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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87화 (87/307)

87화. 아우다 그룹

“……검은 머리 짐?”

아메만의 시선을 받은 스미스는 곤혹스러운 표정만 짓고 답을 하지 못했다.

중요한 고객인 아메만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당사자가 있는데 자신이 함부로 그의 신분을 밝힐 수도 없었다. 진혁 역시 다른 이유로 대단히 중요한 고객이었다.

하지만 아메만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런, 제가 큰 결례를 했습니다. 정식으로 인사합시다. 아메만 셰이크 아우다입니다.”

“서진혁입니다.”

아메만 같은 거물이 정중하게 인사하자 진혁도 고개를 숙였다.

아메만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물었다.

“리야드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이미 아시는 것 같으니 말씀드립니다. 라이나 왕비의 동영상이 나간 후로 주문이 폭주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영향력이라면 그러고도 남지요. 아, 쑤피넷하고도 관계가 있으시지요? 하이다르 회장도 들어와 있는 것으로 압니다.”

“……!”

“제가 유통도 관여하고 있어서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배송 문제로 여러 유통업체와 접촉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성과는 있습니까?”

“협의 중에 있습니다.”

뜨뜻미지근한 답변에 아메만의 눈이 더욱 반짝였다.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알쇼핑의 사정이 급한 것을 알고 유통업체들이 유리한 조건을 받아내려고 버티는 게 틀림없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아우다 그룹에서 도와드리지요.”

“아우다에서요?”

“IATCO라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충분하다 못해 넘쳐났다.

아우다 그룹의 유통회사인 IATCO는 30개의 창고 및 유통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150개 이상의 도시 및 농촌 지역 내 25,000개 이상의 소매점에 적시에 배송할 수 있는 유통망을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동에서는 보기 드물게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 서비스를 제공하는 300개 이상의 현대식 배달 밴도 운영하고 있었다.

진혁이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당연히 고맙다며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그 모습에 아메만이 미소를 지었다.

“아우다 그룹은 선친인 아므르 와르다 아우다께서 젯다의 작은 도매업체를 설립한 게 시초였습니다. 미국 유명 브랜드의 독점권을 취득한 게 주효했죠. 하지만 그보다는 소비 시장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성장 가능성이 있는 업체와 제휴, 그들 브랜드를 선점한 게 지금의 성장을 이끈 원동력입니다.”

“……!”

“그런 관점에서 알쇼핑과 라이나 왕비의 화장품은 상당히 매력적인 상품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전 알쇼핑을 매각할 계획도, 왕비님이 칭찬하신 화장품을 남의 이름으로 팔 생각도 없습니다.”

진혁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아우다도 다른 대형 유통업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뭔가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우린 알쇼핑을 인수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물론 우리도 오래전부터 인터넷 쇼핑 시장이 커질 것이라 예상해 쑤피넷을 주목하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판단 하에 지켜만 보고 있습니다.”

“……!”

“또한 화장품 사업을 인수할 의향도 없습니다. 라이나 왕비의 성정을 봐서는 미스터 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걸 절대 용납하실 분이 아닙니다. 항의 영상이라도 올린다면 우리가 크게 곤란해질 것을 아는데 그런 우매한 짓을 할 리가 없지요.”

“그럼 그냥 도와주시겠다는 겁니까?”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시장만이라도 오프라인 시장의 독점 판매권은 주셔야 합니다. 알쇼핑과 쑤피넷은 포기 안 하실 것 같으니 온라인 시장은 양보하죠. 더불어 가능하시다면 통조림도 공급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혁의 표정은 더 곤혹스러워졌다.

아메만은 고단수였다. 화장품은 물론 통조림까지 일방적으로 손해 보는 조건으로 유통시켜 주겠다는 건 이유가 있었다.

비즈니스는 기브 앤 테이크였다.

현지 독점 판매권을 주었는데 움직이지 않는다면 최악이다. 온라인 유통에 도움을 받았으니 다른 쪽으로 보답을 받겠다는 전략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마음을 굳혔다.

일단 지금 위기를 해결하는 게 급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상대의 안을 받아들이는 건 체질상 맞지 않았다.

“좋습니다. 도움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했소.”

“다만, 독점 판매권의 계약 기간은 2년으로 하고 상호 협의 하에 연장이 가능하게 바꾸지요.”

“생각보다 욕심이 과한 분이군요.”

“전 아메만 회장님이 더 욕심이 많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겨우 아이템 하나 추가해 주고 검은 머리 짐의 투자 전략을 독점하겠다는 겁니까?”

“……!”

아메만이 찔끔했다.

사업에서는 그가 우위에 있지만 투자는 진혁이 앞서 있었다. 게다가 그쪽이 규모가 훨씬 컸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는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아메만을 놔두고 내내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스미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메만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동안 옥수수 선물 정산부터 하시지요.”

“음……. 알겠습니다.”

스미스가 슬쩍 아메만의 눈치를 보고 가방에서 정산서를 꺼내 내밀었다.

“1억 달러를 투자해서 청산한 결과 수수료 제외하고 8천만 달러 조금 넘게 남겼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이걸 전부 바로 재투자하겠습니다.”

“전부 바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요.”

“감사합니다.”

스미스의 입이 짝 찢어졌다.

그는 이번에도 많아야 반절 정도 투자를 유치할 줄 알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바로 투자하겠다는 건 그만큼 확신이 있다는 방증이었다.

이번에도 편승할 수 있다면 꿈에 그리던 뉴욕 지점장에 한발 더 다가가게 된다.

하지만 진혁은 거기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시선을 아메만에게 돌렸다.

상황이 그러니 아메만이 더 이상 자존심만 따지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아우다 투자 회사에 투자처를 찾지 못해 대기하고 있는 자금이 30억 달러가 넘었다.

“내가 졌소.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사업에는 어리숙한 것 같더니 승부에 들어가니 그 진면목이 나오는구려. 미스터 서가 왜 검은 머리 짐이라 불리는지 알겠소.”

“감사합니다. 저도 답례를 하지요. 일본 시장을 보고 있습니다.”

“일본에 또 무슨 사건이 터집니까?”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바닥을 쳤으니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원전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고 배상 문제까지 남아 있는데 쉽게 반등하겠습니까?”

그런 시각은 아메만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세계의 모든 투자자들이 일본은 한동안 일어서지 못할 거라며 잊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은 달랐다.

그 시절을 살아 봤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본의 저력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맞고, 고베 대지진 속에서도 일어선 경제 대국입니다. 이대로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일본 기업들이 처한 대내외적인 상황이 너무 좋지 않잖습니까? 가장 큰 문제는 엔고 현상입니다. 미국, 유럽, 중동이 모두 불안하니 안전 자산으로 일본 엔화가 치솟고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일본 기업들의 수출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이 투자의 적기입니다. 엔고는 곧 해소될 겁니다. 일본 정부가 경제 재건을 위해 대규모 엔화를 시장에 풀 테니까요. 앞으로 한동안 엔저 시대가 도래합니다.”

“음…….”

“올해 말 선거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당선될 거란 예상은 이미 여러 기관에서 언급한 사실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정치를 잘 압니다. 대담한 금융 완화와 고강도 경기 부양책으로 국민들의 환심을 사려고 할 겁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엔저 현상을 가져올 거라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논리정연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아메만은 바로 수긍하긴 힘들었다. 검은 머리 짐을 처음 본 탓이었다.

하지만 스미스의 반응은 전혀 반대였다. 그는 이제 진혁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었다.

그가 흥분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어디에 투자해야 합니까?”

“엔저가 되면 해외에서 가격 경쟁력이 생겨 수출업체가 호황을 맞게 될 겁니다. 전자기기와 자동차 회사에 투자할 작정입니다.”

“전자기기, 자동차…….”

스미스는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 두 단어를 계속 중얼거리며 머리에 심었다. 그 모습에 아메만도 마음을 정했다.

“좋소. 나도 검은 머리 짐의 판단대로 투자하겠소.”

“종목 선정은 각자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너무 한쪽으로 자금이 몰리면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알겠습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제가 한 이야기는 절대 외부로 흘러가면 안 됩니다. 그만큼 우리의 몫이 줄어듭니다.”

“우리 쪽은 걱정 마시오. 내일 호텔로 사람을 보내겠소. 약속은 지키리다.”

“그 마음이 서로 변치 않는다면 독점판매권의 계약 기간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될 겁니다.”

세 사람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진혁은 하이다르를 찾아가 아우다와 협력하기로 했다고 알렸다.

“정말 잘됐소. 아우다 그룹이라면 지금의 몇십 배, 아니, 몇백 배 주문도 처리할 수 있어요. 지금 당장 다시 공지를 올리고 주문 받으라고 해야겠소.”

“죄송합니다. 회장님께 먼저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데.”

“무슨 소리요. 난 내 역량을 압니다. 온라인 판매권을 지켜 준 것만으로도 고맙소. 오프라인 판매가 잘되면 인지도가 올라가 온라인 판매도 늘 테니 내게도 좋은 일이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무튼 대단합니다. 아우다를 끌어들일 줄은 몰랐소.”

“운이 좋았습니다. 그럼 이만 쉬십시오.”

방으로 돌아온 진혁은 카심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갈리 사장을 부르라고 지시했다.

진혁은 오랜만에 편히 잠이 들었다.

하지만 아메만과 스미스는 그러지 못했다.

각기 회사로 돌아가 투자분석팀을 불러 모아 일본 시장에 대해 분석하느라 밤을 새웠다.

* * *

다음 날, 첫 비행기로 도착한 갈리와 함께 IATCO 경영진과 업무 협약을 맺고 스미스와 점심을 먹었다.

“도와주신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되었습니다.”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미스터 서의 운이 좋으신 거죠. 그때 아메만 회장님을 딱 만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도 도움이 되셨다니 기분이 좋습니다.”

“약속대로 일본 기업에 투자해 주십시오. 전자부품 기업은 소니, 자동차는 마쓰다를 절반씩 매입해 주십시오.”

“소니와 마쓰다 자동차. 알겠습니다.”

스미스의 눈이 번들거렸다. 가장 중요한 정보였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능력 있는 변리사를 알고 계시면 소개 부탁합니다.”

“특허 등록을 하시게요?”

“그럴 게 몇 개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최고로 소개해 드리지요.”

“죄송한데 만나는 것은 카이로에서 하게 해 주십시오. 아시겠지만 지금은 그쪽 일을 처리하는 게 먼저라서요.”

“그건 걱정 마십시오. 미스터 서의 일이라면 지구 어디라도 찾아가게 하겠습니다.”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을 돌려주는 진혁의 성격을 알기에 스미스가 오히려 더 적극적이었다.

나중에 연락하기로 하고 헤어져 이집트로 돌아왔다.

위기를 해결한 진혁과 달리 이집트 상황은 다시 꼬여 갔다.

무슬림 형제단의 지지로 당선된 하페즈 대통령은 예상대로 이슬람 원리주의 길을 선택했다.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비난함으로써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는 한편, 측근들을 무슬림 형제단 인사들로 배치했다.

때마침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를 모독한 영화 ‘무슬림의 무지’의 파문으로 반미 시위와 예멘 미국 대사가 피살되는 사건마저 발생하자, 정국이 급격히 혼란에 빠져들면서 관광객이 급감했다.

이집트 최대 수익원이 관광 수입이 줄자 재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곡물 가격 파동과 부족한 외환 보유고로 기간산업과 연료 보조금이 축소되고, 수출입 관세가 오르는 데 반해 파운드와 가치는 하락하자 가정은 물론 기업도 생존의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페즈는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파라오 헌법’을 국민 투표에 붙이겠다고 군부와 세속주의 진영을 압박하며 혼란만 부추기고 있었다.

“밀가루를 구할 돈이 없어 국영 빵집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져 사재기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IMF 실사단이 방문하면 더 힘들어질 거라면서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러다가 그리스처럼 국가부도 사태까지 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보고하는 갈리와 하마드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아랍의 봄을 겪은 터라 그때의 혼란이 다시 재현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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