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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90화 (90/307)

90화. 라이나 왕비 방한

한남동 정진호의 자택 응접실에 마련된 TV에서도 라이나 여왕에 대한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정진호도 자식들과 함께 과일을 먹으며 시청하고 있었다.

“대단한 여자다.”

“그녀가 오자마자 지겹게 반복되던 선거 이야기들이 쑥 들어갔어요.”

“국민들이 운 좋은 신데델라에 너무 심취된 것 같아요.”

정호영이 무심코 한 말에 정진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보기에는 그녀가 단순히 운이 좋아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느냐?”

“기사에서도 그렇게 나오고, 솔직히 요르단 국왕이 참석한 파티에 오지 않았다면 그저 한 명의 평범한 여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겁니다.”

“네 말이 맞다. 그건 행운이었지. 일생에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하지.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그걸 느끼지 못하고 지나쳐서 모를 뿐이지. 저 여자가 대단한 것은 그걸 잡았고, 그걸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는 점이다.”

“…….”

“너희 둘 모두 태후가에 태어난 건 분명 행운이다. 하지만 그게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너희들 스스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야지만 살아남는다는 점은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행운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건성으로 답변하는 정호영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은 정진호가 시선을 정인영에게 옮겼다.

“왕비의 방한을 추진한 자가 서진혁이라는 걸 아느냐?”

“그 사람이요?”

정인영은 물론 정호영마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도 오늘에서야 들었다. 국정원에서 이번 일을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해서 다들 몰랐다고 하더라. 하지만 너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지난번 들어왔을 때 제가 중국에 있어서 만나지 못했습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능력이 뛰어난 놈이다. 세계의 모든 영웅들에게는 반드시 뛰어난 책사가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잘 생각해 봐라. 매출도 중요하지만 사람 관리는 훨씬 더 중요하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자가 어떻게 왕비랑 연결이 된 겁니까?”

정호영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돌아온 것은 정진호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지난번 이집트 공장 준공식에 갔을 때 서진혁을 보지 못했느냐?”

“잠깐 얼굴만 봤습니다. 워낙 중요한 사람들이 많이 온 데다 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떠나 버려서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었고요.”

“국방장관과 함께 떠났다는 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무슨 공장을 구경하러 간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바보 같은 놈. 그게 바로 이 일의 시발점이었다.”

“……?”

“서진혁이 SEZ에 화장품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정인영이 입을 딱 벌렸다.

“설마 라이나 왕비의 동영상에 나오는 한국 화장품이 진혁 씨의 공장에서 만든 제품이란 거예요?”

“맞다. 네가 중국 시장을 공략할 때 놈은 중동 시장을 노리고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보면 볼수록 탐나는 놈이다.”

정진호의 눈이 번들거릴수록 정호영의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정진호가 누굴 이렇게 칭찬한 적은 처음이었다.

반대로 자신은 정인영이 적시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크게 혼났을 상황이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정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잠시 진혁 씨를 잊고 있었어요. 아웃도어에 이어 화장품에 대해서도 전문가처럼 말할 때 이런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었던 거였군요.”

“맞다. 놈은 굉장히 치밀한 놈이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진혁 씨는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성격이에요. 우리 품에 안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안다. 그러니까 맨땅에서 시작해 이만큼 올라올 수 있었겠지. 하지만 곧 한계를 느낄게 될 거야. 놈은 지금 개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정점에 다다랐다. 그다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돈과 조직이 받쳐 줘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 그럼 오지 말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게 될 거다. 그게 중소기업의 한계다.”

태후 그룹의 성장 이면에는 수많은 중소기업가들의 피눈물이 있었다.

뛰어난 기술력을 가지고도 자금과 운영 능력이 부족해 꽃을 피우지 못할 때, 태후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그들을 인수해 가며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정인영이 화장품 사업 진출이 결정되자마자 제일 먼저 유망 중소 화장품 회사부터 인수한 게 그 대표적인 예였다.

정진호가 정인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요즘 홍보실에서 너에 대한 기사가 나가는 데 신경 쓰고 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인영은 요즘 가장 촉망받는 차세대 여성 기업인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아웃도어 브랜드 ‘스페이스 워커’의 성공에 이어 화장품 사업에 진출한 뒤 거침없는 행보로 중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자 연일 호평을 쏟아내고 있었다.

“넌 충분히 네 능력을 입증했으니 칭찬받아 마땅해서 내린 조치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번 기회에 화장품을 별도 회사로 분리시킬 작정이다.”

“아버지.”

“……!”

이번에도 정인영은 물론 정호영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화장품이 고부가 가치 사업으로 미래 먹거리라는 것은 이미 여러 경제 전문 기관의 보고서에서 언급된 사실이니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고 그룹 내에서도 시기상조라고 반대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맞습니다, 아버지. 너무 성급한 결정일 수도 있습니다.”

정호영이 반대하자, 정진호의 눈가에 그늘이 드리워졌다가 빠르게 지워졌다.

하지만 정인영은 그런 경륜이 없었다. 노려보는 시선이 비수같이 날카로웠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진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인영이가 지금까지 이룬 것은 분명 칭찬받을 일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다른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일 뿐이다.”

“인정해요. 하지만 그들이 최소 몇 년이 걸린 일을 전 겨우 일 년 만에 해냈어요. 조금만 지나면 그들을 추월할 수 있어요.”

“믿는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냉정하다. 그들은 미래가 아니라 당장 수익을 얻기를 원하는 족속들이다. 그들을 설득하려면 확실한 뭔가를 쥐어 줘야 한다.”

정인영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진혁의 조언이 있었다지만 그녀 역시 밤잠을 설쳐 가며 고민했다. 그리고 왕홍들을 만나기 위해 중국 대륙을 몇 바퀴나 도는 강행군으로 코피까지 쏟아야 했다.

그런데도 부족하다니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때 정진호가 갑자기 TV를 가리켰다.

“저길 봐라!”

TV에서는 아직도 라이나 왕비의 일정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는데,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잠깐 쉬는 시간이었다.

마르와가 재빨리 화장 가방을 들고 와 흐트러진 얼굴 화장을 고쳐 주는 장면이었다.

카메라 앵글이 당겨지며 화장품과 가방을 스치듯이 비추고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올라와 마르와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화장품을 잠깐 비췄다가 멀어졌다.

정진호가 물었다.

“뭐를 봤느냐?”

“아랍어로 되어 있어서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다.”

“둥근 그림에 별을 본 것 같아요.”

“맞다. 놈의 회사 로고다.”

정인영의 답변에 정진호가 크게 맞장구쳤다.

“대단한 놈이다. 저렇게 은근히 보여 줘서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고단수 수법이다. 홍보실장도 그 전략에 감탄하더라.”

“설마 거기까지 생각했겠습니까?”

“놈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너라면 아무런 이득이 없는데 외국 국빈 관광 가이드나 하려고 데려오겠냐?”

“……!”

“분명 저 제품은 히트를 칠 거다. 저게 알려지면 아마 난리가 나겠지.”

“그래도 일국의 왕비 신분인데 자신을 제품 홍보에 이용하는 걸 두고 보겠습니까?”

“바보 같은 놈.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도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사전에 이야기되지 않았다면 한국에 오지도 않았을 거고, 화장을 고치는 모습을 찍게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호영은 오늘 벌써 두 번이나 바보라는 핀잔을 들었다.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하지만 정진호의 시선은 이미 정인영에게 가 있었다.

“무조건 저 제품의 한국 내 유통은 네가 따내야 한다. 그러면 화장품 회사 독립은 내가 책임지고 이루어지게 해 주마.”

“알겠습니다. 꼭 받아내겠어요.”

정인영이 투지를 불태웠다.

그 모습에 정호영의 눈에서도 불이 튀어나왔다.

자신은 일 년 넘게 해외의 척박한 곳들을 돌아다닌 끝에 겨우 에너지 부사장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정인영은 한국에서 편하게 지내며 사내 하나 잘 만나 단번에 사장 자리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이건 무조건 막아야 한다.

정호영의 눈에는 이제 정인영이 동생으로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후계자 자리를 위협하는 정적일 뿐이었다.

* * *

그 시각, 라이나 여왕 일행은 올림픽공원 체조 경기장에 도착해 있었다.

동방천하 단독 콘서트 현장이었다.

국내 팬들은 물론 일본, 중국, 대만 등 이틀간 세계 각국의 2만 5000여 명의 팬들이 운집해 K-pop 주역 동방천하가 글로벌 스타임을 입증시켰다.

귀가 찢어질 듯한 함성 속에 첫 등장한 동방천하는 그들의 타이틀 곡 중 하나로 포문을 열었다.

그때 이미 디나 공주와 마르와는 야광봉을 들고 일어나 힘차게 흔들며 동방천하를 연호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라이나 왕비와 림 공주는 물론 진혁도 미소를 지었다.

그녀들을 위해 국정원에서 마련한 행사였다.

동방천하 두 멤버의 화려하고도 에너지 넘치는 무대에 결국 그들 일행도 일어나 어색하지만 함께 춤을 따라 하고 야광봉을 흔들며 그 시간을 즐겼다.

콘서트가 끝났을 때 디나 공주와 마르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건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꿈을 이룬 환희의 표현이었다.

다음 날은 무슬림 주방장이 만든 아침을 일찍 먹고 남이섬으로 향했다.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남이섬은 그 자체만으로도 환상이었다.

배를 타고 들어가자 황금색 카펫을 깔아 놓은 노란 은행잎이 그들을 반겼다.

사막만 보고 자란 림 공주와 디나 공주에게 한국의 단풍은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디나 공주는 한국 마니아답게 ‘겨울연가’의 촬영지임을 바로 알아보고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다.

주인공들이 걸었던 메타세콰이어 길을 들어서서는 왕비와 언니에게 드라마 줄거리를 이야기하느라 한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가져간 도시락을 까먹고 강변을 따라 뻗어 있는 자작나무 길과 갈대 숲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낭만과 추억을 만든 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라이나 여왕이 간 곳은 명동이었다.

경찰이 이미 나와 사전에 계획된 동선에 따라 인간 바리케이드를 쳤지만 매스컴을 보고 몰려드는 인파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다른 일정은 취소하고 화장품 매장에 들러 마르와가 추천하는 화장품들을 한 아름 구매하고 떠나야 했다.

진혁은 바로 호텔로 안내하지 않고 이태원으로 그녀들을 안내했다.

마침 기도 시간이라 모스크에 들러 기도를 한 일행은 우수단길을 걸어서 ‘알라딘과 떠나는 할랄 여행’에 도착했다.

5층으로 올라가자 왕비 일행을 위한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미리 도착해 점검한 주방장이 고개를 끄덕여 안전하다는 표현을 대신했다.

차려진 음식을 맛본 라이나 왕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 입맛에 딱 맞아요. 대단하네요. 가까운 곳에 이런 식당이 있는 줄 알았으면 주방장을 데리고 오지 않아도 됐겠어요.”

“만족하신다니 다행입니다. 아직은 할랄 식당이 이곳 한 곳뿐이라 부족한 게 많아 걱정했습니다.”

“여기가 미스터 서가 울라마를 돕기 위해 구입했다가 식당으로 개조한 곳인가 보군요.”

진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르와에게 향했다. 그런 사실을 알려 줄 이는 그녀밖에 없었다.

뻔히 자신이 쳐다보는 것을 알 텐데 마르와는 시선을 피하고 두 공주에게 이것저것 가져다주느라 바쁜 척했다.

그 모습에 라이나 왕비가 마음을 결정했다.

이제 자신의 생각을 밝힐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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