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SEZ, 입주하기
“오늘 내가 서 사장을 보려고 나온 건 의견을 구할 일이 있어서네. 이집트에 공장을 세운다고?”
“그렇습니다.”
“그제 인영이가 술을 먹고 늦게 들어와 투정을 부리더군. 자네는 공장까지 세우는데 자기는 이미 결정된 것도 못 한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알게 되었어.”
“죄송합니다, 제가 일찍 자리를 끝냈어야 했는데.”
“젊은 사람들이 그럴 때도 있지. 그걸 탓하자는 게 아니야. 태후전자에서 해외 TV 공장을 짓기 위해 후보지를 조사했네. 터키와 모로코가 유력한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이집트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알게 됐어. 자네가 거기에 공장을 세운다고 해서 묻고 싶어 온 거네.”
정진호가 온 이유를 알게 되자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터키와 모로코 모두 장단점이 있는데 사정도 모르는 제가 함부로 답을 드리기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
“결정해 달라는 게 아니라 의견을 묻는 것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말게. 중국의 인건비 상승이 심상치 않아. 그래서 중동이나 아프리카 시장 쪽에 생산 공장을 짓는 거네.”
“음, 그렇다면 전 당연히 이집트가 최적지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터키는 아프리카보다는 유럽 시장이 가깝습니다. 반면 모로코는 아프리카이긴 하지만 서쪽에 치우쳐 있어 중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물론 지정학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이집트 정국이 불안한 게 최대 난제야. 지금도 임시 정부 체제이지 않나?”
“그래서 오히려 지금이 더 적기일지도 모릅니다. 임시 정부는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면 해결될 겁니다. 물론 한동안 혼란은 있겠지만 다른 나라처럼 극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최근 달러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군최고위원회가 투자 유치에 매우 적극적이란 게 호재입니다.”
진혁은 압델로부터 들은 수에즈 특별 경제 구역의 확대된 혜택을 들려주었다.
“제가 알기로는 이 정도의 혜택을 주는 곳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 때문에 유니로브 이사회도 그간의 입장을 바꿔 승인해 준 겁니다.”
“생각보다 상세히 알고 있군.”
“제가 거래하는 군 관계자로부터 전해들은 겁니다. 제가 공장을 세우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진혁은 적당히 둘러댔다. 압델과 직접 대면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진호의 생각은 달랐다.
“군 고위 관계자까지 아는 줄은 몰랐네. 나중에 이집트로 결정되면 도움을 부탁하지.”
“카이로 지사를 맡고 있으니 당연히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야지요.”
“TG전자 쪽 분위기에 들은 것 있나?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장 이전을 추진한다더니 요즘은 그 이야기가 쏙 들어갔어.”
진혁의 대답을 들은 정진호가 화제를 바꿨다.
TG전자는 태후전자와 경쟁 관계로 1990년 이집트 동북부 항구 도시에 TV 공장을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이집트 사태 때 근로자들을 철수시켜 한때 공장을 이전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있었지만, 사태가 생각보다 빨리 진정되자 직원들을 다시 보내 정상 운영 중에 있었다.
경쟁 기업이다 보니 카이로 지사에서 비공식으로 동향 보고를 해 왔는데, 지사가 폐쇄되면서 보고가 끊겼다.
진혁은 딱히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 바로 바로 답을 못 하고 시장을 돌면서 느낀 분위기를 유추해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이집트의 가전 시장은 한때 한국 제품이 장악했었습니다. 그래서 TG전자도 현지 공장을 세운 것이고요. 그러다가 중국산 저가 제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밀려났었습니다만 최근은 회복세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
“이집트의 국민 소득은 낮지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중산층 비중이 16.5%인 1,1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프리미엄 시장의 전망이 밝습니다. 중국산 저가 제품에 실망한 중산층이 최근 TG 제품 구매를 하면서 시장 상점에도 TG 제품이 맨 앞에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군.”
정진호의 눈이 굳어졌다.
그룹에서도 파악하지 못한 현장의 살아 있는 정보였다.
얼마간 더 사업 이야기를 하던 정진호가 말했다.
“내가 다음 약속이 있어서 그만 일어나야 할 것 같네. 좋은 의견 들었네.”
“아닙니다. 오히려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번에 한국에 오면 밖에서만 만나지 말고 인영이랑 한번 집에 놀러 와.”
“아, 예.”
“공장 문제는 어떻게 결론이 나든 연락하지. 잘 부탁하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선혁도 함께 가야 하는 자리인지 두 사람이 먼저 떠나자 진혁도 택시를 잡아타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동서울터미널에서 강릉행 버스를 타자마자 곯아떨어져 기사 아저씨가 깨워서야 겨우 일어났다.
이틀간 어머니가 해 주신 밥을 먹으며 몸보신을 한 진혁은 춘천으로 넘어갔다.
송승용이 한국기업기술가치평가원의 기술 평가 결과가 나왔다며 연락해 왔다.
유닉스에 도착하자 서울에서 출발한 박이동이 먼저 와 있었다.
유닉스 보유 기술의 자산 가치는 7억 5천만 원으로 평가되어 있었다.
내심 가격 협상에 들어올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을 짠 송승용의 노력이 무색하게, 진혁은 두말없이 그 결과를 받아들여 박이동에게 바로 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다.
회사 계좌를 물어 입금도 즉시 해 줬다.
떠나는 진혁을 밖에까지 따라 나온 송승용이 몇 번이고 고맙다며 기술 이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박이동에게 말했다.
“유닉스 주식을 10% 정도 매입해 주십시오.”
“회사를 인수하시게요?”
“아닙니다. 송 사장님 같은 분이 운영하는 회사라면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서울로 돌아와 김상조에게 사무실 이전과 구룡포 공장을 부탁한 진혁은 카심과 함께 카이로로 돌아갔다.
* * *
사무실에 도착해 갈리, 핫산, 하마드를 불러 그간의 업무 보고를 받았다.
다들 열심히 해 준 덕분인지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특히 그동안 갈리가 이전 직장인 베링하임과 접촉해 일부 의약품을 저렴한 가격에 알쇼핑에 입점시켰다.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 베링하임의 제품을 판매하고 남은 순익 1%는 갈리 사장님에게 지급되게 하십시오.”
“아닙니다, 사장님. 직원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건 아니지요. 직장이라는 게 그냥 있어도 월급은 나옵니다. 회사를 위해 따로 수고하셨는데 아무런 대가가 없다면 누가 나서서 일하겠습니까. 누구건 알쇼핑에 제품 입점을 알선하면 똑같이 포상할 겁니다.”
갈리가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진혁의 속마음을 눈치챘다. 이번 일을 계기로 직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려는 의도였다.
그 예상이 적중해 이후 직원들이 바이어에게 적극적으로 알쇼핑을 소개하며 입점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퇴근 후 세미라미스 호텔에 도착해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어김없이 경호원의 몸수색을 받고 스위트룸으로 들어가자 압델이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조용히 쉬고 싶을 때 안가로 쓰는 모양이었다.
셰리피 소장을 통해 면담을 요청했더니 이곳으로 오라고 했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부르려고 했어. 앉아. 난 은원이 명확한 사람이야. 받은 만큼 돌려주지. 은혜는 은혜로, 피는 피로.”
섬뜩한 이야기였다.
진혁의 잔을 채운 압델의 얼굴은 까칠해 보였다.
“투자 유치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유니로브의 결정으로 문의는 많은데 결정을 미루고 있어. 사내가 칼을 빼 들었으면 뭐가 됐든 베야지.”
해외 기업들이 여전히 이집트 정국을 우려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주저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2차 투표에서도 무슬림 형제단이 압승하자, 투자를 잠정 합의했던 곳마저 뻔한 사정을 내세워 지연시키고 있었다.
그에 반해 군최고위원회의 독촉은 더 거세지고 있었다.
중간에 낀 압델의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진혁이 자세를 바로 했다.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도움에 대한 보답은 생각하고 있어. 군산업체의 일부 물품을 납품하게 해주면 될 거야.”
“보답 때문에 찾아뵌 게 아닙니다. 저도 SEZ에 공장을 세우고 싶습니다.”
“자네가?”
“화장품과 통조림 제조 공장을 세워 운영할 생각입니다.”
“거긴 해외 기업 투자 전용 지역이야.”
“이번에 한국에 간 김에 회사를 하나 인수했습니다. 그 이름으로 투자를 진행할 작정입니다.”
“어떤 회산데?”
동성F&B에 대해 들은 압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국책 사업으로 파격적인 혜택을 주는 만큼 입주 조건도 까다로웠다. 자본금은 물론 매출액도 세밀하게 따졌다.
최소 그 나라에서 해당 제품의 판매실적이 1~2위 안에 들어야만 신청을 받아 줬다.
한때 한국에서 통조림으로 독보적 1위였다고는 하지만 10년 넘게 망가질 대로 망가져 부도까지 난 회사가 실적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뜬금없는 화장품은 이제 처음 시작하는 품목이었다.
압델이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욕심이 과하군. 자네가 도움을 준 건 맞지만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야. SEZ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고.”
“투자청에서 입주 조건을 까다롭게 한 것은 혹시라도 나중에 능력이 안 돼 철수할 것에 대비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외국 놈들이야 손실난다고 제 나라로 떠나 버리면 그만이지만 우린 그걸 맘대로 철거도 못 하고 단지는 단지대로 망가지게 되니,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우량 기업만 받는 거지.”
“끝까지 책임지는 거라면 저희보다 더 확실한 기업은 없습니다. 이집트에 제 전부가 있는데 어딜 가겠습니까? 공단에 돈을 다 쏟아붓는 한이 있더라도 전 아무 데도 못갑니다.”
압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맞는 이야기였다. 진혁이야말로 특이한 케이스긴 하지만 가장 안전했다.
“민주화 시위 때 다들 도망쳤지만 전 남았습니다. 부정 축재한 무바라크 측근들의 상당수도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주재원인 저는 남아 이집트를 위해 계속 사업을 확장시켜 가고 있습니다. 최소한 한 번쯤 믿어는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네의 노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내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잘못된 선례를 남기면 두고두고 시달릴 수 있어.”
“유니로브처럼 대대적인 홍보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구석진 땅이라도 조금만 내주시면 조용히 공장 세워서 이집트 경제에 보탬이 되게 하겠습니다.”
사정하는 진혁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오면서도 내 돈 내 투자하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여러 번 고민했었다. 하지만 SEZ의 혜택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입주 자격이 안 되니 포기하려는 순간 정진호의 전화가 결심을 굳히게 했다.
갈등하는 압델에게 준비한 카드를 꺼냈다.
“국장님처럼 저도 도움은 절대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만하게. 날 돈 몇 푼에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실망했어.”
“제가 어찌 감히 국장님을 뇌물로 매수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건 아니니 들어봐 주십시오.”
“험……. 이야기해 보게.”
오해한 게 무색했는지 압델이 괜한 헛기침을 했다.
“한국의 태후전자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알지. 반도체에 이어 핸드폰도 미국기업을 제친 세계 1위 기업 아닌가?”
“맞습니다. 태후전자가 중동과 아프리카 시장을 커버할 공장을 짓는데 이집트에 관심이 있답니다.”
“그래?”
“원래는 터키와 모로코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SEZ에 대해 듣더니 이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겠답니다.”
압델의 눈알이 번들거렸다.
대단히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태후전자만 투자 결정을 하면 미적거리는 놈들도 확신을 갖고 달려들 게 뻔했다.
하지만 진혁의 말만 믿고 김칫국을 마실 만큼 압델은 경솔하지 않았다.
“어디까지 이야기가 된 거지?”
“제가 유니로브를 소개하며 알고 있는 내용은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특별 혜택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태후전자에서는 내부 결정을 끝냈다고 합니다.”
“설마 나를 만났다고 이야기한 건가?”
“아닙니다. 공장 설립 문제로 고민하는 것을 보고 셰리피 소장님이 SEZ에 대해 알려 줬다고만 했습니다.”
“태후전자 누구와 대화를 나눈 건가?”
“정진호 그룹 회장님이십니다. 투자청의 결정권을 가진 분과 통화를 원하십니다. 특별한 문제만 없다면 바로 들어오시겠다고 했습니다.”
말을 마친 진혁이 간절한 표정으로 압델을 바라봤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알라딘 컴퍼니의 운명이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