨 건데요?”

“자주 좀 오라고 주는 뇌물이야. 지민이가 없으니 남학생 손님이 너무 없어. 예전에 지민이가 여기서 공부할 때는 줄까지 섰었는데…….”

“아주머니!”

“미안. 아무튼 자주 얼굴 좀 비춰 줘. 나도 먹고 살아야지.”

이후 두 사람은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특별히 어떤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사업 이야기는 조금이고 직장 생활이야기, 학창 시절의 추억, 가족 이야기를 두서없이 나누었다.

그렇다고 지루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그렇게 흐르는지도 모를 정도로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지민은 말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남의 이야기를 들어 줄 줄 알았다.

특히나 재미있는 이야기에 간간히 커다란 눈으로 짓는 눈웃음은 예술이었다.

그걸 보려고 진혁이 더 재미있게 이야기를 했다.

결국 그날도 희준을 바람맞혔다.

* * *

다음 날은 기필코 희준을 보려고 했지만 한 통의 전화 때문에 또 미뤄야 했다.

진혁은 김선혁이 일러 준 도산대로의 고급 한정식집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김선혁이 누군가와 함께 들어왔다.

당연히 손민한과 함께 왔을 것이라 생각하며 미소를 띠고 있던 진혁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정진호가 뒤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행사 때 멀리서 봐서 얼굴만 알 뿐, 이렇게 가까이에서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예상치 못한 등장에 굳어 움직이지 못하자 김선혁이 한마디 했다.

“인사드려라.”

“아, 서진혁입니다, 회장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합작 법인이라지만 태후 이름이 들어가는데 새로운 지사장 얼굴은 봐야 할 것 같아서 마련한 자리니 너무 부담 갖지 말게. 앉지.”

부담을 안 가질 수 없는 자리였다.

단순히 그런 공적인 일이라면 자신을 회사로 불러도 될 일이었다.

김선혁이 핀잔을 주었다.

“귀국했으면 연락했어야지.”

“죄송합니다. 지사 일이 아니라 개인 일이라 미리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일이 마무리되면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서운하지만 그 정도 바쁘다면 사업이 잘된다는 이야기니 좋은 일이지.”

“겨우 직원들 월급 줄 정도입니다.”

“겸손은. 우리도 듣는 이야기가 있어.”

김선혁은 정진호가 있는 자리라 말을 아꼈지만 이집트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진혁은 최영재를 떠올리고 이를 갈았다. 그가 따로 보고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식사를 하며 정진호가 물었다.

“지사 실적 보고는 받고 있네. 과거의 실적을 훨씬 넘은 데다 계속 성장하고 있더군.”

“직원들이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역시 지사 폐쇄가 잘못된 건가. 지금이라도 폐쇄된 지사들을 되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나?”

“카이로 지사의 경우는 조금 특수합니다. 다른 곳은 제가 사정을 모르니 대답하기 부적절합니다만, 폐쇄 결정이 옳은 곳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진혁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답했다.

아직도 그가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파악되지 않았다.

이후 지사 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묻던 정진호가 식사를 마치고 맥주를 한잔하면서 마침내 용건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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