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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82화 (82/307)

82화. 승승장구

“놀랐습니다.”

“기다리기 심심해서 먼저 한잔하고 있었어.”

“아무리 우리가 친한 사이라고는 하지만, 주인 없는 방에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시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빈 잔에 알아서 술을 따라 마시는 진혁의 능청스런 말에 잭슨이 인상을 확 썼다.

“그렇게 예의를 아는 사람이 느닷없이 전화해 국가 기밀을 유출하라고 해?”

“그땐 사정이 그랬잖습니까? 오랜만에 만났는데 일단 건배부터 하시죠.”

잔을 부딪치면서도 잭슨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때 생각하면 다시는 상종도 하기 싫어.”

“그래도 이렇게 오셨지 않습니까? 그만 화 푸십시오. 서로 목숨을 의지한 동지 아닙니까?”

“으이그.”

진혁의 거듭된 넉살에 잭슨이 마침내 굳은 표정을 풀었다.

잭슨의 빈 잔을 채워 줬다.

“아직도 리비아에 계시는 겁니까?”

“자네도 이제 여기 사정은 알 것 아닌가? 어렵게 도와 카다피를 쫓아냈더니, 이제 지들끼리 치고받고 있는데 언제 끝날지 몰라.”

“이럴 때는 그냥 내버려두는 게 상책입니다. 싸우다 지치면 알아서 해결할 겁니다. 괜히 끼어들어 말리면 싸움만 길어지게 하는 겁니다.”

“끙.”

태평한 말에 잭슨이 앓는 소리만 했다.

자기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백악관의 생각은 달랐다. 빌어먹을 석유 때문에 끝까지 관여하게 했다.

더 이야기해 봐야 골치만 아프니 용건을 꺼냈다.

“다시 한번 신밧드를 해 볼 생각이 있나?”

“또 물건을 날라야 합니까?”

“그래. 이번에는 시리아야.”

“참 골치 아프게 사십니다.”

진혁의 비아냥에 잭슨의 인상이 다시 확 구겨졌다.

시리아도 아랍의 봄을 비켜가진 못했다.

아사드 대통령은 탱크까지 동원한 군대를 내세워 반정부 시위대에 강경 진압을 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미국이 리비아에 발목이 잡힌 사이 사태가 걷잡을 수없이 악화되고 있었다.

결국 EU가 전면에 나서 반군을 원격 지원하는 것이 전부였다. 리비아의 복사판이었다.

그래서 다시 물건을 실어 나를 신밧드가 필요해 찾아 온 것이다.

하지만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전 어렵겠습니다.”

“의왼데?”

“여기저기 벌려 놓은 사업이 많습니다. 한두 번이라면 모르지만 계속 시리아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실제 상황도 그렇지만 진혁은 시리아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그곳은 끝없는 수렁이었다.

잭슨은 진혁이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는지 조금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진혁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힘들 때 위험을 무릎 쓰고 도와준 이였다.

“대신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습니다.”

“검증 안 된 새로운 인물을 끌어들인다면 위에서 승인을 안 해 줄 거야.”

“그건 걱정 마십시오. 잭슨 씨도 아는 사람들입니다.”

진혁의 긴 이야기를 들으며 잭슨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조합이라면 해 볼 만하겠군. 하지만 자네도 빠지면 안 돼.”

“전 도저히 상황이…….”

“자네보고 직접 뛰라는 게 아니야. 우리가 직접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너무 위험해. 자네가 중간에서 연락을 맡으며 그들을 컨트롤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더 이상 거부할 수만은 없었다. 납치된 한국인을 무사히 구출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결국 진혁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럼 서둘러 준비해 주게. 저쪽 사정이 급해.”

“그러죠.”

정말 급한지 잭슨은 얼마 되지 않아 떠났다.

“바라캇 선장에게 전화해서 요즘 어떤지 물어보고 최대한 빨리 이집트로 건너오라고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카심도 서둘렀다.

* * *

이집트로 돌아온 진혁은 공장에 전화로 리비아 오더 생산을 지시하고 하마드로부터 쑤피넷과의 사이트 연동 작업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다음 날은 직접 공장을 찾아가 작업 현장을 점검하고 R&D 센터를 찾아가던 중에 마르와를 잠깐 만났다.

아자데의 집중 관리를 받아서인지 마르와는 이전보다 더 예뻐져 있었다.

촬영이 있어서 바로 가야 한다기에 나중에 맛있는 거 사 주기로 하고 헤어져야 했다.

진혁은 센터장실로 가서 아자데와 차를 마셨다.

“쑤피넷과 업무 협약을 맺었다는 것은 들으셨지요?”

“하마드 사장님께 들었어요. 큰일을 해내셨네요.”

“현재 쑤피넷이 서비스하는 지역이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이고 앞으로 오만, 카타르, 바레인도 서비스를 하게 된답니다.”

하이다르는 이집트에 투자하기로 한 돈을 돌려 나머지 국가들의 서비스를 서두르겠다고 했었다.

진혁도 이제 엄연히 대주주 중의 한 사람이라 기업 비밀을 서슴없이 밝히며 조언을 구했다.

“하마드 사장도 시장 조사와 광고 전략을 세우겠지만, 센터장님도 그쪽에 맞는 제품을 준비해 주십시오.”

“아직은 인지도가 없으니 가격이 저렴한 스킨케어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하마드 사장님과 상의해서 그렇게 진행해 주십시오.”

얼마간 더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하고 카이로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카심과 함께 카릴리 시장 뒤편의 카페로 들어갔다.

알트라드와 바라캇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각각 푸디와 레자를 대동하고 있어 절묘하게 숫자가 맞았다.

다른 손님은 없었다. 진혁이 조용한 장소를 원했더니 알트라드가 미리 조치를 취한 모양이었다.

먼저 알트라드에게 인사를 했다.

“지난번에는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나도 받은 게 많으니 서로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이번에는 바라캇이었다.

“두 분 모두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사장님께서 주신 돈을 모아 배를 한 척 사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쉽지 않네요. 뱃놈은 역시 배나 몰아야 하나 봅니다. 그래서 좋은 일거리가 있다는 말에 얼른 달려온 겁니다.”

한껏 기대 섞인 바라캇의 시선에 진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지난 번 리비아에서 했던 것과 비슷하지만 위험은 훨씬 큽니다. 그래서 솔직히 두 분에게 말씀드리는 것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지금도 위험을 안고 살고 있네. 그건 걱정 말게.”

“위험이 무섭다면 뭍에서 살지, 뱃놈이 되지 말았어야지요.”

알트라드와 바라캇이 호기롭게 말했지만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쉽게 생각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사업이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위험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라 저도 거부했던 일입니다. 지난번은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이번은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합니다. 게다가 시리아는 바다를 접하는 면적이 적어, 경우에 따라서는 요르단에서 육로로 국경을 넘어야 합니다.”

“그쪽과는 이야기가 된 겁니까?”

“그건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럼 문제 될 게 없네. 선장이 바다를 맡고 내가 땅을 책임지면 되지. 안 그렇소, 선장?”

“당연한 말씀입니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거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금방 친해졌다.

다시 한번 진혁이 주의를 주었지만 그들의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진혁은 잭슨에게 전화를 걸어 일을 맡기로 했다고 통보했다.

* * *

며칠 후, 진혁은 인터콘티넨털 카이로 세미라미스 호텔을 찾아갔다.

압델이 찾는다는 셰리피의 전갈이 있었다.

자주 봐서인지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들이 몸을 수색하는 손길이 많이 간단해졌다.

스위트룸으로 들어가자 압델과 셰리피가 먼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공장에 들렀다 오느라고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업가는 바빠야지. 와서 한잔 받게.”

압델의 말에 얼른 소파에 앉아 두 손으로 술을 받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셰리피가 빠르게 말했다.

“국장님이 이번에 국방부 장관이 되셨네.”

“감축드립니다.”

“미스터 서의 공이 컸어.”

무슬림 형제단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된 하페즈지만 실질적으로 이집트를 장악하고 있는 군부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전에 약속된 대로 국방장관 자리에 군부 측 인사를 앉혀야 했다.

군최고위원회를 이끌다 대선 후보로 나선 탄탄위 전 국방장관 계열의 구세력은 껄끄러워 군의 신진 세력인 압델이 선택됐다. SEZ에 성공적인 투자를 유치한 공이 인정되어서였다.

“셰리피가 진급해서 내 후임으로 정보국장이 됐어.”

“이거 좋은 일이 여러 가지입니다.”

말과는 달리 진혁의 얼굴에 살짝 어둠이 스쳐지나갔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본 압델이 헛웃음을 지었다.

“사람하고는. 셰리피가 영전한 게 별로 마음에 안 드는가?”

“아닙니다.”

“아니긴? 동부 기갑사단에 납품하던 게 끊겨서 낙담한 표정인데.”

“하하하. 너무 표 났습니까?”

진혁이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짭짤했는데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셰리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나예프도 별을 달고 같이 와 병기국을 맡게 됐어.”

“……!”

무슨 의미인 줄 알고 진혁의 입이 바로 찢어졌다.

이집트 국방부의 병기국은 한국의 방위사업청과 같이 군에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는 핵심 부서였다. 나예프가 그 자리에 앉았다면 만사형통이었다.

압델이 생각난 듯 말했다.

“일주일 후에 태후전자 공장 준공식이 열리는 것은 알지?”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공장에 자주 간다면서 그것도 몰랐나?”

“반대편에 있는 데다 사업하느라 정신이 없어서요.”

“태후도 머리가 좋아. 공장 건설은 벌써 끝났는데 새 대통령에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준공식을 늦췄다더군.”

혀를 차던 압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일로 투자청장이 찾아왔는데 우려의 말을 하더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자네 회사가 올해 수출 실적이 없다며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하던데.”

SEZ의 입주 기업은 다양한 세제 혜택을 받아 제품의 생산 단가가 낮았다. 그래서 투자청에서는 자국 생산 업체 보호를 위해 생산되는 제품의 50~80% 이상은 해외로 수출해야 한다는 의무규정을 두고 있었다.

동성F&B는 50%로 계약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알쇼핑을 알리느라 내수에만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으로 나간 것은 소말리아 난민 캠프에 가져다준 것뿐인데, 그마저도 무상 기부라 수출 실적에는 잡히지 않았다.

현실적인 문제로 압델의 특혜 아닌 특혜를 받아 입주한 상황이라 투자청장도 신경이 쓰여 보고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혁에게는 이미 복안이 서 있었다.

“그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얼마 전에 리비아 국방부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리비아 국방부와?”

“저희 통조림 광고를 보고 병사들이 보급해 달라고 제의해 와 계약까지 마쳤습니다. 전쟁 중에 조리하기도 힘들고 미군 씨레이션은 입에 맞지도 않다면서요.”

“……!”

“게다가 쑤피넷이란 두바이에 있는 쇼핑몰과 상호 연동을 통해 제품을 공급하기로 해서, 조만간 그쪽에서도 수출이 이루어질 겁니다. 또 다른 곳도 진행 중이라 공장을 증설할 상황이니 수출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리아까지 밝힐 수는 없어 적당히 둘러댔다.

압델이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군.”

“장관님이 도와주셨는데 누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열심히 했습니다.”

“고생했네. 한시름 놓았어, 셰리피.”

“예, 장관님.”

“리비아에 공급한다는 통조림 말이야. 우리 장병들에게도 유용할 것 같지 않아?”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당장 나예프에게 지시해 진행하겠습니다.”

손발이 척척 맞았다.

덕분에 진혁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았다. 당연히 이어진 술자리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아쉬운 것은 어려운 자리다 보니 맘껏 취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 * *

다음 날, 술이 덜 깨 아픈 머리로 진혁은 정신없이 일을 해야 했다.

리비라에 이어 시리아, 거기에 이집트 국방부에 통조림을 납품해야 했다.

거기에 쑤피넷과의 연동으로 화장품에 대한 주문이 늘어날 것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했다.

공장 증설에 따른 기계를 주문하고 한국에서 권기남 공장장을 다시 들어오게 했다.

공장도 다시 3교대 24시간 가동 체계로 돌아갔다.

그 소식에 직원들이 오히려 더 환영했다. 그만큼 자기들이 만든 제품이 잘 팔린다는 방증이었고, 야근 수당을 정확히 계산해 주니 월급봉투도 두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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