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과유불급
“도대체 라이나 왕비는 어떻게 아신 겁니까?”
진혁은 사적인 부분은 제외한 채 사업적인 일만 들려줬다.
“아, 사업 관계로 만나신 거군요. 그럼 관광 코스는 어떻게 잡으실 생각입니까?”
“부산에서는 학위만 수여받고 바로 서울로 올라와 한류 관광을 다니실 겁니다. 남이섬, 명동, 이태원 등등.”
“후우, 복잡한 곳만 다니시는군요.”
김상균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사람이 많을수록 경호 역시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동방천하 공연이 있으면 그곳도 참석하실 겁니다.”
“설마 왕비께서…….”
“따님 중에 한 분이 열성 팬이십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그쪽 소속사와 상의해 보겠습니다.”
이후 라이나 왕비 방문에 따른 준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가 거의 마무리될 때쯤 김상균이 의자 옆에 놓여 있는 스케치북을 보고 물었다.
“그림도 그리십니까?”
“그건 아니고, 중동에서 이런 기능이 들어간 제품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그려 본 겁니다.”
“역시 사업가라 다르시네요. 제 친구 중에도 특허권 사용료만 가지고도 먹고 사는 놈이 있습니다. 생각날 때마다 등록해 놨더니 수익이 의외로 짭짤하다더군요.”
“……!”
진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억지로 과거를 떠올리며 중동에서 히트 친 아이템만 기억해 내려고 했지, 그것을 어떻게 수익으로 연결할지는 고려하지 못했다.
“이거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갑자기 이러시니 당황스럽습니다. 아무튼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왕비님 방한까지는 아직 시간도 남았고, 그동안 계획이 변경될지도 모르니 오늘은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휴가 중이라고 했는데 죄송했습니다. 저는 물러날 테니 고기 많이 잡으시고 좋은 아이디어도 많이 얻으시길 바랍니다.”
김상균이 깨끗하게 인사하고 물러갔다.
진혁은 얼른 스케치북을 다시 펼쳐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중간에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사장님, 갈리입니다.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어쩐 일입니까?”
-여기저기서 화장품을 구매하겠다는 상담 전화가 오고 있는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알쇼핑은 물론 쑤피넷을 통한 주문도 쇄도하고 있습니다.
“원인이 뭡니까?”
-알아보고 있는데 아직 파악된 건 없습니다. 일단 공장에는 풀가동 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잘하셨습니다만 원인 파악이 먼저입니다. 모든 직원을 동원해서 이유부터 파악하세요.”
-알겠습니다.
끊자마자 다시 벨이 울렸다. 하이다르 회장이었다.
-미스터 서, 어디인가?
“한국에 휴가 와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당장 사우디아라비아로 와 줘야겠네. 이쪽 시장이 난리야.
“방금 회사로부터 연락은 받았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라이나 여왕이 유튜브와 트위터에 알라딘 화장품에 대해 극찬을 했어.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소비자가 반응하는 건…….”
-왕비는 유튜브에 개인 채널을 가지고 있어. 시청자가 6백만 명이 넘어. 게다가 트위터 팔로워는 2백만이고. 중동 최대의 뉴스 메이커란 말일세.
라이나 여왕이야말로 진짜 초특급 울트라 슈퍼 트위터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진혁은 즉시 낚시대를 챙기고 양양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인천 공항으로 이동했다. 급히 연락받고 온 카심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는 진혁에게 기대와 아쉬움이 교차했다. 마음속 찜찜함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은 지우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기다리고 있을 일에 대해 집중했다.
* * *
리야드 공항에 도착하자 하이다르 회장이 보낸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묵고 있는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만났다.
“현재 상황이 어떻습니까?”
“주문이 계속 쇄도하고 있소.”
“소식을 듣고 공장을 풀로 가동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어떻게든 제품은 제때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문제는 배달입니다. 현재 쑤피넷이 확보하고 있는 유통 역량으로는 리야드를 커버하기도 벅찬 실정이오.”
상황이 심각했다.
주문을 받아 놓고 제품을 전달해 주지 못할 거라면 처음부터 판매하지 말아야 한다.
하이다르가 급히 호출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책은 있습니까?”
“지금으로서는 사과 공지를 올리고 주문을 취소시키는 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긴 한데…….”
“그건 안 됩니다. 그럼 사우디아라비아 시장은 영원히 포기해야 합니다.”
한번 신뢰를 잃으면 끝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 최대의 사장이었다. 이곳을 포기하는 것은 중동에서 장사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이다르가 눈치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방법은 있소.”
“뭡니까?”
“유통 채널을 가지고 있는 업체와 제휴하는 거요. 그렇지 않아도 라이나 왕비의 동영상을 보고 몇몇 업체에서 제품을 판매하고 싶다는 문의가 있었소.”
“그게 좋겠군요. 그럼 당장 그쪽과 접촉해 주십시오.”
“이쪽의 급한 사정을 아는 터라 협상이 쉽지 않을 테니 각오는 해야 할 거요.”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사우디 시장을 잃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면담들을 잡아 주십시오.”
비즈니스 세계에서 자비를 기대할 만큼 진혁은 어리숙하지 않았다. 지금은 손실을 최소화하는 게 관건이었다.
우선 하마드에게 연락해서 사과 공지를 올리게 했다.
주문 폭주로 인해 배송이 지연될 수 있다는 안내 글과 함께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신규 주문은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예상대로 유통업체와의 협상은 쉽지 않았다.
독점 판매권을 요구하는 것은 기본이고 유통 대기업들은 OEM 방식을 고집했다.
즉 알라딘이 아닌 자신들의 상표를 붙여야만 유통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심지어 어떤 업체는 화장품 사업을 통째로 인수하겠다고 제안하는 곳도 있었다.
그래서 소매업체들을 만났는데 이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과도한 유통 수수료를 요구하는 것은 물론 온라인 판매를 중단하라고 했다.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온라인 판매가 자신들의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는 위기의식들이 강했다.
3일간 20여 개 업체를 만나 상담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심지어 수정안을 제시해 오지도 않았다. 이쪽의 다급한 사정을 이용해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심산이었다.
당장 때려치우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진혁도 지쳤지만 나이가 많은 하이다르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미스터 서, 우리를 생각해 주는 것은 좋지만 이쯤에서 포기해야 할 것 같소. 소매업체의 요구대로 이곳에서는 온라인판매를 포기합시다.”
“그건 안 됩니다. 쑤피넷을 중동과 아프리카의 아마존으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을 벌써 잊으신 겁니까?”
“그렇다고 대기업에 OEM으로 납품하는 하청업체로 들어갈 수도 없지 않소?”
그것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이었다. 사방이 꽉 막혀 답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업체 면담은 이쯤에서 종료하고 오늘은 쉬시지요.”
“그럽시다. 계속 만난다고 양보할 것 같지도 않으니까.”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하이다르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물 받아 놓을 테니 미스터 서도 좀 쉬시오.”
“그래야겠습니다. 옷부터 갈아입겠습니다.”
힘없이 일어나 축 처진 어깨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진혁을 바라보는 카심의 시선에도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잠을 자고 났더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떠올리자 다시 머리가 아파 왔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JK모건 젯다 지점장 스미스였다.
지지부진하던 옥수수 선물이 거짓말같이 급등하더니 횡보하는 모습을 보이자 진혁은 한국으로 가기 전에 청산하라고 했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려서 정산하기로 했었는데 이곳에 발이 묶여 잊고 있었다.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바쁘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녁이나 같이 하시지요.
“지금 제가 젯다로 건너갈 상황이 아닙니다.”
-제가 마침 리야드에 와 있습니다. 식사는 하셔야지 않겠습니까.
“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고민하던 진혁이 승낙을 했다. 잠깐 머리를 식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리츠칼튼 호텔은 외국 국빈의 숙소로 자주 이용되는 최고급 호텔이었다.
명성에 걸맞게 레스토랑도 사전 예약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진혁이 이름을 말하자 지배인이 사장 전망이 좋은 창가 쪽으로 안내했다.
스미스가 먼저 와 있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아랍 전통 복장인 흰색 토브를 걸친 넉넉한 체격의 사내와 함께 있었다.
진혁이 다가갔다.
“제가 너무 일찍 온 겁니까?”
“아닙니다. 그게…….”
“아메만입니다. 스미스 지점장을 본 게 반가워 염치없지만 합석을 부탁드렸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식사 대접은 제가 하고 싶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진혁이 자리에 앉았는데 기분은 좋지 않았다. 편한 기분을 느끼려고 온 자리인데 낯선 사람이 끼면 그게 쉽지 않았다.
주문한 식사가 나왔는데 최고급이었다.
식사를 하며 나누는 대화는 아메만이 주도했고 스미스는 경청했는데 그 자세가 굉장히 공손했다.
그에 반해 진혁은 별말이 없었다.
아메만도 투자 전문가인 듯 세계 경기를 논하며 투자 유망 상품들을 언급했는데 감각이 남달랐다.
“중동 정세의 불안, 유럽 국가들의 부도 위기, 미국의 신용 등급 강등설까지 시장이 너무 급변하고 있어요. 투자처가 많다 보니 오히려 선택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JK모건의 시각은 어떻습니까?”
“저희 분석팀에서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보니 결정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분산 투자로 가는 분위기입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을 따르시겠다는 건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본전력 공매도로 세계에서 가장 핫한 지점을 맡고 계신 분이 그렇게 원론적인 말씀만 하시니 조금 서운하게 들리네요. 최근에도 옥수수 선물을 끝까지 홀딩해 큰 수익을 남기신 것으로 아는데.”
“그건 절대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아메만 회장님을 소홀히 대하겠습니까.”
스미스가 다급한 표정으로 항변했는데 표정이 절박했다.
진혁은 아메만에게 흥미가 생겼다.
JK모건 지점장 정도 되는 인물이 이러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한편 코너에 몰린 스미스가 자꾸 옆을 흘깃거리는 모습에 아메만도 진혁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스미스에게 투자를 맡기려는 동양계 투자자의 대리인 정도로 생각했었다.
아메만이 슬쩍 진혁에게 말을 건넸다.
“초면에 실례합니다만 미스터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제가 낄 대화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밥을 얻어먹은 처지에 한 말씀드리자면,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스미스 씨 말씀처럼 분산 투자하는 게 그나마 안정적일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실망한 아메만의 표정을 보며 진혁은 말을 이었다.
“다만, 큰 수익은 기대하지 않으셔야 할 겁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말씀하신 변수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시장에는 이미 반영이 되었고요. 이런 상황에서 큰 수익을 얻으려는 건 욕심입니다. 차라리 원자재나 부동산 같은 현물 상품에 투자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회사의 포트폴리오에서 그쪽 비중은 채워져 여력이 없으니 답답해서 스미스를 붙잡고 있는 겁니다.”
아메만의 어두운 표정과 달리 진혁의 눈에는 이채가 띄었다.
회사의 포트폴리오를 언급할 정도면 단순한 투자자 그 이상이라는 말이었다.
낌새를 눈치챈 스미스가 얼른 말했다.
“아메만 회장님은 아우다 그룹의 투자와 유통을 맡고 계십니다.”
진혁의 눈이 급격이 커졌다.
아우다 그룹이라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랍 5위, 사우디아라비아 3위의 가족 기업으로 자산 규모가 45억 달러였다.
중동은 물론 유럽 및 미국에 투자를 하는 다각화된 국제 대기업으로, 영업 및 유통, 무역, 부동산, 금융 투자 및 교육 및 훈련을 포함한 다양한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거대 기업이었다.
진혁도 젯다 주재원 시절에 그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다.
스미스가 이번에는 진혁을 소개했다.
“이집트의 알라딘 컴퍼니를 운영하고 계시는 서진혁 사장님이십니다. 알쇼핑으로 유명하신 분이시지요.”
아메만의 눈은 진혁과 달리 오히려 가늘어졌다.
“라이나 왕비의 동영상에 나오는 한국 화장품을 판매한다는 그 알쇼핑입니까?”
“그렇습니다.”
“상당히 유명하신 분이셨군요. 거기 콩 통조림이 싸고 괜찮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스미스 지점장하고는 어떻게……. 혹시 미스터 서가…….”
대수롭지 않게 묻던 아메만이 뭔가를 떠올리고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