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곡물 투자
압델이 한동안 생각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놓고 가게. 이번 일이 성사되면 내가 나중에 옷을 벗는 일이 있더라도 자네 회사를 입주시켜 주겠네.”
“감사합니다.”
진혁이 펜을 꺼내 메모지에 정진호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놓고 호텔을 나왔다.
그가 SEZ 입주를 고집하는 이유는 GAFTA(범아랍자유무역지대)의 회원국 간 특혜 제도 때문이었다.
GAFTA는 튀니지를 포함한 아랍 주요 국가 18개국이 참여한 단체로 회원국 간 교역은 무관세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올해 마지막 날.
한국과 이집트 언론이 일제히 태후전자가 이집트에 TV 공장을 세우기로 했다는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SEZ에 부지 36만 6천 제곱미터 규모로, 내년 6월 완공을 목표로 1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했다.
며칠 후 투자청에서 조용히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한국의 동성F&B가 SEZ의 부지 5만 평에 2천만 달러를 들여 통조림과 화장품 제조 공장을 설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참석자는 압델과 진혁 두 사람뿐이었다.
* * *
서둘러 공장 설립과 기계 설치에 따른 계약을 체결한 진혁은 젯다로 날아갔다.
회원제 클럽에서 스미스를 만났다.
“일본전력 공매도는 총 1억 250만 달러를 투자해서 9,750만 달러의 수익을 남겼습니다. 수수료로…….”
스미스가 일본전력 공매도 투자에 대한 정산 내용을 들려주었다.
지시한 대로 200엔이 무너지자 청산했다.
“조금만 매도 시기를 늦췄어도 100% 수익인데 아쉽습니다.”
“제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얼마나 더 내려갈지 어떻게 맞히겠습니까?”
사실이지만 스미스는 그 말을 절대 믿지 않았다.
신이 아닌 인간이 매번 투자 때마다 기록적인 수익률을 올리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덕분에 젯다 지점도 덩달아 큰 수익을 올렸으니 불만은 없었다.
“제 계좌에 얼마나 들어있습니까?”
“그동안의 수익이 모여 2억 3천만 달러가 조금 안 됩니다.”
“2,100만 달러를 이 계좌로 보내 주십시오.”
동성F&B의 회사 계좌를 건네줬다.
2천만 달러는 투자청에 약속한 대금이고 나머지 100만 달러는 운영비였다.
스미스가 메모지를 챙기고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나머지 자금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당분간 그대로 두죠. 공장 설립 때문에 지금은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스미스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
투자 회사는 궁극적으로 수수료 수입으로 먹고 사는 회사였다.
특히나 진혁을 따라 투자 수익도 챙긴 터라 큰돈을 그냥 묵혀 두는 게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몸을 앞으로 낮추며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저희 내부적으로만 알기로 한 정보인데, 앞으로 옥수수 값이 폭등할 거랍니다. 미국 농무부의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는 유례없는 이상 기온으로 주요 곡창 지대가 심각한 타격을 받아 곡물 수확량이 현저하게 줄 거라고 합니다. 지금 옥수수를 사 놓으면 큰 수익이 될 겁니다.”
“……!”
진혁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지는 모습에 스미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말이 먹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혁은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놀란 것뿐이었다. 사업은 안 되고 부도 위기에 몰렸을 때였다.
비싼 가입비를 내고 주식 투자 클럽에 들어가 기웃거릴 때 방금 전 스미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가진 돈을 몽땅 옥수수 선물에 밀어 넣었는데 흔들기가 엄청났다. 오르는가 싶으면 내리고를 몇 개월 가까이 반복하니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에 반해 콩 선물은 꾸준히 올랐었다.
결국 참지 못해 던지고 콩 선물에 추격 매수했는데 그때부터 날아가더니 고점을 찍었다.
물론 콩 선물도 올라 수익은 났지만 상대적인 박탈감에 배 아파했던 기억이 이제 생각난 것이다.
옥수수는 지금 진혁에게 관심 밖이었다.
콩 통조림 공장을 이제 막 세우려고 하는데, 그게 완공됐을 때 쓸 콩이 엄청 올라 있다면 그보다 큰 낭패는 없었다.
생각을 마친 진혁의 인상이 다시 찌푸려졌다. 이 이야기를 스미스에게 하는 게 옳은 지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무리 비밀 약속을 한다고 해도 그 역시 투자 회사의 일원일 뿐이었다.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몇 명에게 알릴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또 친한 사람에게 이야기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신의 기억과 달리 콩도 옥수수처럼 엄청난 흔들기가 일어날 게 뻔했다.
진혁의 생각이 길어지자 스미스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옥수수에 투자하시는 게 좋습니다.”
“좋습니다. 1억 달러를 옥수수 선물에 투자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반만 투자하십니까? 예측이 틀렸을 때를 대비해 남겨 두시는 겁니까.”
“반은 콩을 현물로 확보할 생각입니다.”
“콩을 현물로요?”
“제가 이집트에 콩 통조림 공장을 세우고 있습니다. 곡창 지대가 타격을 입는데 콩이라고 괜찮을 리가 있나요?”
“아, 원료를 미리 확보하시려는 거군요. 얼마나 큰 규모인지 모르지만 1억 달러는 너무 많지 않습니까?”
“부족한 것보다는 낫지요. 그렇게 알고 운영해 주세요.”
스미스가 조금이라도 더 자신이 운영하려고 욕심을 부리자 진혁이 냉정하게 잘랐다.
진혁의 태도가 워낙 완강하니 스미스도 아쉽지만 반이라도 운영하게 된 것에 만족하고 물러나야 했다.
진혁은 그날 젯다의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원래는 바로 돌아가려 했으나 현물을 확보해야 했다.
그냥 자기 뭐해 젯다 지사의 손기성 과장에게 전화했는데 마침 시간이 된다고 해서 호텔로 오기로 했다.
룸서비스를 시켜 놓고 기다리자 손기성이 들어왔다.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열자 한국에서 공수해 온 소주가 나왔다.
금주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맘 편하게 술을 먹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역시 술은 소주가 최고였다.
사람과 장은 묵을수록 좋다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예전의 즐거웠던 일, 힘든 일을 이야기하다 보니 술병이 빠르게 비어 갔다.
안주를 집어 먹던 손기성이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얼마 전에 기획실장 왔다 갔다.”
“정호영 기획실장이요? 해외 자원 개발을 한다더니 여기로 왔나 보네요.”
“그래. 지사 여러 개 아작 내 놓고는 뻔뻔하게 전화해서 영접 준비를 하라고 했다더라.”
“영접을요? 설마 자기를?”
“그렇게 뻔뻔하지는 않지. 무슨 공사의 높은 사람들이라고 했다더라. 난 그때 출장 중이라 보지는 못했어.”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자원 개발할 게 있나요?”
“여긴 아닌가 봐. 다음 날 바로 떠났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젯다에 들렀다는 건 중동이란 말인데, 다른 나라는 다들 불안하지 않나요?”
“그렇긴 하지만 중동만큼 유전이 많은 곳도 없잖아.”
“하긴 그러네요. 지들끼리 알아서 잘하겠죠. 우린 우리끼리 잘살면 되는 거고.”
“고로취! 그런 의미로 원샷!”
세차게 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비웠다. 정호영은 이미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없었다.
얼마 못 가 술이 바닥나자 손기성이 입맛을 다시고 일어났다.
진혁이 자고 가라고 붙잡았지만 내일 아침 지사장 회의가 있다고 하자 더 붙잡을 수 없었다. 진혁도 얼마 전까지 그 생활을 했었다.
* * *
다음 날 아침, 갑자기 불려온 엘레니와 함께 바로 올드시티의 알라위 전통 시장으로 갔다.
압둘라 상회로 가자 압둘라 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잘 지내셨지요?”
“갑자기 연락 주셔서 놀랐습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사이 몸집이 더 불은 압둘라 사장이 극진한 태도로 진혁을 사장실로 안내했다.
진혁은 첫 거래를 튼 이후로도 꾸준히 대량 구매를 해 주고 있는 최고의 고객이었다.
첫 거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엘레니가 대신 맡아 해서 얼굴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사장실에 앉자 진혁이 우선 인사부터 했다.
“우선 회장님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게 다 서 사장님 덕분입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진혁의 조언으로 다른 상회의 골치 아픈 재고품을 해결해 준 덕분에 주변 상인들의 신망을 얻어, 압둘라는 이곳 시장의 곡물상인연합회 회장이 되어 있었다.
직원이 차를 내놓고 돌아가자, 진혁이 입을 뗐다.
“부탁할 일이 있어 왔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압둘라가 바짝 긴장을 했다.
진혁이 오랜만에 급히 찾아왔다면 큰 거래일 게 틀림없었다.
“콩을 미리 확보해 놓으려고 합니다.”
“얼마나 말입니까?”
“총 매입 자금은 1억 달러입니다.”
“헉!”
압둘라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내뱉었다. 자신이 평생 거래한 것보다 훨씬 큰 금액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압둘라가 땀이 번들거리는 이마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를 믿고 큰일을 맡겨 주시려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제 능력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요?”
“그 정도 물량이면 차라리 직접 큰 회사와 거래하시는 게 사장님께도 이득일 겁니다.”
진혁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역시 압둘라를 찾아온 것은 잘한 일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하지만 표정은 속마음과 달리 싸늘하게 변했다.
팔짱을 끼고 다리까지 꼬았다.
항상 겸손한 평소의 모습과는 다른 행동에 지켜보고 있던 엘레니마저 얼굴이 굳어졌다.
“실망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과거마저 잊으신 겁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상인들이 왜 압둘라 씨를 회장에 추대했는지 잊으셨습니까? 호텔로 찾아와 주변 상인들의 재고도 처리해 달라고 부탁하시던 모습은 어디 간 겁니까?”
“……!”
압둘라의 눈이 번쩍 띄었다.
자신 혼자서는 불가능하지만 주변 상인들이 함께한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지난번처럼 아는 상인들을 동원하라는 말씀이시군요.”
“그것도 좋지만, 협회의 이름으로 진행하면 국제 곡물 메이저와 직접 거래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
압둘라의 눈이 다시 한번 커졌다.
국제 곡물 메이저라면 미국의 카킬, 콘티넨탈과 프랑스의 루이 드레퓌스, 스위스의 앙드레, 아르헨티나의 붕게 등 5개사를 지칭했다.
국제 곡물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 막강한 정치적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다국적 기업이었다. 당연히 개인이나 소규모 상회는 상대도 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진혁이 1억 달러를 투자하고 상인들의 물량까지 더하면 충분히 협상이 가능한 금액이었다.
공급자와 직접 거래하는 것이니 중간 도매상과 거래하는 것보다 가격을 훨씬 낮출 수 있었다.
압둘라의 눈이 번들거렸다.
“해 보겠습니다.”
“역시. 압둘라 씨가 맡아 주실 줄 알았습니다.”
진혁이 압둘라를 내세운 것은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 위한 것도 있지만 미래를 대비한 포석이었다.
앞으로는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이 곳곳에서 일어나면서 곡물 수확량이 큰 영향을 받아 곡물 가격이 물가 상승을 촉발하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의 시대가 본격화된다.
안정적인 곡물 공급처 확보가 식품 사업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진혁이라, 압둘라의 입지를 키워 그 일을 맡기려는 계획이었다.
* * *
3개월 후, 카이로에서 110킬로 떨어진 아인 소쿠나항 인근 SEZ의 외곽에서 동성F&B의 공장 준공식이 조용한 가운데 진행됐다.
양옆 복층으로 통조림과 화장품 제조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통조림 공장 뒤에는 두 건물을 합친 크기만큼의 대형 창고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세련된 건물 1층은 직원 식당과 모스크, 2층은 R&D센터였다. 땅이 워낙 넓어 공터도 넉넉했다.
까맣게 탄 모습으로 연단에 선 진혁은 1,000여 명의 시선을 받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주변 단지도 여기저기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태후전자의 투자 결정으로, 주저하던 다른 기업들도 속속 입주하기로 하고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에 반해 동성F&B의 공장은 오늘 준공식을 열고 바로 생산에 돌입하고 있으니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이는 투자청에서 시행한 논스톱 서비스의 영향도 컸지만, 진혁이 여기서 먹고 자며 매달린 결과이기도 했다.
“우리의 시작은 비록 미비할지라도 그 끝은 창대할 겁니다.”
진혁의 축사가 시작되자 직원들의 눈에 열기가 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