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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89화 (89/307)

89화. 먼저 먹는 놈이

정호영의 호통이 이어졌다.

-어떻게 그게 검토할 사항입니까?

“…….”

-우리 태후전자 제품의 품질은 세계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걸 제멋대로 고치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해서 못 팔고 재고로 쌓이면 책임지겠답니까? 게다가 전자제품에 할랄 인증이라니요. 가당치도 않는 조건을 달아 실용신안 사용료만 챙기려는 꼼수잖아요.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잔머리가 뛰어난 놈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대하셔야 합니다. 앞으로도 그자와 관련된 일은 내게 먼저 보고하고 처리하세요. 전화하신 것은 잘하신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명심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장근석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화하지 않고 혼자서 결정해서 진행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여러모로 맘에 들지 않은 서진혁이었지만 덕분에 정호영과 직통 라인이 생겼으니 나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핫산이 찾아왔다.

“혹시 어제 태후전자에 방문하셨습니까?”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쪽 사장이 전화를 해 왔는데 내용이 좀 황당합니다.”

“뭐라던가요?”

“제품을 수정할 생각이 없다면서 공급받고 싶으면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신청하랍니다.”

진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가 막혔다.

제안을 거절한 것도 이해가 안 됐지만, 그보다 자신을 놔두고 핫산에게 통보 식으로 이야기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진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핫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제가 그쪽 사장을 따로 만나 볼까요?”

“됐습니다. 이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잊으십시오.”

거의 보기 힘든 진혁의 차가운 반응에 핫산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겨우 화를 삭인 진혁이 수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나이트클럽으로 유명한 켐핀스키 니엘 호텔의 커피숍으로 가자 TG전자 현지 법인장인 윤기성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일찍 나온 겁니다.”

윤기성은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언변이 있었다. 비즈니스맨에게는 큰 강점이었다.

“갑자기 전화 주셔서 놀랐습니다.”

“저희가 못 볼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말과는 달리 윤기성은 내심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진혁은 어떻든 태후 쪽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비즈니스 문제로 상의할 게 있다고 해서 오긴 했지만 짐작되는 게 전혀 없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진혁이 물었다.

“전자제품 판매는 어떻습니까?”

“중국 제품에 실망한 중산층 위주로 조금씩 늘고는 있습니다만, 이집트 경제 상황이 좋지 못하다 보니 그 속도가 더딥니다. 거기에 태후전자까지 끼어들어 할인 행사를 진행하는 바람에 고전하고 있습니다.”

“가격 할인은 중국 제품 때문에 먹히지 않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장 사장이 여기가 처음이라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한국 제품에 대한 인식만 나쁘게 하는 꼴인데도 말입니다.”

“품질로 공략해야 합니다. 그래서 업무 제휴를 제안합니다.”

“저희와 말입니까?”

윤기성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태후전자가 있는데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라딘 컴퍼니에서 제안하는 겁니다. 알쇼핑의 판매 품목을 확대하는 중인데 가전제품도 일부 포함시킬까 합니다. 품질이 뛰어나면 어디 제품인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지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최대한 맞추겠습니다.”

윤기성이 자세를 바로 했다.

어떤 사정인지는 나중 문제였다. 진혁의 활약상과 알쇼핑의 폭발적인 성장을 곁에서 지켜봤다.

이건 무조건 잡아야 했다.

“우선 알쇼핑에 입점하는 제품에 대해서는 할랄 인증을 받아 주십시오.”

“전자제품에도 할랄 인증을 받으실 생각이십니까?”

“알쇼핑에서 판매하는 모든 제품은 할랄 인증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 회원들이 믿고 구매를 하는 거고요. 법과는 상관없이 무슬림들이 그걸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윤 사장님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물론 잘 알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근석과는 달리 이곳에서 오래 생활한 윤기성이라 금방 이해했다.

“더불어 제품의 기능도 보완을 해 주십시오.”

“어떻게 말입니까?”

“우선 TV인데, 스태빌라이저를 기본 기능으로 넣어 주십시오.”

“정압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집트는 물론 중동 전체가 전력 공급이 불안정해 전압 차가 심하고 단전이 잦아 전기제품이 고장이 잘 납니다.”

그런 이유로 가정마다 정압기를 별도로 구매해 사용하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윤기성이 답했다.

“제품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라는 걸 알겠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원가가 올라가 가격을 인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 제품을 구매할 고객은 중산층 이상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리 큰 부담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스태빌라이저가 내장된 신제품을 개발하겠습니다.”

“다음은 세탁기입니다. 현재 생산된 세탁기로는 히잡을 세탁할 수 없어 무슬림 여성들은 일일이 손빨래를 하고 있습니다.”

“예? 세탁기를 놔두고 손빨래를 한다는 말씀이 이해가 안 됩니다. 좀 더 자세히 알려 주십시오.”

윤기성의 솔직한 말에 오히려 믿음이 갔다.

“코란에는 히잡 빨래를 마친 뒤 맑은 물에 가볍게 흔드는 ‘세례 의식’을 하도록 규정돼 있다고 합니다. 탈수 전에 새 물을 3분의 1 정도 채우고 세탁통을 좌우로 두 번씩 회전시켜 주면 이 의식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것도 아십니까?”

“고객의 욕구를 파악하고 합당한 제품을 제공하는 게 제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할랄인증원의 자문까지 마친 사항이니 정확한 겁니다. 제품 개발은 가능하시겠습니까?”

“가능할 겁니다. 아니, 반드시 가능하게 하겠습니다.”

“답변이 누구와 달리 시원해서 좋습니다. 이번 제품의 반응이 좋으면 다른 국가에서도 판매를 할 생각이니 잘 만들어 주십시오.”

“말씀하신 대로 기능 보완을 해서 빠른 시일 내에 찾아뵙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십시오.”

거듭 고개를 숙인 윤기성은 실용신안권 사용료로 3%를 지급하는 것도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진혁은 후련함과 함께 답답함을 느꼈다.

장근석 때문이었다.

상사원이라면 윤기성같이 행동했어야 했다.

진혁은 기술자가 아니지만 이 정도는 조금만 신경 쓰면 충분히 가능한 기능 개선이었다.

설혹 나중에 다른 문제로 안 되더라도 일단 무조건 수용하겠다고 하고 내부적으로 해결책을 찾는 게 맞았다.

바이어보고 자신의 제품에 맞추라는 건 말도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예상대로 윤기성은 다음 날 바로 전화했다.

“기술진도 기능 보완에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제품 개발을 서두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진혁이 다시 한번 입맛을 다셨다.

장근석의 편협한 사고가 아쉬웠다.

* * *

진혁은 알라딘 화장품의 정식 발족과 함께 인수한 파인콜로뉴 공장의 정상 가동을 지휘했다. 뿐만 아니라 협력 업체로부터 받은 샘플을 확정하고 양산 체제에 들어갔다.

기존 동성F&B의 공장도 증설을 마쳤고, 사장이 된 아자데가 준비한 신제품까지 속속 만들어져 창고에 쌓이기 시작했다.

윤기성의 적극적인 협조로 TG전자의 ‘히잡 세탁기’, ‘스태빌라이저 TV’도 테스트를 거쳐 양산을 하고 있었다.

차근차근 준비하는 사이 어느덧 시간이 흘러 라이나 왕비의 방한 시기가 되었다.

진혁은 마르와를 데리고 요르단으로 넘어갔다.

요르단 왕실의 전용기가 인천 공항에 착륙하고 얼마 후 출국장의 문이 열렸다.

라이나 왕비가 두 공주와 함께 퍼플 계열의 드레스를 입고 나오자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빼어난 외모와 교육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 덕에 세계 언론으로부터 왕보다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물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중동판 신데렐라 스토리는 며칠 전부터 언론에 소개돼 많은 한국여성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즉시 미리 마련된 회의장으로 이동해 기자 회견을 열었다.

방송 카메라와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에도 라이나 왕비는 전혀 위축됨이 없이 친절하게 답변을 했다.

가장 많은 질문은 역시 갑작스런 방한 이유였다.

“작년 세계개발원조총회에 참석했을 때 한국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식 일정이 많아 한국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돌아가야 해서 아쉬웠습니다. 마침 아이들 방학을 맞아 외국 여행을 생각하며 제일 먼저 떠오른 게 한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한국을 보고 돌아갈 생각입니다.”

다음으로 이어진 질문은 최근 올린 한국 화장품 동영상에 대한 것이었다.

“솔직히 그전까지는 한국이 화장품을 생산하는지도 몰랐습니다. 헌데 막상 써 보니 세계적인 화장품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더군요. 아니, 어떤 면에서는 우리 체질에 맞고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런 좋은 제품이 있다는 것을 널리 알려 보다 많은 여성들이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한 일입니다.”

이어진 질문은 역시 신데렐라 스토리와 기부와 교육에 대한 활동에 대한 것들이었다.

길어지는 기자 회견 시간에 한쪽에서 지켜보는 진혁이 입맛을 다셨다.

“한국 기자들이 집요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명’에도 이름을 올리신 분이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개별적으로 인터뷰해 달라는 압력을 막느라 고생 많이 했습니다. 겨우 이렇게 기자 회견으로 마무리된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화를 나누는 이는 국정원의 김상균 과장이었다.

한국 쪽 경호 책임자로 일정 조율을 위해 여러 번 대화를 나누어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김상균이 진혁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위에서 대선 후보 캠프의 요청은 그렇다 하더라도 청와대의 면담은 다시 한번 재고해 달라는 부탁 말씀이 있었습니다.”

“왕비께서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시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공식 일정을 일절 잡지 않은 겁니다. 휴가차 오신 것이니 편히 구경하시다 가게 해 주십시오.”

미국,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대선이 코앞에 다가와 후보들 간의 경쟁이 치열했다.

자신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어떻게든 만나려고 한국은 물론 요르단 왕실까지 손을 뻗었다.

하지만 라이나는 진혁의 제안을 받아들여 모두 거부했다. 어느 한쪽만 만나면 오해를 사고 악용될 소지가 충분했다.

김상균도 그 부분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 점이 있었다.

“왕비의 뜻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서 사장님마저 언론에 노출되지 않게 해 달라는 말씀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사업에 도움도 되고 한국에서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되실 텐데요.”

“전 사업가지 연예인이 아닙니다. 실력이 아닌 인기에 편승해서 사업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진혁이 굳은 얼굴로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인기는 신기루 같은 존재였다. 남의 시선을 쫓다가 정작 자신을 잃어버린 아픈 기억이 있었다.

다시 그런 허황된 인생을 살 수는 없었다.

그런 진혁의 우직한 모습에 김상균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그가 유명해지려고 했었다면 납치된 관광객을 구출했을 때 전면에 나섰어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겨우 기자 회견을 끝내고 숙소인 조선호텔로 이동했다.

오랜 비행으로 지친 라이나 왕비 모녀가 마르와의 피부 마사지를 받으며 쉬고 있을 때 주방은 분주해졌다.

식사 준비를 하는데, 호텔 측 주방장들이 모두 나가고 요르단에서 함께 온 주방장들이 조리를 했다.

재료나 기구도 요르단에서 가져온 것만 사용했다.

할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한국이라 어쩔 수 없이 내려진 조치였다.

그녀는 교육의 여왕답게 종일 부설 초등학교를 방문해 영어 수업도 진행하고, 아이들과 대화도 나누고, 작품도 구경하며 한국의 초등학교 교육에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한국은 교육의 힘으로 나라를 바꾼 대표적 케이스라며, 앞으로 두 나라가 교육적 측면에서 서로 협력하는 방안을 찾고 싶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이후에는 진혁이 세운 계획에 따라 모두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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