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국정원과 함께
높은 실업률을 반영하듯 직원 모집의 응시율은 10:1을 넘었다.
높은 임금에, 외국 기업 최초로 공장에 모스크를 설치할 정도로 친무슬림 기업을 표방하는 모집 공고가 트위터를 통해 나가자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진혁은 자신을 바라보는 뜨거운 눈길에서 무한한 책임감을 느꼈다.
지금은 비록 인지도도 없고 실적도 없어 공단의 한 귀퉁이에서 외부 인사 없이 조용히 행사를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이 SEZ에서 가장 핫한 공장이 되게 하고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직원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치러진 연회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진혁이 주변에 둘러선 핵심 멤버들을 보고 말했다.
“다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사장님이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카이로를 오가신 게 100일이 넘습니다.”
다들 진혁의 고생을 치하했다.
물건을 만든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용기부터 박스, 설명서까지 준비할 부자재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업체들과 일일이 상담하고 계약을 체결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공장 건설도 체크하느라 한 시간 삼십 분이나 걸리는 길을 수없이 왕복해야 했다.
차 안에서 쪽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운전하느라 죽어난 카심의 입이 댓 발 나온 건 당연했다.
“씨. 나도 죽어라 고생했는데 인사하는 인간이 하나도 없네.”
“운전이 뭐가 힘들다고 생색이야, 늙은 나도 있는데.”
“누가 아저씨보고 늙었다고 하겠어요. 도대체 멱살을 몇 번이나 잡았는지 아세요!”
흑인처럼 새까맣게 탄 권기남은 정말 나이를 잊게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기계 설치 현장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감독하면서 조금만 어영부영하면 호통을 치고 현장 소장의 멱살을 잡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공장 기계는 한번 설치하고 떠나면 끝이야. 처음에 제대로 해 놔야 잔고장이 없어.”
“그러면 나한테 먼저 이야기해야지. 말도 안 통하시는 양반이 힘은 왜 그리 센지, 말리느라 더 힘들었단 말입니다.”
“젊은 놈이 투덜대기는.”
“뭐요!”
“알았어, 알았다고. 그래도 이렇게 고생한 보람이 있잖아. 한잔하고 풀어.”
카심이 억지로 잔을 들이킬 때 진혁은 두 명의 미인에게 다가갔다.
한 명은 마르와였는데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귀국했다.
“마르와. 여기가 너를 슈퍼스타로 만들어 줄 곳이다.”
“기대가 커요.”
“제품 개발도 바쁘시겠지만 마르와에게 화장법 전수도 부탁드립니다, 아자데 센터장님.”
“걱정 마세요. 원래 피부 결이 좋은 데다 이목구비 구분이 확실해서, 조금만 지도하면 이집트 남성들 마음을 다 잡아 버릴 거예요.”
활짝 웃는 아자데는 랑콤으로 유명한 세계 1위 화장품 회사 로레알의 책임 연구원 출신으로 프랑스에 거주하는 이민 2세였다.
알카에다의 미국의 9・11 테러 이후 프랑스도 중동인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해 무슬림 이민자들에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슬림을 겨냥해 만든 이른바 ‘부르카 금지법’을 시행하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진혁이 제안해 오자 아자데는 두말없이 가족과 함께 이집트로 와 R&D 센터를 맡았다.
통조림과 달리 화장품은 끊임없이 신상품을 내놓으며 트렌드를 창출하는 제품이라, 진혁은 R&D 센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그렇게 하십니까?”
“어서 와요, 달링.”
아자데가 이번에도 다가온 중년인에게 격한 애정 표현을 했다.
그녀가 이집트행 결심을 쉽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남편도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무슬림이기 때문이었다.
진혁은 프로그래머였던 그를 알쇼핑에서 근무할 수 있게 해 줬다.
그들 부부, 마르와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하마드가 어두운 얼굴로 찾아왔다.
진혁이 양해를 구하고 구석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무슨 일 있습니까?”
“공장장님으로부터 내일부터 통조림 공장을 풀로 가동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지시한 건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알쇼핑에서 통조림의 인지도가 가장 낮습니다. 제품이 한꺼번에 만들어지면 판매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알라딘 유통을 맡고 있는 그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판매는 그의 책임이었다.
진혁이 빙긋이 웃었다.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압니다. 이곳 창고가 꽤 넉넉합니다. 거길 다 채우는데도 두어 달은 걸릴 겁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전면에 배치하고 대대적인 광고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지금처럼만 하세요.”
“무슨 대책이라도 있으십니까?”
“하늘이 해결해 줄 겁니다. 우리는 그냥 제품 쌓아 놓고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걱정 말고 파티를 즐기세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가는 하마드의 모습에 진혁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최근 곡물 가격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았다.
세계적인 곡창 지대인 미국 중부의 기록적인 폭염과 러시아 흑해 지역의 한파, 남미의 가뭄으로 곡물 수확량이 줄 거라는 보고서가 잇달아 발표됐다.
기다렸다는 듯이 국제 곡물 시세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콩과 밀의 선물 시세가 뛰어오르자 시장의 현물 가격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옥수수는 어쩐 일인지 시장의 가격은 오르는 반면 선물은 반등만 거듭할 뿐 오르지 않았다.
대량 매도 주문이 끊임없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흐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카이로로 돌아온 진혁은 회사 건물로 가지 않고 새로 지은 맞은편 5층 건물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알라딘’이라는 간판이 크게 걸려 있었다.
그동안 공장만 지은 게 아니었다. 사옥을 마련해 자신의 회사를 모두 이곳으로 옮겼다.
태후물산 카이로 지사는 기존의 빌딩에 그대로 두었다. 최영재 때문이었다.
사무실만 떨어트린 게 아니었다.
진혁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핫산이 그를 중요 업무에서 배제시키고 곽충호를 중용했다.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최영재는 군소리 없이 업무 조정을 받아들이면서 버텼다.
일처리 능력은 뛰어나니 내치기도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어야 했다.
알라딘 컴퍼니의 사장이 된 갈리부터 시작해 업무 보고를 했다.
이집트 정국은 6월 치러질 대선으로 인해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안정되어 실적이 꾸준히 늘고 있었다.
게다가 압델이 SEZ 입주와는 별도로 몇몇 군산업체에 원자재를 납품하게 해 줬다.
알쇼핑의 매출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그 속도가 완만했고, 무엇보다 적자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두운 얼굴로 보고하는 하마드는 그 이유로 ‘슈퍼 트위터’를 확실히 유인할 킬러 아이템이 없다고 했다.
이번에도 진혁은 시간이 해결할 테니 조급해하지 말라고 하고 돌려보냈다.
회사 업무에 대한 점검이 끝나자 진혁은 한국에 다녀올 생각을 했다.
그동안 너무 강행군이었던 터라 얼마간이라도 휴식이 필요했다.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을 때 소마야가 들어왔다.
“한국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한국에서요?”
“남자분인데 사장님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어요.”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소마야가 나가자 눈빛이 강한 40대 후반의 검정 양복 사내가 들어왔다.
“서진혁입니다. 앉으시지요.”
“김상균입니다.”
소파에 앉고도 김상균은 그 흔한 명함도 내놓지 않았다.
소마야가 차를 내놓고 나가자 진혁이 물었다.
“한국에서 오셨다는데, 저를 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겁니까?”
“미국인 친구로부터 들었습니다.”
“그쪽은 별로 아는 사람이 없는데, 어느 분이신지 궁금하군요.”
뻔히 이름을 묻는 줄 알면서도 김상균은 모른 척 입을 다물고 차만 마셨다.
살짝 기분이 나빠진 진혁이 일부러 시계를 봤다.
“제가 조금 후에 나가 봐야 해서요. 찾아오신 이유를 말씀해 보십시오.”
“3일 전 시나이 반도에서 한국인 관광객 세 명이 무장 단체에 납치된 걸 알고 계십니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이집트 정부에서 선거를 의식해 언론 보도를 막는 바람에 모르셨나 보군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시나이 반도는 아픔이 많은 곳이었다.
근세에 영유권을 두고 터키와 이집트가 싸웠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후 이집트령으로 강제로 귀속되었다.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아랍 유목민인 베두인족들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결정이라고 반발하며, 이집트 정부와 영토권 등 각종 이권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으로 갈등을 빚어오고 있었다.
아랍의 봄 이후의 혼란 때문에 지금 그곳은 치안 공백으로 무법지대나 마찬가지였다.
진혁이 혀를 찼다.
“지금 그곳이 어떤 상황인데 관광을 갑니까. 대체 한국 정부에서는 뭐 했답니까?”
“한국 대사관에서는 교민들에게 위험을 알리느라 관광객들에게는 제대로 상황을 전달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젊은 친구들이 배낭여행을 간 모양인데, 개중에는 여대생도 있습니다.”
여대생이 왜 그 위험한 곳에 간단 말인가.
문득 희수가 떠올랐다.
그 아이도 여행을 좋아했다. 대학 다닐 때는 방학을 이용해서 몰래 위험한 배낭여행도 몇 번이나 갔다고 했다.
그런데 시나이반도에서 납치된 사람 중에 여대생이 있다는 말을 듣자, 서진혁은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화도 났다.
“애초에 한국에서부터 관광객을 막았어야지요. 국민의 안전도 지켜 주지 못하면서 세금은 꼬박꼬박 받아가는 게 정부라고. 쯔쯧.”
김상균은 얼굴이 붉어졌지만 반발하진 못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진혁도 더 화를 내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뭔가 이유가 있어서 납치했을 텐데, 요구 조건이 뭡니까?”
“고액의 몸값과 투옥 중인 베두인의 석방입니다.”
“베두인 석방요?”
“무바라크 대통령 시절 시나이 반도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베두인족을 채포해 투옥했답니다. 그들을 풀어 달라는 거죠.”
“이집트 정부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게…… 지금은 정부가 없는 상태라 대화 상대도 마땅치 않은 상황입니다. 과도 내각과 군최고위원회가 서로 책임을 미루고 있습니다.”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진혁이 시선을 똑바로 했다.
“이쯤에서 신분을 밝혀야 다음 이야기가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만.”
“알겠습니다. 국정원의 김상균 과장입니다.”
명함을 내놓았는데 국정원 마크와 이름만 적혀 있었다. 주소나 전화번호도 없었다.
진혁은 그가 정부에서 나온 인물이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의 대책은 뭡니까?”
“……논의 중입니다.”
“대체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회의만 한답니까? 당장 특공대라도 파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미국에서 막고 있습니다. 테러범들과는 협상은 안 된다고 합니다.”
“지금 미국 눈치를 보느라 자국민의 생명을 내팽개치겠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그것이지만, 군사 행동을 감행했다가 미국의 9・11 테러 같은 일이 서울에서도 벌어질까 우려하는 시각이 많습니다. 청와대에서 국정원의 모든 활동도 중단시켰습니다.”
현재로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말이었다.
진혁은 다시 한번 화가 치밀었지만 김상균에게 화풀이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청와대가 중단하라고 했는데 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놈들이 통보한 기한은 일주일입니다. 이미 3일이 지나서 남은 시간이 나흘밖에 없습니다. 구출 작전이 결정된다고 해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위에 통보만 하고 무작정 달려왔습니다.”
“그럼 용병을 써야 한다는 건데, 자금은 있습니까?”
“이럴 때를 대비해서 관리하는 해외 계좌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 점은 걱정 마십시오.”
김상균은 무조건 뛰어들 태세였다.
진혁이 입맛을 다시다가 물었다.
“왜 접니까?”
“미국인 친구가 서 사장을 찾아가 보라고 했습니다. 여러 위험한 일을 해냈다고.”
“그 친구가 CIA에서 일합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사정사정하자 어렵게 알려 줬습니다.”
진혁이 이를 악물었다. 미국인 친구는 잭슨이었다.
욕해 줄 놈이 하나 더 늘었지만, 지금은 납치된 한국인을 구하는 게 급했다.
만약 희수가 여행 중에 납치되었는데 남들이 다 구경만 한다면 자신의 마음은 어땠을까.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물었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공항에서 바로 오느라 아직 숙소는 정하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나가 우측으로 걸어 내려가면 킹호텔이 있습니다.”
“지금은 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우리 둘이 총 들고 무작정 시나이 반도로 뛰어가자는 겁니까? 뭘 알아야 가도 갈 것 아닙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