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요르단 왕실
안으로 들어가자 피부가 한층 밝아진 네 여인과 건장한 체격의 두 남자가 재미있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알라딘의 미스터 서세요.”
“샤리프네. 우리 집 여인들을 몇 시간 만에 이런 미녀들도 만들어 줘서 고맙네.”
“서진혁입니다. 송구스럽습니다.”
요르단 국왕이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급히 부른 듯했다.
“이쪽은 내 동생인 파이샬 왕자네. 요르단 태권도 협회를 이끌고 있지.”
“파이샬이오. 미스터 서도 태권도를 하십니까?”
“한국 남자들은 모두 태권도를 배웁니다.”
“그래요. 그럼 언제 한번 대련을 해 봅시다.”
“남자는 도전을 피하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단단히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하하하. 오랜만에 보는 호기로운 젊은이군. 맘에 들어.”
샤리프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공군 헬리콥터 부대 전략 지휘관으로 근무했고, 지금까지도 코브라 공격형 헬기를 직접 운행할 정도로 정열이 넘쳤다.
후일의 일이지만,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ISIS)가 자국 조종사를 잔혹하게 살해하자 직접 공수부대와 전투기를 급파해 공습할 정도로 호전적인 성격이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전혀 달랐다.
한때 방탕했던 사생활도 라이나 여왕을 만나고 사라져 다른 부인을 두지 않을 정도로 가정적이었다.
그들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고, 여자아이들은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는지 쉼 없이 재잘거렸다.
라이나가 물었다.
“하셈 사장과 간 일은 잘됐나요?”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 서로 이득이 되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비바도 이익이 된다고요?”
“그렇게 해야지요. 일방적으로 한쪽이 손해 보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마음속의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하하하하. 오늘 제대로 된 사업가를 보는군. 맞아, 욕심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지. 위정자들이 조금만 양보했다면 고통 받는 난민들은 없었을 거네. 왕비가 하셈 사장에게 한 번 더 언질을 주세요.”
“알았어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어요.”
라이나가 국왕에게 향했던 시선을 자신에게 옮기자 진혁이 얼른 답했다.
“경청하겠습니다.”
“통조림뿐만 아니라 화장품도 꼭 판매해 주세요. 이렇게 좋은 제품이 반에 반값도 안 된다는 게 신기할 정도예요. 우리나라의 좀 더 많은 여성들이 혜택을 받게 하고 싶어요.”
“천연 재료를 사용하고 로열티 중간유통 마진을 없애서 그렇습니다. 하비바와 연계한다면 충분히 같은 가격으로 공급이 가능합니다.”
“서둘러 주시고, 마르와 양에게 말해 놨으니 제품은 먼저 보내 주세요. 림의 피부에 딱 맞는 제품을 찾은 것 같아요.”
“내일 받을 수 있게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진혁의 거침없는 답변에 만족한 표정을 지은 라이나가 신나게 마르와와 이야기하고 있는 디나에게 말했다.
“디나,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지 않니?”
“앞으로는 숙제도 잘해 가고 남자애들도 안 때리고…… 집에서는 안 뛰어다니고…… 아무튼 엄마 말씀 잘 들을게요.”
“우리 집 말괄량이가 어쩐 일이지?”
“마르와 양의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 가고 싶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어요.”
“시리아 문제로 난 움직이기가 곤란하오.”
“작년에 부산 세계개발원조총회에 참석했을 때 교육 대학 강연을 해 준 적이 있어요. 이번에 그곳에서 명예박사 학위증을 주겠다고 연락해 와서 정중히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 핑계로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올까 싶어요.”
“그럼 그렇게 하구려. 우리 막내가 이번에 큰 맘 먹고 약속까지 하는데.”
입이 쫙 찢어진 디나를 바라보는 샤리프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혀 있었다.
딸 바보 아빠가 틀림없었다.
디나가 마르와와 자겠다고 고집을 부려 진혁과 카심만 호텔에 향했다.
하셈이 미리 방을 잡아 놨는데 스위트룸이었다. 압델을 보기 위해 가 보기만 했지, 자는 건 처음이었다.
카심은 아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바빴다.
소파에 앉아 고심하던 진혁이 머리를 흔들고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쑤피넷 하이다르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스터 서, 어쩐 일이오?
“제가 쉬시는데 방해한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요. 아직 사무실이오. 이것저것 처리할 게 많소.
“혹시 요르단에 진출하실 마음은 없으십니까?”
진혁이 내내 고민했던 일을 꺼내 놨다.
-마음이야 굴뚝이지요. 하지만 그쪽에는 딱히 연결 고리가 없어요. 미스터 서도 알다시피 중동에서 사업하려면 현지 유력 인사의 도움이 필수적이지 않소.
“그럼 내일 당장 오십시오.”
-……확실한 거요?
“안 오시면 알쇼핑으로 진행합니다.”
-그럼 안 되지요. 미스터 서도 쑤피넷의 지분을 가지고 있잖소.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하겠소.
전화를 끊은 진혁은 마음이 홀가분했다.
정말로 알쇼핑으로 진행할까 하는 생각도 많았다. 하지만 그 또한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려놓기로 마음먹으니 편했다.
그날 진혁은 푹신한 침대에서 푹 잤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도착한 하이다르와 함께 하셈을 만나 협상을 했다.
쑤피넷이 요르단에 진출하고 하비바가 배송을 맡아 주기로 했다. 대신 쑤피넷도 하비바의 상품을 등록해 다른 나라에서 판매될 때 배송을 책임지기로 했다. 물론 수량에 따른 정산을 하는 것은 상호 인정을 했다.
더불어 알라딘의 통조림과 화장품은 하비바의 직영점을 통한 오프라인 판매도 맡아 주기로 했다.
하비바로서는 애써 일군 판매망을 내놓는 일이었지만 라이나 왕비가 지시한 일이라 거부하지 못했다.
하이다르 회장은 고마움의 표시로 이곳의 쑤피넷 메인 화면의 상단 배너 자리를 알쇼핑에 할당해 주기로 했다.
합의를 끝낸 세 사람은 계약서를 작성해 왕궁으로 가서 리이나 왕비에게 재가를 득했다.
아침에 호텔로 도착한 화장품도 건네줬다.
감사의 인사와 함께 11월 말에 한국으로 갈 때 보기로 하고 왕궁을 나오는데, 디나가 마르와의 손을 끝까지 붙잡고 더 있다 가라고 떼를 써서 달래야 했다.
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을 함께 탄 하이다르가 감탄을 터트렸다.
“이런 인맥이 있다면 미리 이야기를 했어야지. 놀랐잖은가?”
“저도 이번에 처음 뵈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아무튼 쑤피넷에 기회를 줘서 고맙소.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처음 저를 만났을 때 쑤피넷을 중동과 아프리카의 아마존으로 만들겠다는 그 말씀만 지켜주시면 됩니다.”
“걱정 마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소.”
공항에 도착해 악수를 하고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회사에 도착해 요르단에 진출하게 됐다고 밝히자 다들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
누구보다 아자데 센터장이 기뻐하며 마르와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쑤피넷과 연동된 사이트도 무사히 오픈되고 생산에도 문제가 없자 진혁은 미뤘던 휴가를 받아 한국에 다녀오기로 했다.
* * *
무슬림 친화 레스토랑 ‘알라딘과 떠나는 할랄 여행’은 이태원 우수단길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지중해의 모래를 연상시키는 연한 베이지색 회벽에 툭 튀어나온 베란다가 있고, 둥근 지붕과 뾰족한 첨탑은 모스크를 연상시켰다.
실내 장식은 꽃, 숫자, 문자를 조합한 아라베스크 무늬로 꾸며져 있었고, 곳곳에 비치된 소품은 아랍에 여행 온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입구에는 한국할랄인증원에서 발행한 할랄 인증서가 부착되어 있었다.
꼼꼼히 점검하는 진혁의 곁을 따르며 김상조가 설명을 했다.
“전화로 보고드린 대로 좌측 건물은 중동식으로 운영하고, 우측은 동남아 무슬림을 위한 공간으로 배치했습니다.”
“주방장은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나흐얀 이맘님이 추천해 주셔서 각각 한 명씩 채용했는데, 성실해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소품들까지 제대로 갖춰진 것 같군요.”
“소품은 카심 씨가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듣기로는 카이로 중고 시장을 여러 번 돌며 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들 수고해서 오픈한 것이니 문제없도록 잘 운영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음식이라 한국인 손님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우린 우리 일만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 됩니다.”
시설 점검을 끝내고 식사를 했는데 맛도 괜찮았다.
주방장과 직원들에게 격려의 말을 해주고 강릉으로 떠났다.
* * *
역시 집이 좋았다.
항상 일과 사업에 몰두하느라 팽팽히 당겨졌던 긴장감이 스르르 풀렸다.
속초로 건너갔다.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낚시대를 챙겨 방파제로 갔다. 강릉에도 바닷가가 있지만 속초만 못했다.
진혁은 방파제에 앉아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낚시는 없었다.
과거로부터 돌아와 쉼 없이 달려온 지난날이었다.
자기 사업을 시작하고 콩을 미리 매입해 콩 통조림으로 인지도를 얻었다. 화장품도 시간이 지나면 빛을 볼 게 틀림없었다.
이제 새로운 변신을 시도할 때였다.
그래서 몇 가지 아이템도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꾸준히 시간이 날 때마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다가올 미래에 유명해질 제품에 대해서도 메모를 해나갔다.
헌데…… 자꾸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답답하게도 그게 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벌써 사흘째 이렇게 방파제에 나와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방파제 옆 도로에 검정색 승용차가 멈춰 서더니 양복 입은 사내가 나와 걸어왔다.
진혁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그 사실을 몰랐다.
“많이 잡힙니까?”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생각 속에서 빠져나와 시선을 돌렸다.
국정원 김상균 과장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낚시나 할까 하고 왔는데, 손맛 좀 보셨습니까?”
옆에 놓여 있는 양동이 안을 확인한 김상균이 헛웃음을 쳤다. 양동이가 텅 비어 있었다.
“한 마리도 못 낚으신 건가요?”
“꼭 잡아야 맛은 아니죠.”
“고기가 아니라 세월을 낚으시러 온 거군요.”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려고 온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진혁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때 서로 나눌 이야기가 없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세상 일이 참 말처럼 안 되더군요.”
“전 더 이상 과장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아니라 서 사장님이 끌고 온 일입니다.”
“제가요?”
“외교부에서 협조 요청이 왔습니다. 요르단의 라이나 왕비가 방한한다면서요?”
“아!”
진혁은 그제야 김상균이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번 방문은 비공식적인 것으로 아는데요?”
“그래서 저희 쪽에 요청이 온 겁니다. 공식 방문이라면 외교부에서 의전을 맡겠지요. 그런데 그쪽 사람이 요르단 왕궁에 일정을 여쭤봤더니, 관광 목적이고 안내는 서 사장님이 하시기로 했다는 답이 왔다고 합니다.”
“그게 뭐 문제 있나요?”
“사실 저번 서 사장님을 조사하던 중 제가 출입국 관리소에 협조 요청을 해 놓은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우리 쪽에 부탁을 하더군요.”
“참 바쁘십니다. 저 같은 일개 사업가의 일정까지 확인하셔야 하고. 제가 그렇게 요주의 인물입니까?”
“오랜 경험에서 오는 감입니다. 국정원에 들어온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만나면 느낌이라는 게 있습니다. 서 사장님은 그 느낌이 굉장히 강한 분이십니다.”
“골치 아픈 인간이라는 말 같습니다.”
“골치야 아프죠. 워낙 글로벌스럽게 돌아다니시는 분이니. 하지만 그게 꼭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시나이 반도의 일도 잘 해결됐잖습니까? 그리고 이번에도 일국의 왕비로 하여금 한국 관광을 오게 하신 거잖습니까. 사정을 알면 관광공사에서 표창을 주겠다고 할 겁니다.”
좋은 말로 대화를 이끈 김상균이지만 자신의 일을 잊지는 않았다.
마침내 그가 본론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