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84화 (84/307)

84화. 라이나 왕비

-혹시 마르와 양도 같이 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마르와도요?”

-제품의 홍보 모델이라 같이 보고 싶어 하십니다. 부탁드립니다.

약간은 껄끄러운 제안이지만 하셈의 태도가 너무 정중했다.

음성적인 거래지만 어떻든 하셈도 바이어였다. 그리고 방금 전 마르와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확한 일정을 알려 주시면 저희 쪽에서 모든 준비를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두 번이나 인사를 받고 통화를 끝냈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 갈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일까요?”

“글쎄요. 사장님을 뵙자는 건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마르와는 좀…….”

갈리가 말끝을 흐렸다.

두 사람 모두 찜찜함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중동은 유독 졸부가 많았다. 넘쳐나는 오일 머니 탓이었다.

그들의 안하무인 난잡한 행동이 문제가 된 적이 많았다.

요르단의 어떤 졸부가 마르와의 미모에 혹해 부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고민해서 답이 나올 상황도 아니었다.

“일단 부딪혀 보죠. CIA가 끼어 있으니 함부로는 못할 겁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일단 만나 보고 결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가는 것으로 마르와와 카심에게 이야기해 주시고 저쪽에 통보도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갈리가 나가자 진혁은 그 일을 잊고 업무에 집중했다. 고민만 하는 것은 체질상 맞지 않았다.

* * *

요르단은 이스라엘, 이라크, 시리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정학적 영향으로 근세 들어 난민과 함께 성장한 국가였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팔레스타인 사람이고, 이라크 전쟁 때도 난민의 유입이 있었다. 최근에는 시리아 난민들이 밀려오고 있지만 다른 나라와 달리 큰 혼란은 없었다.

많은 난민 유입 사례를 겪으면서 요르단은 사회 통합에 대한 노하우를 어느 정도 가졌고, 이로 인해 국제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암만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11시였다. 비행기로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짧은 거리였다.

진혁이 카심과 마르와와 함께 공항 밖으로 나가자 고급 양복을 입은 배가 나온 중년의 사내가 다가왔다.

“알라딘의 서진혁 사장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하비바의 하셈입니다.”

“아니, 사장님이 직접 나오신 겁니까?”

“당연히 제가 모셔야지요.”

하셈을 따라가자 대형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차 안은 호텔의 칵테일 바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손색없이 갖춰져 있었다.

하셈이 조수석에 타자 차가 출발하면서 유리가 올라갔다. 편하게 대화를 나누라는 배려였다.

“와, 고급 양주도 있어요.”

마르와가 신난 표정으로 냉장고는 물론 차 안 수납장 여기저기를 열어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랜만에 나온 외국 여행길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내내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진혁을 바라보던 카심이 마르와에게 핀잔을 주었다.

“좀 조신하게 앉아 있어라.”

“아저씨도 이런 고급 차는 처음 타 보잖아요. 신기하지 않으세요?”

“난 네가 더 신기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코흘리개 어린애였는데.”

진혁과 카심은 여기까지 오면서 마르와의 인기를 실감했다.

공항에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사인 공세에 시달렸다.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심지어는 스튜어디스까지 사인을 받아 갔다.

마르와가 카심에게 눈을 흘겼다.

“어머, 그런 망발이 어디 있어요? 파라오의 여신 마르와가 언제 그랬다고요.”

“파라오의 여신? 웃기고 있네. 산청 콩 통조림 공장에 갈 때 조수석에 앉아 입 헤벌리고 침 질질 흘리며 자는 걸, 흡!”

“아저씨는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으세요.”

“퉤퉤. 으이, 더러워.”

손에 입이 막힌 카심이 마른침을 내뱉으며 투덜거렸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티격 거렸다.

그와 달리 진혁은 선팅 되어 보이지 않는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어째 아니길 바라는 쪽으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차가 스스로 멈추더니 이윽고 하셈이 문을 열어 줬다.

밖으로 나온 진혁 일행의 눈에 들어온 건 베이지색 톤의 벽으로 둘러싸인 웅장한 궁전이었다.

‘설마…… 졸부가 왕실 가족?’

진혁의 얼굴이 더 심각해졌다.

이대로 무작정 따라갔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진혁이 막 하셈에게 입을 열려고 할 때, 그가 허리를 깊숙이 굽혔다.

“왕비님과 공주님을 뵙습니다.”

“귀한 손님을 모셔 오느라 수고하셨어요.”

입구에서 40대 초반의 여성이 양쪽으로 소녀들을 대동한 채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진혁은 두 번이나 놀랐다.

우선은 브룩 쉴즈를 연상케 하는 빼어난 미모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중동 여성 모두가 착용하는 히잡을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왕비?’

“서 사장님과 마르와 씨를 초대하신 분입니다.”

“알라딘의 서진혁입니다. 이쪽은 마르와라고 합니다.”

“훌륭한 분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진혁은 물론 카심과 마르와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따라 들어갔다.

넓은 응접실에 왕비와 공주가 먼저 앉자 나머지도 뒤를 따랐다.

“라이나라고 합니다.”

“아, 중동의 그레이스 켈리!”

마르와가 탄성을 터트렸다.

현 국왕인 샤리프와의 러브 스토리는 중동을 넘어 세계 여성의 로망이었다.

라이나는 팔레스타인 난민 출신의 평범한 직장 여성이었다.

우연히 간 연회장에서 샤리프가 보고 반해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건 한 편의 신데렐라 스토리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진혁과 카심은 예외였다.

“나도 PLO 난민 출신이라 난민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고 있어요. 시리아 일을 돕는데 미스터 서의 제품이 이번에도 포함됐다고 해서, 뵙고 싶어 이렇게 청했습니다.”

“영광입니다.”

“소말리아 난민 캠프를 지원한 일도 알고 있어요. 특히 마르와 양의 동영상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어떻게 그런 장면을 찍게 된 거죠?”

“저도 모르겠어요. 원래 콘티는 그게 아니었는데…… 그 아이의 죽음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어요. 내가 조금만 빨리 왔다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미안하기도 했고요.”

이야기하는 마르와의 눈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습기를 가득 머금었다.

마찬가지로 눈가가 붉어진 라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마르와 양의 진솔한 마음이 세상을 움직인 거네요. 참, 여긴 내 딸 림과 디나입니다. 애들도 함께 보고 울어서 이 자리에 데리고 나왔어요.”

림은 10대 중반으로 엄마를 빼닮아 미인형이었고, 디나는 10대 초반으로 아직 어린데 얼굴 가득 장난기가 깃들어 있었다.

집사가 나와 식사가 준비됐다는 말을 하자 식당으로 옮겨 점심을 먹었다.

의외로 식단은 간단했고, 서구식으로 차려져 있었는데 오히려 그게 더 편했다.

식사를 하면서 라이나는 소말리아 난민을 돕게 된 계기를 물었다.

“한국의 모스크에서 알게 된 울라마 아메드 씨가 소말리아 난민 출신의 미국인 일한 칼리파 씨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진혁은 당시의 일을 차분히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라이나는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NS통신의 조나단 기자는 거기서 만난 건가요?”

“아닙니다. 제가 기획 기사를 내 달라고 불렀습니다.”

“우연히 만난 게 아니고요?”

“그런 행운이 오기를 기다리기에는 난민들의 상황이 너무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연을 가장해서 세상에 알리려고 부른 겁니다. 그들에게는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맞아요. 난민 문제는 누구 하나가 나서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세계인 모두가 지속적으로 동참하고 함께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문제지요.”

라이나는 난민은 물론 교육과 여성 문제까지 폭넓은 소외 계층에 대한 인도주의 활동이 필요성을 밝혔는데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진혁은 미처 몰랐지만 라이나는 미모로만 유멍한 것이 아니라 인도주의 활동을 몸소 실천하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우아한 여성’에 선정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심도 깊은 대화가 이어지자 다른 사람들은 반대로 지루했다.

림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고 있던 마르와가 조용히 말했다.

“공주님. 얼굴에 기미가 좀 보이는데, 언제부터 생긴 거예요?”

“어머, 보여요? 지난번 난민촌을 방문하고 난 후부터 같아요.”

“그렇게 외부에 다녀오신 다음에는 수분 크림이나 수분 마스크 팩을 해 줘야 해요. 마침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으니 조금 나눠 드릴게요.”

“마르와 양은 그렇게 관리해서 피부가 곱군요. 어디 제품 쓰세요? 랑콤, 샤넬, 아니면 디올?”

림도 사춘기라 피부 미용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계속 마르와의 깨끗한 피부를 훔쳐보고 있었다.

“외국 화장품은 유럽인에 맞춰져 있어 우리와 맞지 않아요. 그래서 전 우리에게 맞게 개발된 한국 제품을 써요.”

“한국에서도 화장품을 만들어요?”

“겨울연가의 최지우 씨하고 해신의 수애 씨가 쓰는 바로 그 제품들이랍니다. 그녀들의 피부가 얼마나 백옥 같은지는 잘 아시잖아요?”

요르단이라고 한류 열풍에 비켜가지 않았다. 개방된 나라답게 오히려 더 뜨거웠다.

‘한국’이란 말에 제일 반색한건 디나였다.

“마르와 양은 한국에 가 보셨어요?”

“그럼요. 교환 학생으로 2년 있었어요. 거기서 사장님도 만났는데요.”

“그럼 지누도 보셨어요?”

“어머, 공주님도 동방천하 팬이세요? 전 진성이를 좋아해요. 그래서 공연은 다 찾아갔어요.”

“와, 부럽다. 유튜브로 보는 것만큼 멋져요?”

“아니요. 더 멋져요.”

동방천하에 대해 한참을 떠들더니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르와가 동방천하의 대표곡을 선창하자 디나가 어색한 한국말로 뒤를 이었다.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라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게 딱딱 맞아 떨어졌다.

조용하게 시작된 대화가 더 이상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라이나와 진혁의 대화가 중단됐다.

림이 옆구리를 찔러 주의를 주자 노래가 멈췄다. 하지만 디나의 호기심을 충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 이 언니랑 내 방에 가서 이야기하면 안 돼요?”

“네 방을 보여 주려고?”

“그동안 모은 브로마이드랑 앨범을 보여 주고 싶어요.”

“마르와 양이 허락한다면 그렇게 해라.”

“저도 갈래요.”

“림 너도?”

“마르와 양이 화장품을 나눠 준다고 했어요. 피부 관리법도 배우고 싶어요.”

“괜찮겠어요, 마르와 양?”

라이나가 마르와의 의향부터 물었다. 그 행동 하나로 상대방을 얼마나 존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가 오히려 더 보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죠, 사장님?”

“좋을 대로 해라.”

“이왕이면 림 공주님 얼굴 마사지까지 해 드리고 싶어요. 그러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그건 걱정 마세요, 마르와 양. 우린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남았으니. 요즘 림이 피부 트러블 때문에 고민이 많으니 잘 부탁해요.”

“걱정 마세요. 제 친구도 같은 증상이었는데 이 화장품 쓰고 금방 좋아졌어요.”

세 명의 여자가 빠져나가자 분위기가 썰렁했다.

라이나가 진혁을 부른 이유를 생각하고 말했다.

“시리아 내전으로 난민들이 계속 유입되고 있어요. 정부에서 지원은 하고 있지만 많은 것이 부족해요.”

“아무래도 그러겠죠. 저도 저 나름대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지난번 일도 있으니 협력 업체들도 나서 줄 겁니다.”

“선뜻 돕겠다고 나서 주니 고마워요. 그렇다고 무조건 도와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에 합당한 대가는 지불할게요. 그것보다 알라딘 콩 통조림이 이집트에서 큰 인기라고 들었어요. 가격도 싸고 조리가 되어 간편하다고.”

“곡물 가격이 많이 오른 데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식사 준비하고 치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 많이들 찾고 있습니다.”

“요르단은 다른 나라보다 여성들의 활동이 많아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그 제품을 판매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여기 하셈 사장님이 도와줄 겁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왕비가 나서서 도와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얼마간 더 이야기하다가 라이나가 하셈과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해 보라고 하고 서둘러 일어났다. 아무래도 애들만 두기가 불안한 듯했다.

진혁은 하셈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차로 이동하면서 하셈이 하비바 스토어에 대해 설명해 줬다.

하비바는 요르단 시장에 식품을 수입・수출과 대량 판매를 하는 유통 회사로 전국에 판매망을 갖고 있었다.

코즈모(Cozmo)와 같은 슈퍼 상점과 약 25개의 중형 매장을 직영하고 있으며, 제품 홍보를 위한 자체 쇼핑몰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더불어 호텔과 식당, 식품 가공 회사는 물론 400개가 넘는 슈퍼마켓에 식품을 공급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회사였다.

코즈모 하나만 해도 한국 이마트 같은 대형 매장이었다.

또한 국제 적십자사는 물론 유엔 난민기구(UNHCR) 등 많은 국제기구와 대규모 협력을 통한 사회 공헌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하비바 스토어의 최대 주주가 왕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 하비바 스토어를 구경하고 있던 두 사람은 라이나 왕비의 연락을 받고 급히 궁으로 돌아갔다.

어쩐 일인지 하셈은 들어가지 않고 바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