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83화 (83/307)

83화. 묘한 분위기

정신없이 공장에서 일하던 진혁이 시계를 보고 놀라더니 급히 카심을 불러 차를 타고 움직였다.

태후전자 준공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행사장은 벌써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애초에 태후 그룹이 인지도가 높은 데다 대통령이 참석한다는 소문이 더해지며 이집트 정관계 인사들이 많이 참석했다.

좋은 날이라 다들 즐거운 표정이었는데 유독 한 사람만 그렇지 않았다.

단상의 중앙에 앉아 있는 정호영이 그랬다.

원래는 정진호가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급한 일이 있어 대신 왔다.

해 가림막을 했다고는 하나 한여름이라 40도가 훌쩍 넘는 사막의 뙤약볕 아래 있자니 사우나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벌써 도착했어야 할 대통령이 도착하지 않아 행사가 자꾸 지연되고 있었다.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었다.

“대체 대통령은 왜 안 온답니까?”

“알아보겠습니다.”

“그런 건 미리미리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정호영을 수발하느라 얼굴이 온통 땀에 젖은 장근석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이번에 태후전자 현지 법인장이 되어 공장과 유통을 총괄하게 됐다.

그 뒤로 최영재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외근 간다고 하고 이곳으로 달려와 있었다.

잠시 후 장근석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돌아왔다.

“대통령께서는 못 오신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게…… 원래 우리 쪽 요청은 있었지만 확답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는 겁니까!”

태후전자 혼자서 헛물을 켰다는 말이었다.

정호영이 버럭 화를 냈다. 그러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행사부터 진행하세요.”

억지로 화를 누른 정호영이 차갑게 말했다.

장근석이 굳은 얼굴로 주변의 직원들을 향해 싸늘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행사를 진행한다. 외빈부터 단상으로 모셔라.”

직원들이 외빈들을 찾아 나서려는 순간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진혁이 도착한 것이다.

한국 대사관의 윤순군 대사가 가장 먼저 알아보고 달려왔다.

“오랜만입니다, 서 사장님.”

“대사님도 오셨군요.”

“한국 기업의 일이니 당연히 나와야지요. 요즘 서 사장님 때문에 이곳의 한국 위상이 많이 올라갔습니다.”

“모두가 대사님이 열심히 해 주신 덕분입니다.”

서진혁의 활약상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윤순군이었다.

이어 진혁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앞 다투어 인사를 건넸다. 유니로브 지사장도 그중 한 명이었다.

“회장님께서 언제 시간되시면 식사나 하자고 하셨습니다.”

“한번 찾아뵈어야 하는데 도통 시간이 안 나서 말입니다.”

“서 사장님 바쁜 거야 이집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알쇼핑의 성장 덕분에 이집트 지사 실적이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제품은 소비자가 먼저 알아보는 법입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진혁은 끝까지 겸손함을 잊지 않았다.

다음으로 다가온 사람은 후덕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지사장님.”

“윤 사장님도 오셨군요.”

TG전자 현지 법인장인 윤기성이었다.

대사관 초청 행사에서 몇 번 인사만 나눈 사이였다.

태후와 경쟁 그룹이다 보니 아무래도 서로 껄끄러워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앞뒤로 공격받게 생겼으니 당연히 상대 전력을 염탐하러 와야지요.”

“하하하. 제가 태후물산 지사를 관리하고는 있지만 알라딘 사업도 병행하고 있으니 꼭 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요.”

“그럼 저희에게도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당연하죠. 좋은 아이템이 있다면 언제든지 수용할 용의가 있습니다.”

“역시 같은 상사원 출신이라 대화가 통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 시간 한번 내주십시오. 제가 식사 대접을 하지요.”

“후배인 제가 사야지요. 시간 봐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너무 지체하는 것 같아 적당히 인사하고 더 안으로 들어갔다.

전면에 여기저기에 훈장이 달린 군복을 입은 압델이 있었다.

“장관님도 오셨군요.”

“내 손으로 시작한 일이니 당연히 와 봐야지. 그런데 늦었네?”

“죄송합니다. 공장 증설을 지켜보느라 시간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공장 증설을……. 대단해. 안 그런가?”

“맞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압델이 주변을 향해 물어보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반은 진심이고 나머지는 아부였다.

그때 태후전자 임원이 찾아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식을 진행한답니다. 단상에 오르실 시간입니다.”

“대통령께서 안 오시지 않았나?”

“그게 사정이 생겨 못 오신답니다. 그래서 축사는 장관님께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쯔쯧.”

혀를 차며 몸을 돌려 걸어가려던 압델이 고개를 돌려 진혁을 바라봤다.

“자네도 가야지.”

“아닙니다. 전 밑에서 지켜보겠습니다.”

“무슨 소리. 자네가 이 일의 일등공신인데. 가지.”

압델이 어깨를 끌어안고 재촉하는 바람에 진혁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단상 위 의자에 앉아 지켜보던 정호영이 장근석에게 물었다.

“저자가 여길 어떻게 온 겁니까?”

“그건 잘…….”

말을 얼버무리던 장근석이 눈치 빠른 최영재가 하는 귓속말을 듣고 얼른 답했다.

“서진혁이 인근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답니다. 지나가다 보고 들어온 모양입니다.”

“여긴 세계적으로 검증된 기업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제가 잘…….”

장근석이 더듬거리자 정호영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바라보다가 최영재에게 말했다.

“최 과장이 알아보고 내게 직접 보고하세요. 저자에 대한 모든 것을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영재가 바짝 군기 선 목소리로 답했다.

태후 그룹의 미래를 이끌어 갈 황태자의 말이었다. 다시 중용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지금은 몸을 숨기는 게 급했다. 진혁에게 여기 있는 모습을 들켜서는 안 된다.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무대 뒤로 사라지는 최영재와 달리 장근석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황태자의 눈 밖에 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밀려왔다.

압델이 단상에 오르는 모습에 정호영이 얼른 일어나 다가갔다.

“귀한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한 걸음을 한 것 같군. 이런 자리에 대통령을 모시려고 했다니.”

압델이 싸늘히 쏘아봤다. 정진호 회장이 와도 부족한 판에 그 자식이 자신을 맞는다는 게 불쾌했다.

“죄송합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시다며 다음에 꼭 오셔서 인사드리겠다는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됐고. 빨리 끝내시오.”

압델이 진혁을 끌고 단상 뒤에 마련된 외빈석으로 갔는데 자리 배정이 애매했다.

대통령이 빠지는 바람에 그 자리에 압델이 앉는 것은 이상할 게 없었다.

문제는 압델의 다음 순서였다.

이미 다른 외빈들이 사전에 정해진 자리에 앉아 있어 줄줄이 한 자리씩 당겨야 할 판이었다.

진혁의 난감한 표정을 본 윤순군 대사가 진혁에게 얼른 말했다.

“그냥 앉으십시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이곳에 서 사장만 한 유명 인사가 어디 있다고 양보하려 하십니까. 앉으셔도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장관님?”

“옳은 말이야. 그냥 앉아. 대사가 보기보다 센스가 있군.”

압델의 칭찬에 윤순군의 입이 함박만 해졌다.

새 정부 실세 장관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면 이런 자리는 백번이라도 양보할 수 있었다.

결국 진혁이 두 번째 자리에 앉았지만 누구도 그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 모습에 정호영의 인상이 더욱 구겨진 건 당연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행사는 김빠진 맥주가 따로 없었다.

대통령이 안 온 데다 압델의 지시로 식을 빨리 진행시키는 바람에 분위기가 더 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식이 끝나자마자 중요 인사들이 대거 일을 핑계로 바로 돌아갔다.

그들이 여기 온 목적은 대통령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던 거였는데 그게 무산되니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진혁도 동성F&B의 공장을 보러 가자는 압델의 말에 정호영에게 눈으로 인사만 하고 나와야 했다.

결국 두바이의 일류 요리사까지 초빙해 식당에 마련한 연회장은 대사관 직원과 현지 교민, 그리고 태후전자 직원까지 한국인들밖에 없었다.

* * *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벌써 한 달이 지나 있었다.

그사이 공장 증설이 끝나 군용제품 위주로 생산하고 있었다.

약속된 대로 나예프 병기국장을 찾아가 통조림을 포함한 군생필품 계약도 맺었다.

알트라드와 바라캇도 이미 시리아 반군에 보내는 물품을 여러 번 실어 날랐다.

거기에 보낼 통조림도 필요해, 공장의 3교대는 풀렸지만 2교대로 12시간씩 생산해야 했다.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은 시리아 반군에서 참치 통조림도 보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중해와 접해 있어 해산물이 풍족한 곳이라 자주 먹었는데, 내전으로 구할 수 없다보니 대체 식품으로 찾는다고 했다. 당장 한국으로 전화해 물건을 실어 보내라고 했다.

나예프 병기국장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이집트 군에도 납품해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참치 통조림 수요를 확인한 진혁은 알쇼핑을 통해 본격적으로 홍보를 시작했다.

반응이 예상 외로 좋았다.

사업이 안정을 찾아갈 때쯤 오랜만에 사장들을 불러 차를 마셨다.

그동안 계속 보고를 받고 있어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일은 쑤피넷과의 연동이었다.

“작업은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습니까?”

“이미 연동은 끝나 마지막 테스트 작업만 남았습니다. 기술진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하니 조만간 오픈일정을 잡아 본격적으로 홍보하고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이집트 밖으로 나가는 일이니 만큼 다른 문제가 없는지 세심하게 체크해 주십시오. 오픈하고 안정되면 기술진들과 회식 자리를 잡아 주십시오. 고생했으니 격려해 줘야지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기술진보다 아델라 센터장과 마르와 양도 챙겨 주십시오.”

“두 사람이 왜요?”

진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알기로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요즘 아델라 센터장님 신경이 날카롭습니다. 사장님이 콩 통조림만 신경 쓰신다며 불만이 많으십니다. 실제 화장품 매출도 정체고요.”

“하하하. 그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니 걱정 마시고 신제품 준비나 하시라고 전해 주세요.”

“물론 저희야 사장님의 뛰어난 감각을 여러 번 경험해서 믿지만 그분은 처음이라 많이 불안한 모양입니다. 그러니 시간될 때 식사라도 하면서 풀어 주십시오.”

핫산의 말에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마르와는 또 무슨 문제입니까?”

“제품마다 홍보 영상을 따로 준비하느라 많이 지친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떼를 써서 카심 씨까지 나서서 달랬다고 합니다.”

“한참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을 때 아닙니까. 사장님이 언제 한국 가실 때 데리고 들어갔다 오십시오.”

“아무래도 그래야겠군요. 마침 한국의 무슬림 식당이 오픈했다고 해서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그때 일정을 맞춰보도록 하세요.”

마르와와 같은 나이의 딸을 둔 갈리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소마야가 들어왔다.

“하비바 스토어의 하셈 사장님이 전화하셨어요.”

“하비바?”

“알트라드 씨 건으로 거래하는 곳입니다.”

“아!”

갈리의 말에 진혁이 하비바를 기억해 냈다.

시리아 반군에 보낼 물품의 자료 처리를 위해 CIA가 소개해 준 회사였다.

리비아 때는 자신이 직접 관여하기에 알라딘 컴퍼니로 진행했지만 이번은 단순히 중개만 하는 터라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해외 수출 물량도 맞춰야 하기에 잭슨에게 부탁했더니 소개시켜 준 요르단의 식품 수입 업체였다.

이미 잭슨이 다 이야기했고 자료만 주고받으면 되니 만난 적도 없었다.

이쪽의 업무 처리 때문에 갈리에게만 사정 이야기를 했었다.

“돌려 주세요.”

소마야가 나가자 갈리의 눈짓에 핫산과 하마드도 알아서 일어났다.

전화가 연결되었다.

“서진혁입니다.”

-하비바 스토어의 하셈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혹시 진행하는 일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일은 예정대로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부탁드릴 일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렸습니다.

혹시 시리아 반군과의 거래에 문제가 있나 걱정했던 진혁은 놀란 가슴을 내려놓았다.

“말씀해 보십시오.”

-요르단에 잠깐 들러 주실 수 있으십니까?

“요르단에요?”

-뵙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저를요?”

-예. 사장님과 알라딘 통조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가야지요. 내일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제품 상담을 원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