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줘도 못 먹는
“한국도 비슷한 시기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국민 각자가 제 위치에서 주어진 일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장품 생산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24시간 풀로 가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유닉스에서도 재고를 전부 보내주기로 했고, 그쪽에서도 색조 화장품을 다시 생산하기 시작했으니 조만간 진정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24시간 가동 체제는 최소 올해 말까지 유지해야 합니다. 그에 따른 인력을 추가로 확보하도록 하세요. 공장을 증설하는 문제도 검토해 주시고요.”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번 일은 라이나 왕비님으로 인한 특수한 경우입니다. 저희 제품 인지도가 아직은 낮아서 소비자들이 곧 잊을 겁니다.”
핫산의 우려하며 말하자, 진혁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일회성이 아닙니다. 라이나 왕비께서 우리 제품이 나오는 영상을 곧 다시 올리시게 될 겁니다.”
“정말입니까?”
“이 사실은 절대 밖으로 새나가면 안됩니다. 왕비께서 11월에 한국에 가시는데, 한류와 한국 화장품의 우수성을 체험하시는 일정이 들어 있습니다. 그분의 성정을 봐서 그냥 넘어가지는 않으실 겁니다.”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군요.”
“맞습니다. 이번에는 예상치 못해 제대로 효과를 보지도 못했습니다만 다음 기회는 절대 놓칠 수 없습니다. 알라딘 제품을 홍보할 최적의 기회입니다.”
“알겠습니다.”
흥분된 기색의 사장들을 놔두고 처음으로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아자데 센터장에게 시선을 줬다.
“아우다 그룹이 유통을 맡아 주기로 했다는 말은 들으셨을 겁니다. 그걸 얻기 위해 많은 것을 양보했습니다. 최대한 이용해 먹어야 하는데 지금의 제품군만으로는 양에 차지 않습니다.”
“그러실 줄 알고 오기 전에 개발된 제품에 대한 양산 계획을 세우라고 했어요. 그럼 품목이 크게 늘어날 겁니다.”
“역시 아자데 센터장님이십니다. 하하하하하.”
진혁은 미리 알고 움직여 준 모습에 흡족한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사장들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지만 오히려 아자데는 아니었다.
“남자들이 통이 좁군요.”
“헉!”
느닷없는 역습이었다.
특히나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에서 여자가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했다.
다들 첫 경험이었다.
하지만 아자데는 프랑스에 자란 신여성이었다.
“아우다 그룹은 대형 쇼핑몰도 몇 개나 가지고 있는 유통 공룡입니다. 그들의 매장에 알라딘 부스를 설치하자고 해도 모자랄 판에 겨우 물건 조금 더 늘려서 배달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험험……. 물론 아자데가 하신 말씀도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우선 급한 불을 끄고 공장이 증설되면 그 때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생각이었습니다.”
“당장 공장을 증설해서 생산량을 늘리는 것도 맞아요.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것은 생산량이 아니라 아이템입니다.”
“아이템요?”
“우리가 취급하는 제품은 스킨케어와 색조 화장품 두 종류밖에 없어요. 아무리 가짓수를 늘려도 아우다 그룹에서 매장을 내주진 않을 겁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매장을 받으려면 최소한 구색은 갖춰야 했다.
진혁이 생각에 빠져들자 갈리가 대신 입을 열었다.
“아자데 센터장님의 말씀은 맞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말씀하셨듯이 그건 천천히 시간을 두고 검토해서 진행할 사안이라고 봅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어떤 품목을 생산할지도 중요하지만 그러기 위한 부지와 공장 증설까지 고려할 게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랑콤에서 직접 생산하는 제품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
“많아야 20%이고, 나머지는 OEM이나 ODM으로 납품받아 상표를 달아 판매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말입니까?”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아이템을 늘리는 길입니다. 랑콤과 거래했던 업체들이라 기술력과 품질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자데는 작정하고 온 듯 준비한 서류를 나눠 줬다.
향수, 바디, 헤어, 소품별로 업체들 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모두 중동에 위치해 있어 지리적으로 가까웠다.
“몇 군데 전화를 해 봤는데, 최근 중동 정세의 불안으로 매출이 급감해 요청만 하면 언제든지 응하겠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합시다.”
“사장님!”
“신중한 것도 좋지만 사업은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이나 왕비님이 언제까지 우리 제품을 홍보해 주실지는 자신하지 못합니다. 이때 최대한 승부를 봐야 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OEM이나 ODM이라면 부담도 없습니다.”
“회원들도 선택 폭이 넓어지면 한번 구매할 때 가지 수를 늘려 잡을 테니 객단가가 늘어나 수익에 도움이 될 겁니다.”
갈리를 제외하고 다들 찬성했다.
“그럼 이번 일은 아자데 센터장님과 갈리 사장님과 상의해서 진행해 주세요.”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향수는 자금의 여유가 되시면 인수를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직접 생산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중동에서 제일 비중 있는 제품은 향수입니다. 더운 날씨로 땀은 많이 나는 반면 물이 부족해서 생긴 현상입니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남성 고객도 잡을 최적의 아이템이니 직영하는 게 좋습니다.”
진혁도 충분히 경험한 바였다.
일부 바이어 중 위생 관념이 떨어지는 상대를 만날 때는 향수 냄새로 숨을 쉬기 힘들었던 경험이 여러 번이었다.
갈리가 반대하려는 모습에 진혁이 손을 들어 막았다.
“센터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보니 적당한 업체가 있나 보군요.”
“파인콜로뉴가 인수 의향이 있는지 먼저 타진해 왔어요.”
“파인콜로뉴가요?”
하마드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마리코(Marico)와 함께 이집트 향수품 시장을 양분하고 있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업체였다.
아무리 이집트 상황이 최악이라지만 이렇게 쉽게 매물로 나올 회사가 아니었다.
“사장 제이슨 맨드릭이 콥트교도거든요.”
“아!”
모두 안타까운 탄성을 터트렸다.
이집트 내 기독교 정파 콥트교도는 인구의 10%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90%를 차지하는 무슬림과 종교적인 갈등이 있었지만 심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하페즈가 당선되면서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득세하자 상황이 급격히 악화됐다.
거기에 ‘무슬림의 무지’를 제작한 감독이 이집트 내 콥트교도라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곳곳에서 잔인한 보복이 자행되고 있지만 경찰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파인콜로뉴에 대한 대출금 연장을 은행이 거부하자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제이슨 맨드릭이 결국 회사를 넘기고 이집트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진혁도 한국의 IMF 시절 당시 수많은 우량 기업들이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로 쓰러지고 흡수 통합되는 과정을 지켜봤었다.
안타까운 사연이지만 알라딘에게는 행운이었다. 진혁은 즉시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그럼 인수협상을 시작하세요.”
스미스가 소개한 변리사가 도착하자, 진혁은 스케치북을 건네주고 특허 신청을 해 달라고 했다.
“이건 특허 신청보다는 실용신안으로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요?”
“특허권은 산업상 이용 가능성, 진보성, 신규성 등을 인정받아야만 권리로서 등록이 가능하기 때문에 절차가 까다롭습니다. 그에 반해 실용신안은 아이디어만으로도 등록이 가능합니다. 실용신안 자체가 어떤 물건을 더욱 쓸모 있게끔 개발한 자의 기술을 보호하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실용신안으로 해 주십시오.”
변리사는 이후에도 꼼꼼하게 해당 제품에 대해 질문을 해서 신청 대상 국가를 선정했다.
특허권이건 실용신안이건 해당 국가별로 등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스미스가 골라 보낸 사람답게 일 처리가 확실했다.
* * *
일주일 후 진혁은 공장과 직원 고용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파인콜로뉴를 500만 달러라는 저렴한 금액에 인수할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진혁은 회사명을 알라딘 화장품으로 바꾸고 아자데에게 CEO를 맡겼다. 더불어 다른 아이템들도 납품 업체를 선정해 종합 화장품 회사의 구색을 갖췄다.
화장품 쪽의 일이 정리가 되고 변리사로부터 실용신안 등록 작업이 끝났다는 연락을 받은 진혁이 태후전자 현지 법인 사무실을 찾아갔다.
사장 장근석은 자리에 있었는데 맞이하는 얼굴이 곱지 않았다.
“공사가 다망한 서 사장이 갑자기 어쩐 일이오?”
“준공식 때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난 것 같아 차나 한잔할까 하고 들렸습니다.”
“비록 독립 법인이라지만 카이로 지사도 엄연히 같은 태후의 식구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 같지 않아 조금 섭섭하긴 했소.”
“국방장관님이 갑자기 공장을 보자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습니다.”
“두 집 살림을 하는 사람이라 역시 나랑 입장이 다르군요. 정 부사장님을 가볍게 여길 정도로.”
계속 비꼬는 장근석의 태도에 진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초청장을 보내지도 않았더군요. 준공식이 있다는 이야기도 우연히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밑의 직원이 실수한 모양이오.”
뻔한 거짓말을 하는 모습에 한마디 더 해 주려다가 참았다. 어떻든 태후라는 이름을 같이 쓰고 있는 처지였다.
“이집트 내 판매는 잘되고 있습니까?”
“그걸 왜 서 사장이 신경 쓰는 겁니까?”
“사장님 말씀을 빌리면 같은 태후 식구라서요. 제가 알쇼핑이라는 인터넷 쇼핑몰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제품을 올려 판매할까 해서요.”
장근석의 얼굴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떠올랐다. 요즘 그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태후전자 공장은 생산량의 20%까지 이집트에 판매할 수 있었다.
원래는 태후 본사의 도움을 받아 판매하려고 했는데 준공식의 일로 진혁이나 최영재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영 내키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일부러 찾아와 먼저 팔아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정호영이 진혁에게 보인 반응이 맘에 걸렸다.
“지금 제품을 팔아 주겠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기능의 일부를 여기 사정에 맞게 개선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해당 제품은 할랄 인증을 받아 주십시오.”
“전자제품까지 할랄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요?”
“의무 사항은 아닙니다만 할랄 인증이 있으면 소비자가 좀 더 믿고 구매하게 될 겁니다. 다른 무슬림 시장의 판매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진혁은 한국에서 생각해 낸 전자제품 판매 촉진을 위한 기능 개선에 대해 들려줬다.
이야기가 다 끝났는데도 장근석은 바로 답을 주지 않았다.
“담장자들과 검토해서 연락을 드리리다.”
“알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린 내용은 실용신안 등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럼.”
진혁도 할 말을 다했기에 미련 없이 일어나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카심이 분통을 터트렸다.
“아우, 뭐 저딴 인간이 있어요? 먼저 찾아와 도와달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판매해 주겠다는데 검토는 무슨 검토야?”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니까요. 좀 신중한 성격인 것 같습니다. 어차피 받아들이겠지만 여러 사람 의견을 들어서 나쁠 건 없지요. 인수한 공장도 둘러봐야 하니 어서 출발합시다.”
진혁이 서두르자 카심도 입을 닫아야 했다.
* * *
한편 혼자 남은 장근석이 고민하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태후 에너지 부사장실입니다.
“태후전자 이집트 현지 법인장입니다. 부사장님 자리에 계십니까?”
-마침 계십니다.
“연결해 주십시오.”
전화가 연결되는 동안 장근석은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담당자 만 명의 의견보다 단 한 명의 생각이 더 중요했다.
전화기로부터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전자의 일을 왜 내게 보고합니까?
“서진혁과 관련된 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장근석은 여러 번 침을 삼켜야 했다.
자신의 예상이 틀리면 큰일이었다.
다시 들린 정호영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이야기해 보세요.
“오늘 갑자기 찾아와서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쇼핑몰에 우리 제품을 올려 팔아 주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쇼핑몰에요?
“그렇습니다. 알쇼핑이라고 여기서는 꽤 유명한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조건을 달았습니다.”
장근석은 할랄 인증과 개선 인증까지 이야기했다.
“일단 검토해 보겠다고 하고 돌려보내고 바로 전화드린…….”
채 이야기도 끝나기 전에 정호영의 호통이 터졌다.
-지금 제정신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