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검은 머리 짐의 선택
벨 소리가 나는 침대 아래 바닥을 보니 희준이 대자로 뻗어 있었다.
한지철이 먼저 가고 희준과 함께 계속 술을 먹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호텔까지 왔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희준의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였다.
“헉.”
시계를 본 진혁이 얼른 침대에서 내려와 희준을 흔들었다.
“야, 일어나.”
“아, 좀 놔둬.”
“9시가 넘었어. 출근해야지.”
“헉! 쓰벌. 좆됐다.”
출근이라는 말에 희준이 벌떡 일어나 여기저기 널려 있는 옷을 챙겨 서둘러 나갔다.
혼자 남은 진혁도 씻고 강릉으로 출발했다.
* * *
강릉에서 이틀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온 진혁은 무슬림 식당 준비 작업을 점검하고 카심과 함께 한국을 떠났다.
그들은 바로 이집트에 가지 않고 젯다에 들렀다.
알라위 전통 시장으로 가자 압둘라가 기다리고 있다가 맞이했는데, 대접이 극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혁 덕분에 상인회장이 되었고, 최근에는 곡물 선매입 건으로 덩달아 큰 이득을 얻어 벌써부터 연임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사장실 소파에 앉은 진혁이 물었다.
“요즘 시장의 곡물 가격은 어떻습니까?”
“작년 말 대비 50% 이상 올랐는데 아직도 계속 상승 중에 있습니다. 이러다가 금보다 더 비싸지는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거침없이 오르고 있습니다.”
“금은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지만 곡물 없이는 살 수 없으니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아프리카의 가뭄까지 겹쳐, 거기는 벌써 두 배가 되었답니다. 요즘 그쪽 중간 상인들이 수시로 찾아와 물량을 구해 달라고 하는 통에 아주 골치 아플 지경입니다.”
기준이 되는 국제 시세는 하나지만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 현지 시세는 제각각이었다.
부유한 나라는 정부 차원에서 곡물을 사들여 가격 조정을 한다. 하지만 아프리카 같은 빈국은 그러지 못하니 국제 시세보다 훨씬 더 높은 가격이 형성됐다.
“특히나 옥수수 가격의 상승세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가파릅니다. 그에 반해 선물 가격은 계속 지지부진한 게,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말이 많습니다.”
“곡물 메이저들의 농간이지요. 옥수수 선물이 오를 거라고 소문내고 실제로는 현물로 작전을 펼친 겁니다.”
“옥수수가 주식인 아프리카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도 생기고 있다고 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콩이 아니라 옥수수를 매입해 둘 걸 그랬습니다.”
“욕심이 과하면 언젠가는 탈이 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이후 진혁은 한동안 압둘라에게 시장의 곡물 가격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수니파의 종주국이면서 중동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특히 젯다는 중동 및 아프리카 역내무역의 중심지라, 이곳의 가격만 알아보면 이 지역의 시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진혁이 막 일어나려는 순간 JK모건의 스미스로부터 급히 보자는 연락이 왔다.
비행기 탈 시간이 촉박해 공항의 VIP 라운지에서 만났다.
스미스가 보자마자 머리부터 숙였다.
“먼저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저의 잘못된 판단으로 수익을 제대로 얻지 못했습니다. 그때 따라서 옥수수 현물이나 콩 선물에 투자했어야 했는데…….”
“투자의 결과는 신도 모른다지 않습니까. 스미스 씨의 잘못이 아니니 맘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다른 투자자들의 항의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서 본사에서 옥수수 선물을 매도하고 콩 선물로 갈아타라며 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옥수수 선물 가격은 더욱 더 약세를 면치 못할 겁니다. 함께 매도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스미스는 상당히 위험을 감수한 발언을 하고 있었다.
내부 정보를 알려 주고 먼저 매도하게 해 손실을 줄이도록 특혜를 주고 있었다. 다른 투자자가 알면 당장 고소해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스미스가 진혁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홀딩하겠습니다.”
“내일이면 당장 매도 물량이 쏟아져 나와 급락합니다.”
“수렴 이론이라고 아실 겁니다. 현물과 선물의 괴리는 결국 서로 같은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압니다만, 현물 가격도 급락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고요. 탑승 시간이 다 되어서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진혁이 카심과 함께 떠났는데도 스미스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주식은 확률 싸움이다.
선물이 현물을 따라 급상승할지, 현물이 선물을 따라 급락할지는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진혁은 100%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검은 머리 짐’이었다.
스미스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본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진혁을 택하기로 했다.
* * *
진혁이 알라딘 빌딩에 도착하자 사장들이 이미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한 진혁이 하마드에게 빠르게 물었다.
“신제품 준비는 어떻게 됐습니까?”
“병아리콩에 각종 양념을 첨가한 하무스와 누에콩으로 만든 풀메다메스를 대, 중, 소 사이즈로 개발해 시식회를 거쳐 생산까지 마쳤습니다.”
“시장 물가 기준으로 원재료 가격이 어떻게 됩니까?”
“100그램에 0.4달러 정도 됩니다. 콩이 가장 많이 뛰었고, 다른 가공 식품 가격도 오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책정한 가격은요?”
“100그램 기준 0.5달러로 약간 비싸지만 가격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경쟁사 제품은요?”
“0.8달러 수준인데 가격 인상 움직임이 있습니다. 우리와 달리 원재료를 확보하지 못해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진혁의 시선이 갈리에게 향했다.
“광고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마르와 씨가 전업주부와 커리어 우먼으로 나오는 광고 두 편의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방송국과 광고 계약도 완료되어, 사장님의 지시만 떨어지면 바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진혁이 마지막으로 핫산까지 둘러보고 손을 마주쳐 집중시켰다.
“방송 광고에 맞춰 알쇼핑에도 팝업 창을 띄우고 상품을 전면에 배치하세요. 슈퍼 트위터들에게도 별도 메일로 다시 한번 알리시고요.”
“알겠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공격의 시간이 왔습니다.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최대한 강력하게, 최고로 빨리 소비자들에게 우리 제품을 각인시켜야 합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새로운 세상을 열어 봅시다.”
진혁의 지시에 세 명의 사장은 물론 알라딘의 전 직원이 알쇼핑 프로젝트를 위해 움직였다.
광고 내용은 단순했다.
마르와가 식사 준비를 위해 시장에서 장을 보며 급등한 가격에 놀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콩을 사 와 힘들게 조리하고 쌓여 있는 설거지에 한숨 쉬는 장면이 1부였다.
2부는 음악을 들으며 여유롭게 쉬다가 핸드폰으로 알쇼핑에 접속해 통조림을 주문하는 모습.
도착한 통조림을 개봉해 간단히 식사 준비를 마치고 남는 시간은 TV 시청을 하며 한가하게 지내는 장면이다.
‘당신의 선택은?’
광고의 마지막 카피 문구에 소비자가 선택한 것은 당연히 통조림이었다.
처음에는 일하는 여성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구매가 빠르게 늘어났다.
하지만 한 달도 되기 전에 일반 가정에서까지 알라딘의 통조림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마르와의 광고와 슈퍼 트위터의 역할도 컸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계속된 곡물 가격의 상승으로 이제 콩을 사서 조리하는 것보다 조리된 알라딘의 통조림을 구매하는 게 더 싸졌기 때문이었다.
경쟁사들은 원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가격을 인상해 더 이상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고, 일부 제품은 이집트 시장에서 판매를 중단했다.
콩 통조림류만 대박을 터트린 게 아니었다.
주문 금액에 따른 인센티브를 추가로 시행한 덕분에 알라딘 화장품은 물론 협력사로 입점해 있는 유니로브의 생필품과 베링하임의 의약품 등도 덩달아 매출이 뛰어 급히 공수해 와야 했다.
한국의 구룡포 공장에서 만들어 가져온 고래표 생선 통조림도 입소문을 타면서 심심치 않게 팔려나갔다.
SEZ의 통조림 공장은 3교대 풀로 돌아가고 있었다.
소비자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알라딘 통조림이 이집트 가정의 식탁을 빠르게 점령해 갔다. 이제 알쇼핑을 모르면 이집트 국민이 아니라고 할 정도였다.
그사이 공장의 이집트 근로자들의 기술력이 안정적인 수준으로 올라가 권기남 공장장과 한국의 기술자들은 돌려보냈다.
김상조에게 따로 위로금을 지급하라는 지시도 잊지 않았다.
회의실에 모인 사장단의 얼굴에는 피곤이 묻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맑았다.
“가입 회원은 100만 명이 넘었고 매출은 열 배 이상 급상승했습니다.”
“다들 고생이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사장님 노고가 제일 많으셨습니다. 공장을 세우고 곡물을 선매입한 것은 신의 한 수였습니다.”
“맞습니다. 솔직히 팔리지도 않는데 제품만 잔뜩 생산하고 있어서 잠이 안 왔거든요.”
“직원들 모두 알라딘에 근무하는 것을 긍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의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었다.
역시 성공하니 좋았다.
“이건 누구 하나가 잘해서 이룬 성공이 아닙니다. 여기 계신 사장님들과 전 직원, 그리고 슈퍼 트위터까지. 알라딘의 모든 식구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직원들도 고마워할 겁니다.”
“그래서 성과도 나눌 생각입니다. 갈리 사장님이 직원들 성과급 계획을 세워 보십시오.”
“성과급을요?”
“함께 이룬 일입니다. 당연히 과실도 나눠야지요. 섭섭지 않게 책정하세요.”
“고맙습니다.”
세 사람의 얼굴에 탄복의 표정이 떠올랐다.
지금도 알라딘의 급여와 복지는 타 외국 기업보다 좋았다. 거기에 특별 성과급까지 지급한다면 직원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하마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뭡니까?”
“우리 제품이 리비아의 암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일부 슈퍼 트위터를 통한 대량 구매 물량이 그쪽으로 흘러간 것 같습니다. 우리 제품의 가격이 낮아서 벌어진 일입니다.”
다들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막아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타이밍이 안 좋았다.
매출이 계속 상승 중이었다. 여기서 슈퍼 트위터의 구매를 제한한다면 오히려 잃는 게 더 많았다.
한참 고민하던 진혁이 말했다.
“지금은 행동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계속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진실 여부를 떠나 알라딘의 공신력에 흠집이 될 수 있습니다.”
“일단 누가 물건을 되파는지 철저히 조사부터 하세요. 그러면서 영향을 최소화할 방법을 강구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언젠가는 발생할 문제였으니 너무 마음들 쓰지 마시고 지금은 매출 증대에만 집중하세요. 이만 나가들 보세요.”
사장들을 내보낸 진혁이 고민에 빠져들었다.
진혁은 사장실에서 전날의 매출과 접속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급상승하던 매출이 며칠간 답보 상태였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신규 회원 유입이 뚝 끊겼다는 것이었다. 통조림의 약효가 다 했다는 반증이었다.
직원들이 현재의 성과에 흥분하고 있을 때 진혁은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소마야가 들어왔다.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잠시 후 한 남녀가 들어왔는데, 중년남성은 성직자 복장을 하고 있었고 젊은 여성은 흑인이었다.
“서진혁입니다.”
“아메드입니다. 한국에서 큰 신세를 졌습니다.”
“아, 서울 모스크의 울라마시군요. 서로 엇갈려서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소식을 통해 서울에서 또 좋은 일을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무슬림으로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 사업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 그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그런데 이분은?”
진혁이 아메드의 입을 막기 위해 얼른 흑인 여성에게 시선을 주었다.
“일한 칼리파입니다. 미국에서 왔습니다.”
“일한 씨는 소말리아 난민 출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아버지와 함께 무슬림 인권 운동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제게 무슨 일이신지요?”
그 순간 갑자기 일한이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이들을 살려 주세요. 흐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