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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78화 (78/307)

78화. 먹는 게 중요

아침부터 진혁을 찾아온 이는 국정원 과장 김상균이었다.

“이렇게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인사 받을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마침 커피를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같이 가시지요.”

로비 한쪽에 마련된 커피숍으로 갔다.

김상균이 직접 주문한 커피를 가지고 왔다.

“최소한 전화라도 주실 줄 알았습니다.”

“전화할 일이 없어서요.”

“세 분 다 무사히 귀국하셨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 말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안 생기도록 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일로 식겁한 외교부가 여행객 관리를 철저히 한다고 합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진혁의 행동에 김상균이 미소를 지었다.

“일을 너무 깔끔하게 처리해 주신 덕분에, 저희 국장님이 차장님에게 불려가 추궁당하셨지만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알카에다를 싫어하는 베두인족이 구한 것으로 아는데요. 그리고 그게 추궁할 일인지도 의문입니다. 오히려 그걸 알린 과장님께 포상이라도 주는 게 맞지요.”

“국정원이 그렇습니다. 여기저기 눈치…… 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진혁이 일부러 시계를 보며 말했다.

“다음 약속이 있어서요.”

“제가 불편하신가 봅니다.”

“그렇기보다는 딱히 더 할 이야기가 없어서요.”

“알겠습니다. 오늘은 인사하러 온 거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언제든 제가 필요하면 전화 주십시오.”

이번에 준 명함에는 주소는 물론 전화번호까지 적혀 있었다.

대충 주머니에 집어넣고 악수하고 헤어졌다.

* * *

진혁은 을지로의 동성F&B로 가서 김상조와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구룡포 공장까지 내려갔다.

그곳에서 직원들 회식하라며 금일봉을 주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진성여대 근처의 이모네로 갔다.

안을 둘러보니 지민은 아직 도착 안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 주방에서 이모가 나와 물을 가져다주었다.

“안녕하세요.”

“누구?”

“지민 씨랑 같이 왔었는데.”

“아, 지민이 남자친구.”

“이왕이면 애인이라고 해 주심 더 좋은데.”

“어머, 어머. 벌써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거야?”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진담으로 들었다.

내친걸음이라 궁금한 걸 물었다.

“지민 씨가 학교 다닐 때 좀 유명했었나 봐요. 여기 저기 아시는 분이 많더라구요.”

“좀 유명한 게 아니라 아주 대단했어.”

“그래요?”

“그 당시 진성여대 여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애들이 역대 진성여대 퀸카 중 한 명이네 어쩌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탑 오브 더 퀸카야. 여신 중에 대장이란 말이지. 내 발음 어때?”

“아주 굿입니다. 미국인이 왔다가 말도 못 하고 가겠는데요.”

“그럼, 내가 여기서 밥집 한 게 얼마인데.”

“최고입니다. 그건 그렇고, 그때 지민 씨 얘기 좀…….”

부탁할 필요가 없었다. 이모가 아예 앞자리에 앉아 지민의 과거에 대해 낱낱이 까발렸다.

“한 번은 지민이 보려고 S대하고 K대 남학생들이 여기 왔다가 싸움이 붙었어. 경찰까지 출동하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그리고 또…….”

“이모!”

어느새 김지민이 뒤에 도착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고, 내가 미쳐. 장사해야지.”

“자꾸 이러시면 담에 진짜 안 와요.”

“내 잘못 아니야. 네 남친, 아니, 애인이 먼저 물어본 거야.”

“애인 아니라니까요.”

“첨엔 다 그렇게 이야기해. 내가 이 생활이 몇 년인데.”

“으이그, 여기 오자고 한 내가 잘못이지.”

“그만 화내고 앉아요. 좋은 분인데요.”

지민은 음흉한 웃음을 띠고 있는 진혁이 더 미웠다.

오늘도 이모가 내온 밥은 맛있었다.

“난 맛있어 좋긴 한데…… 지민 씨에게 더 맛있는 거 사 줘야 하는데.”

“저도 맛있어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많이 드세요.”

“이미 많이 먹었어요. 숙소를 이 근처로 옮길까 봐요. 그럼 뭘 먹을까 고민 안 해도 되고.”

“그건 안 돼요.”

“왜요?”

“절대, 절대 혼자 오면 안 돼요. 이모가 또 무슨 소리를 할 줄 모른단 말이에요.”

“그럼 맨날 같이 와서 밥 먹으면 되겠네.”

자신을 놀리는 걸 눈치챈 지민이 째려봤다.

“자꾸 그러면 사장님 안 만나요.”

“어허. 그새 잊고 또 사장님이래. 뭐라고 하기로 했죠?”

“……진혁 씨.”

“어머, 어머. 맞네, 맞아. 애인.”

귀도 밝은 이모였다.

결국 얼굴이 빨개진 지민이 서두르는 바람에 급히 나와야 했다.

이모가 몰래 윙크를 하는 모습에 진혁도 손을 뒤로 해서 엄지를 치켜들었다.

전에 갔던 커피숍으로 가면 또 같은 일이 벌어질까 걱정한 지민 때문에 한참이나 걸어 한적한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주문한 커피를 가지고 온 진혁이 앉으며 물었다.

“왜 늦었어요?”

“본부장님이 갑자기 회의를 잡아서요. 아, 한 팀장님이 새로 발족한 스페이스 워커 사업본부장님이 되셨어요. 부장님으로 진급하셨고요.”

“와, 축하할 일이네요. 그런데 지민 씨는요?”

“저도 대리로 진급했어요. 사장, 아니, 진혁 씨 덕분이에요.”

“우와! 그럼 그냥 넘어가면 안 되죠. 당연히 한턱 쏘셔야지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 오늘 바로 사 드릴게요.”

“오늘은 곤란한데요.”

“왜요? 약속 있어요?”

“이미 맛있는 것을 배 터지게 먹어서요.”

“피.”

큰 눈으로 흘겨보는 게 예술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얼른 화제를 바꿨다.

“지민 씨는 꿈이 뭐에요?”

“행복하게 사는 것.”

“그거 너무 포괄적이잖아요. 일로 성공한다든지, 돈을 많이 번다든지, 그런 구체적인 건 없어요?”

“성공도 돈도 결국 행복하기 위해 원하는 거잖아요. 행복을 포기하고 그걸 얻으면 뭐 해요. 행복할 수 있다면 그런 건 충분히 포기할 수 있어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나이에 갖기 쉽지 않은 생각이기도 했다.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아쉬웠다.

떠나기 전에 이모네 집에서 대리 진급 파티를 하기로 하고 지하철역에서 헤어졌다.

* * *

다음 날은 모스크로 가서 카심을 만났다. 마침 나흐얀이 함께 있어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시죠?”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할 말이 있었습니다.”

“……?”

“울라마께서 귀국하시면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 귀국하셨군요. 인사도 못 드리고 아쉽네요. 점심시간인데 식사나 같이 하시지요.”

진혁이 짧게 끊고 화제를 돌렸다. 인사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였다.

헌데 표정이 별로였다.

카심이 대신 대답했다.

“말은 고맙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소.”

“무슨 일 있습니까?”

“나야 일반 신도라 모르고 먹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믿고 외부 음식도 먹지만, 이맘이 그럴 수는 없지요. 어떤 사람이 어떻게 만든 건지도 모르는 음식을 함부로 먹는 건 안 됩니다.”

“……!”

할랄은 단순히 허용된 식재료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도축부터 처리, 가공의 전 과정을 율법에 따랐는지 따졌다. 음식점의 경우 조리하는 주방장도 그 범주에 속할 정도로 까다로웠다.

결국 한국에는 무슬림이 믿고 먹을 음식점이 없다는 말이었다.

잠시 양해를 구한 진혁이 핸드폰을 꺼내 박이동과 통화를 했다.

몇 가지를 확인하고 김상조 이사와 함께 이쪽으로 빨리 오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궁금한 표정을 짓는 나흐얀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제가 전에 구입한 빌라를 고쳐서 식당으로 꾸밀까 합니다. 울라마께서도 떠나셨고 다른 분들은 월세 계약이니 비우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카심이 답답해서 한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항상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무슬림을 위해서만 하는 일은 아닙니다. 이태원은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의 필수 방문 코스입니다. 무슬림이라면 모스크가 있는 이곳을 당연히 먼저 찾겠지요. 할랄 인증을 받은 음식점이 바로 앞에 있다면 무조건 찾아가지 않겠습니까?”

“음식점에 할랄 인증을요?”

“그래야 무슬림이 믿고 드실 수 있죠. 그것 때문에 할랄 인증 기관 등록을 받으시라는 거였습니다. 앞으로 한국을 찾는 무슬림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지 않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관련 사업도 늘어날 테니, 제게 손해나는 일도 아닙니다.”

나흐얀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혁은 생각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먼 미래까지 보고 있었다.

진혁이 막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서진혁입니다.”

-서 사장, 그럼 안 되지. 일방적으로 거래를 끊는 법이 어디 있어?

“누구십니까?”

-두리식품 진갑석이야. 당신 물건 만들어 주느라 투자한 게 얼마인데 갑자기 납품처를 바꾸는 게 어디 있어? 그렇게 사업하는 게 아니야.

“우리 제품을 위해 들어간 돈은 한 푼도 안 빼고 올려 달라는 대로 다 줬잖습니까? 발주한 물량도 모두 대금 치루고 가져갔고요.”

-미리 확보한 콩은 어떻게 하고. 이건 처리해 줘야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매번 가져가다가 주문이 없자 지레짐작으로 전화한 모양인데, 전혀 기본이 안 되어 있었다.

게다가 곡물 값이 계속 오르고 있어서 현물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이득을 볼 상황이었다.

나흐얀 앞만 아니면 당장이라도 욕을 하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콩 처리가 문제라면 제가 매입가에 다 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너 그렇게 사업하는 거 아니다. 내가 가만 안 둔다.

“진 사장님이나 그렇게 사업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어디서 협박질이야. 말로 하지 말고 직접 얼굴 보고 해.”

-너 이 자식!

“전화 끊어, 병신.”

결국 욕을 내뱉고 끊었다.

진혁의 격한 반응에 카심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누구 전환데 그렇게 받아요?”

“산청의 두리식품 사장입니다. 추가 오더를 안 준다고 행패네요.”

“그런 싸가지 없는 놈 봤나? 지가 한 짓을 생각해야지. 날 바꿔 주지 그랬어요?”

카심이 오히려 흥분해서 떠들었다.

그때 박이동이 김상조를 데리고 도착하지 않았다면 진혁의 전화를 빼앗아 싸울 판이었다.

인원이 다 모이자 무슬림 식당을 짓기 위한 구체적인 논의를 했다.

처음에는 다 허물고 깨끗한 현대식 건물로 지으려고 했지만 진혁이 반대했다.

낡고 빛바랜 주변의 건물과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위화감만 줄 수 있었다.

철거를 최소한으로 해서 빈티지풍을 유지하고 내부 인테리어는 물론 가구도 무슬림 식으로 하기로 했다.

세월의 흔적을 간직해야 하니 소품들은 카심이 이집트로 돌아가는 대로 골동품상을 뒤져 구하기로 했다.

“이 일은 김 이사님이 맡아서 진행해 주십시오. 무슬림에 대한 조언과 할랄 인증은 나흐얀 이맘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건물에 대한 문제는 박 선생님이 처리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추가적으로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진혁이 먼저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은 남아서 세부적인 일을 의논했다.

태후빌딩 근처의 한우 전문점으로 가자 한지철과 희준이 먼저 와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늘은 희준이 한지철을 축하하는 자리라며 기어코 소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자식이 형님들을 기다리게 하고 있어. 후래자 삼배 알지?”

진혁은 세 잔을 먹고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축하의 말을 하는 진혁에게 한지철이 한숨을 쉬었다.

“사업을 책임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절감하고 있다. 화장품 부문장으로 옮기신 정 이사님이 참 대단하셨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나이도 어린 분이.”

“호부 밑에 견자 없다고, 태후가의 일원 아닙니까? 그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희준이 끼어들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진혁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게 따지면 자수성가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 해. 다른 것 없어요. 지금처럼 남의 의견을 귀담아 듣고, 신중히 결정하고, 결정되면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시면 됩니다.”

“그 결정이 쉽지 않다는 게 문제지. 당장 앞으로 사업 확대 방향부터 잡아야 해. 내가 맡기 전에 워낙 크게 성공해서, 위에서 거는 기대가 너무 커.”

“그건 이미 이야기했잖아요. 학생, 청년, 중장년, 그리고 전 세대.”

“그럼 먼저 청년층까지 넓혀야겠네.”

“지민 씨가 처음부터 잡았던 타깃이었으니 그에 대한 대책도 생각해 둔 게 있을 겁니다.”

“그래. 너와 지민 씨가 있어 든든하다. 한잔하자.”

그날은 한지철도 기분이 좋아 끝까지 술을 마셨다.

* * *

계속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진혁이 몸 여기저기를 뒤져 겨우 핸드폰을 찾았다. 눈도 뜨지 않고 열었다.

“여보세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때 같은 소리가 다시 울렸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고통을 참으며 억지로 눈을 떠 주변을 둘러봤다.

호텔방 침대였다.

‘이런.’

놀란 진혁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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