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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77화 (77/307)

77화. 양다리 걸치기

“어, 지민 씨?”

“사장님!”

지민도 상당히 놀란 듯 커다란 눈이 더 커졌다.

“사무실 일은 어떻게 하고 맨날 출장만 다니세요?”

“이놈아, 오늘은 토요일이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지민에게 뭔가 배우시던 아버지가 한 소리 했다.

진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제가 아직 시차 적응 중이라서요. 근데 주말에는 좀 쉬시지.”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출고 관리를 소홀히 했더니 재고가 도대체 맞지 않아서 전화로 물어봤더니 이렇게 직접 내려왔다. 참 착하기도 하지.”

“아니에요. 제 일인데요.”

아버지의 칭찬에 지민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젓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럼 일 보세요. 전 어머니 가게에 좀…….”

“가긴 어딜 가? 재고 파악해야지.”

“제가요?”

“그럼 이 나이에 내가 사다리 오르내리랴?”

결국 붙잡혔다.

함께 창고로 가 지민이 출력한 재고 현황을 불러 주면 진혁이 수량이 맞는지 직접 확인했다.

사다리를 오르내리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나니 다리가 뻐근했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어머니가 도착해 그만둘 수 있었다.

“가게는 어떻게 하고요?”

“연희에게 맡겨 놓고 왔다. 지민이 왔다는데 맛있는 거라도 사 줘야지.”

“헤헤. 역시 엄마밖에 없어요.”

“지민이? 엄마?”

둘이 다정스럽게 팔짱을 끼는 모습에 진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우리 둘이 엄마 딸 하기로 했다.”

“아니, 아들 의견도 묻지 않고 그러는 게 어디 있어요?”

“일 년에 한두 번 보기도 어려운 아들보다 매번 찾아와 거들어 주는 지민이가 낫지.”

“아니, 아버지!”

“실없는 소리 말고 가자. 지민이 배고프겠다.”

아버지마저 김지민을 먼저 챙겼다.

‘고생은 내가 많이 했는데. 씨…….’

술을 마실 거라 택시를 타고 강릉항으로 가서 회를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회와 소주라 그 맛이 일품이었다.

정신없이 먹는 진혁과 달리 지민은 부모님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진짜 가족 같았다.

오히려 진혁이 낯선 손님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골이 난 진혁이 시계를 보고 말했다.

“지민 씨, 이제 서서히 서울로 올라갈 시간 되지 않았어요?”

“걱정 마세요, 사장님. 오늘은 집에서 자기로 했어요.”

“예?”

어머니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연희가 마침 속초 가야 한다고 해서 오늘은 집에서 같이 자기로 했다.”

아버지도 한소리 덧붙였다.

“내일 나머지 재고 맞춰야지.”

“헐.”

졌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둘을 차례로 쳐다보고 말했다.

“그리고 너희 둘, 사장님이 뭐니. 이제 내 딸이 되었으니 호칭부터 바꿔라.”

“어머니, 그건 아니지요.”

“사장님 말씀이 맞아요.”

“당장 오빠, 동생 하라는 게 아니야. 하지만 사장님이란 호칭은 내가 듣기에도 거북하다.”

아버지까지 나서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이상 버티기도 힘들었다.

얼마간 더 식사를 하고 부모님은 진혁에게 지민을 맡기고 먼저 집으로 가셨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진혁은 테사로사로 갔다.

한국 최초의 커피 공장답게 현대식으로 넓게 지어진 일반 카페와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빛바랜 목재와 얼기설기 지어진 천장은 오히려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알려지긴 전이라 손님은 많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차분해서 연인들이 찾기에는 좋은 장소였다.

김지민도 신기한지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일 원산지의 원두만을 사용하는 싱글 오리진이 가지는 독특한 향미에 김지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와, 여기 커피 짱이네요. 친구들이랑 꼭 와 봐야겠어요.”

“오려면 일찍 오셔야 할 겁니다. 나중에는 너무 유명해져서 이 맛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그건 맞아요. 유명해져 사람이 몰리면 처음의 느낌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둘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곳들을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진혁이 지민의 고양이 눈을 빤히 쳐다봤다.

“고마워요.”

“뭐가요?”

“하나뿐인 자식이라, 부모님만 두고 나가 있는 게 항상 마음에 걸렸거든요. 지민 씨가 많이 챙겨 주셔서 부모님이 행복하신 것 같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사장님이 자꾸 그러면 저 부담스러워서 못 와요.”

진혁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듣고 보니 자신도 어색했다.

“아까 부모님 말씀 들으셨죠?”

“예?”

“사장님이란 호칭 쓰지 말라셨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럼 오빠라고 부를래요?”

“에이, 징그럽게.”

질겁한 지민의 모습에 진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놀리실 거예요?”

“아닙니다. 그래도 호칭은 바꿉시다. 부모님도 그렇고 나도 불편해서요.”

“…….”

“우리가 업무 관계로 보는 게 아니잖아요.”

“알았어요. 앞으로는…… 진혁 씨라고 부를게요.”

“크크크. 역시 듣기 좋네.”

“으이그, 느끼한 아저씨 같아요. 그러지 마요.”

진혁은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조금 더 즐거운 대화를 나누다가 너무 늦어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늦게 일어난 자신과 달리 지민은 새벽같이 일어나 혼자서 재고를 맞추고 있다는 어머니 말씀에 고양이 세수만 하고 얼른 창고로 달려갔다.

사다리 타고 올라가는 지민을 얼른 끌어내리고 대신 올라갔다.

힘들었지만 중간 중간 진혁 씨, 진혁 씨, 부르는 소리에 이상하게 힘이 났다.

결국 열심히 해서 재고 파악을 끝내고 맛있는 것은 서울에 가서 사 주겠다며 지민을 막차에 태워 보냈다.

그 후에는 속초로 가 할아버지와 함께 이틀을 보낸 뒤 서울로 올라왔다.

* * *

정진호의 자택은 한강이 보이는 한남동에 있었다.

문을 열어 준 정인영의 얼굴은 활짝 펴 있었다.

지난 주총에서 그토록 원하던 화장품 사업 진출을 승인받고 부문장을 맡게 됐다.

스페이스 워커의 성공으로 언론에서 재계의 신데렐라로 칭찬하는 기사가 계속 나오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로 인해 태후 패션의 주가가 10% 이상 상승했다.

그 일로 정진호가 저녁 초대를 해서 진혁으로서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잘 가꾸어진 잔디밭 정원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웃는 얼굴의 정진호와 귀부인이 서 있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아 밥이나 한 끼 같이 먹자고 불렀어. 바쁜 사람을 부른 거 아닌지 몰라.”

“아닙니다. 쉬는 중이었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호영이도 알지?”

정호영도 함께 있었다.

“반갑습니다.”

“가족끼리 식사하는 자리에 제가 눈치 없이 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다 같이 모였으니 제가 더 고맙죠. 아마 올해 들어 처음인 것 같네요.”

“음식 식는다. 어서 들어가자.”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입맛에 맞아 맛있게 먹었다.

“잘 먹는군.”

“제 입맛에 딱 맞습니다.”

“아주머니가 전라도 분이시라 솜씨가 있으세요.”

정인영의 말에 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뒤로 했다. 앞치마를 두른 두 분이 조용히 서 있었다.

진혁은 고개를 숙이고 식사를 마저 했다.

정진호 가족들은 입이 짧은지 많이 먹지 않아 진혁 앞의 그릇만 비자, 지켜보던 아주머니들이 눈치껏 가져다줬다.

식사를 마치고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셨다.

정호영은 맞은편에, 정인영은 옆에 앉았다.

정진호가 말했다.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인영이가 이번에 화장품 사업 부문장을 맡게 됐어. 자네의 도움이 컸다는 것을 아네.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인영 씨가 스스로 이룬 성과입니다. 저는 옆에서 조금 조언해 준 것뿐입니다.”

“그게 중요하지. 예전에는 한국에서 사업하는 데 강력한 리더십만 있으면 충분했어. 하지만 이제는 거기에 뛰어난 조력자가 더해져야만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인영이 옆에 자네가 있어 든든해.”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는 했지만 왠지 기분은 묘했다.

정진호가 말을 이었다.

“호영이 일도 같이 축하해 주었으면 좋겠어서 불렀네. 호영이가 이번에 이라크에서 아주 큰일을 해냈어.”

“……?”

“오빠가 이번에 석유 공사와 함께 이라크의 가스전 두 곳의 개발권을 따냈어요.”

인영이 빠르게 설명을 해 줬다.

한국석유공사와 태후 그룹 컨소시엄이 지난달 바그다드 국제 입찰에서 프랑스 토털과 터키 컨소시엄을 제치고 개발권을 낙찰받았다.

아카스와 만수리아 가스전 두 곳이었는데, 매장량이 우리나라가 6년 가까이 사용하는 가스에 해당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며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특히나 규모가 큰 아카스 유전은 태후가 직접 개발을 주도하는 주관 운영사로 참여하는 쾌거도 이뤘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 호영이가 태후 에너지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그 일을 주도하게 됐네. 같은 중동이니 가끔 만나서 친하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알겠습니다.”

답을 하는 진혁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라크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정호영도 얼굴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진혁을 집에까지 초대한 것도 이해가 안 됐지만, 그에게 자신을 부탁하는 투로 이야기하는 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정진호 앞이라 참아야 했다.

두 사람의 속마음이 그러니 분위기가 살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앞으로도 자주 볼 테니 오늘은 이쯤 하지.”

“다시 한번 초대해 주시고 좋은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진혁이 인사를 하고 나가자 인영도 배웅해 주겠다며 따라 나갔다.

둘만 남자 정진호가 얼굴이 굳어 있는 정호영을 보고 물었다.

“내가 서 사장을 집에 불러 인영이와 너를 부탁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느냐?”

“아닙니다.”

“그런 놈이 얼굴 표정은 그게 뭐냐?”

“죄송합니다.”

“넌 내 뒤를 이어 태후를 물려받을 놈이다. 일개 부서나 한 회사를 이끄는 게 아니란 말이다.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너는 20만 명이 넘는 임직원을 거느릴 신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명심하겠습니다.”

정호영에게는 정진호는 항상 무서운 아버지였다.

“너 스스로를 갈고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널 옆에서 지켜 줄 사람을 만드는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저놈은 보통 놈이 아니다. 너 때문에 버려진 카이로 지사에서 그 짧은 시간에 놈이 이룬 게 적지 않다. 그 와중에 인영이까지 키웠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인영이와 묶어 준다면 너한테 평생 큰 도움이 될 거다. 세상을 넓게 보고 인재를 보는 눈을 높여야 한다. 일은 저런 놈들이 하고 넌 그들을 관리만 하면 된다. 서진혁은 그중에 가장 적합한 놈이다.”

“알겠습니다.”

순순히 답하는 것과는 달리 정호영의 얼굴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 * *

그 시각, 진혁은 인영과 함께 집 근처의 카페에 마주 앉아 있었다.

“진혁 씨가 들어올 줄 알았으면 일정을 늦추는 건데, 아쉬워요.”

“사업의 성패를 결정할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인데 그러면 안 되죠. 이젠 진짜 사업가가 된 건데 일부터 챙겨야지요.”

인영은 진혁의 조언을 받아들여 미리 중국의 SNS 웨이보 등 소셜 스타들과 미리 접촉해 놓았고, 이번에 가서 계약서까지 작성할 예정이었다.

“설레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해요.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지금까지 잘해 왔고 이번 일도 잘하고 있으니 실패하는 게 이상합니다. 그러니 자신을 갖고 생각대로 해요. 스페이스 워커를 성공으로 이끈 것처럼.”

“고마워요. 진혁 씨와 있으면 힘이 나요. 언제까지나 이렇게 내 옆에서 좋은 이야기 많이 해 주세요.”

“그러려면 이번 일 잘 마무리 짓고 와요. 난 능력 없는 사람은 별로니까.”

“좋아요. 멋지게 해낼게요.”

인영이 손바닥을 내밀자 진혁이 세차게 마주쳤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

“아빠가 오빠까지 부르실 줄은 몰랐어요, 좋은 사이도 아닌데. 진혁 씨가 오빠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고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그런 건 오빠 때문이 아니라 이라크란 말 때문이었습니다.”

“이라크가 왜요?”

“요즘 그쪽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들어서요. 언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곳입니다. 무사하길 바랄 수밖에 없죠. 잘될 겁니다.”

진혁이 적당히 마무리 지었다. 자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 * *

다음 날 아침, 호텔을 나서려던 진혁의 걸음이 멈췄다.

의외의 인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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