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어긋나는 인연
라이나 왕비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녀를 나무라지 마세요. 미스터 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내가 억지로 물어본 겁니다.”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이곳이 발전할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 매입했던 겁니다. 여러 가지로 운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마르와도 그렇게 이야기하더군요. 미스터 서는 항상 자신은 사업가고 이득을 위해서 움직이는 거라고 한다더군요. 그러면서도 무슬림을 위해 좋은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제가 그들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제 사업에 도움이 되니 같이 하는 겁니다. 칭찬은 거둬 주십시오.”
“그런 마음을 가진 사업가라는 게 중요한 겁니다. 기부를 진행하면서 한계에 부딪혀 회의감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우리는 왜 맨날 기부만 받아야 하는지, 우리가 더 어려운 사람에게 기부를 할 수는 없는지. 난 미스터 서를 보면서 그 답을 찾은 것 같아요.”
라이나가 속마음을 드러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심한 회의감이 들 때 나타난 게 진혁이었다.
그를 통해 무슬림 시장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내가 왜 왕실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스터 서의 제안을 받아들여 화장품에 우리 모녀의 이름을 사용하게 했는지 아세요? 설마 자카드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더 큰 뜻이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자카드는 기독교의 십일조와 유사한 이슬람교의 제도이다. 진혁은 화장품에서 얻은 수익의 2.5%를 라이나가 학대받는 아동을 위해 만든 ‘요르단 리버 재단’에 ‘자카드’ 명목으로 내놓기로 하고 그녀의 도움을 이끌어냈다.
“무슬림 여성에게 희망을 심어 주고 싶었어요. 억압받고 힘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하나하나가 뭉치면 아이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게 할 수 있다는 희망.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고 싶어요.”
“왕비께서 나선 일이니 반드시 이루어질 겁니다.”
“나도 노력할 겁니다. 하지만 이 일은 미스터 서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내가 그들을 움직이게 할 테니, 그것으로 수익을 창출해서 고통 받는 아이들에게 돌아가게 하는 일은 미스터 서가 해 줘야 합니다.”
“왕비님의 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어요. 그 마음 변치 말아 주세요.”
부딪히는 두 사람의 눈빛에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 방까지 안내하고 나온 진혁을 김상균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도 만나지 않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태후패션의 정인영 씨입니다. 만나 주실 거라며 말만 전해 달라고 해서요.”
“어디에 있습니까?”
“룸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습니다. 밖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요.”
진혁은 두말없이 정인영이 기다리는 룸으로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김상균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정인영이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정말 왔네.”
“그럼 친구가 부르는데 와야지요. 마침 술 생각이 나던 참이었어요.”
정인영이 바로 룸서비스로 술과 안주를 시키고 마주 앉았다.
“내가 이 일에 관여된 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텐데 용케 찾아왔네요.”
“태후에서 일하셨으니 우리 그룹의 정보력이 국정원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 아시잖아요?”
“맞네. 인영 씨 뒤에 태후가 있었죠.”
진혁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개인이 아니라 태후가의 후계자로 보는데 진혁만은 오직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언제나 편했다.
룸서비스가 도착하자 술부터 따랐다.
“정말 술이 마시고 싶었나 봐요?”
“그럼요. 왕비를 수행하고부터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어요.”
진혁은 스트레이트로 연거푸 잔을 비웠다.
인영의 눈빛이 강해졌다. 취하기 전에 해결할 일이 있었다.
“진혁 씨 덕분에 화장품 사업의 중국 진출은 성공적이었어요.”
“언뜻 인영 씨에 대한 기사를 본 것 같아요. 고생 많았어요.”
“진혁 씨가 도와준 덕분이에요.”
“그런 말 말아요. 나도 같은 사업을 하고 있어서 그게 생각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요. 인영 씨의 의지가 이룬 겁니다. 그러니 기자가 언급한 것처럼 자부심을 가져도 돼요.”
진혁은 진심으로 인영의 성공을 축하해 줬다.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
“진혁 씨가 라이나 왕비의 방한을 추진한 이유를 알아요.”
“……!”
“아버지가 알려 주셨어요. 그리고 화장품을 별도 회사로 독립시켜 주시겠다고도 하셨어요.”
인영은 솔직하게 정진호와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어설픈 거짓말로 넘어갈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진혁은 정진호의 날카로움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의 숨은 의도를 아는 사람은 자신과 왕비뿐이었다. 심지어 마르와나 카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색한 행동이 나올까 걱정해서였다.
그런데도 정진호는 정확히 자신의 의중을 짐작하고 정인영을 보낸 것이었다.
진혁이 물었다.
“나한테 어떤 걸 원합니까?”
“제 욕심 같아서는 회사를 넘겨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건 어렵겠죠?”
“불가능한 이야기네요.”
진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태후라면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제안이었다.
다시 한 번 정인영이 그들 집안사람이란 걸 깨닫게 됐는데 기분은 별로였다.
정인영도 그걸 먼저 언급하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시아 시장에서의 독점 판매권을 사고 싶어요.”
“……!”
“왕홍 마케팅으로 버티고 있지만 후발 업체다 보니 인지도가 약해요. 유럽 유명 화장품의 판매권도 이미 다른 업체하고 계약이 되어 있어서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우리 회사의 대표 상품으로 키울게요. 도와주세요.”
정인영의 표정이 절박해질수록 진혁의 표정은 반대로 차가워졌다.
“한 가지 물읍시다. 인영 씨의 목표는 뭡니까?”
“그거야 당연히 화장품 회사를 독립시키고 매출을 신장시켜 인정받는 거죠.”
“누구에게 인정받는단 말씀입니까?”
“가까이는 아버지고, 그다음은 집안 어르신들과 주주들에게요. 후계자 중 한 명이 아니라 당당한 사업가로 인정받고 싶어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세요?”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진혁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소비자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자신과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렇다고 실망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자신의 삶이 있듯이 그녀에게도 그녀의 삶이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태후가 유통을 맡아 준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자신은 아직 아시아 시장까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진혁이 마음을 정하자 이후의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인영은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 진혁의 조건을 대부분 수용해 줬다.
“그럼 다 된 건가요?”
“마지막으로 계약 기간 문제가 남았습니다. 독점 판매권 기간은 일 년으로 합시다.”
“그건 너무 짧아요.”
“인영 씨가 원하는 건 독점 판매권을 따냈다는 사실이지 않나요? 일 년 후에도 판매권은 유지됩니다. 인영 씨가 당장 아시아 전 지역을 커버할 수는 없잖아요? 나도 좀 더 팔 수 있는 상대를 알아보고, 인영 씨도 계약이 끝난 유명 업체와 새로운 판권 계약을 하기도 부담스럽지 않고요.”
“알았어요. 그런 이유라면 받아들일게요.”
인영이 수긍했다.
진혁의 말대로 지금은 독립 회사를 차리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계약 기간이 남아 있어서 그렇지, 시간을 두고 태후의 이름으로 접근한다면 유명 화장품 회사가 얼마든지 다음 판매권 계약은 넘겨줄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오늘 나눈 대화를 토대로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하고 업무 이야기는 마쳤다.
본격적으로 술자리를 하려던 인영은 진혁이 술병을 닫는 모습에 놀라 물었다.
“그만하시려고요?”
“내일 아침 일찍부터 일정이 있다는 걸 깜빡했어요. 지금 더 마시면 아침까지 술 냄새가 날 것 같아서요. 다음에 여유 있을 때 편하게 마십시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계약서가 작성 되는대로 연락드릴게요.”
“그래요. 다음에 봅시다.”
진혁은 룸을 나왔다.
인영의 실체를 깨닫는 순간 같이 술 마실 생각이 사라졌다. 그래서 아쉬움이 남았다.
희준에게 전화했더니 바이어 접대 중이라고 해서 어쩔 수없이 끊었다.
핸드폰을 들고 고민하던 진혁이 결국 전화를 걸었다.
“지민 씨, 접니다.”
-어쩐 일이세요?
“혹시 아직까지 이모 집 문이 열려 있을까요?”
-지금 9시니 아마 열어 놓고 계실 거예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찾아올지 모른다고 늦게까지 하시거든요. 지금 가시게요?
“그러려고 하는데 지민 씨도 올 수 있어요?”
-……전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려요.
“괜찮아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오세요.”
입이 쫙 벌어진 진혁이 얼른 핸드폰을 닫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에 온 걸 아는 듯 지민이 놀라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던 진혁이 행동을 멈췄다. 이대로 내려가면 기자들도 맞닥트릴 수도 있었다.
비상계단으로 내려와 지하 주차장으로 해서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 탔다.
“이모, 저 왔어요.”
“어머, 이게 누구야? 지민이 애인 아니야?”
빈 테이블에 앉아 졸고 있던 이모가 놀란 표정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너무 늦게 온 건 아니죠?”
“아직 들어가려면 멀었어.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혼자 왔어?”
“지민 씨도 온다고 했어요. 소주부터 주세요.”
“알았어. 얼른 준비해 올게.”
손님은 없었다. 그래서 이모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웃고 떠들었다.
지민이 늦게 도착했을 때는 벌써 빈 병이 세 개나 됐다.
“이모!”
“아이구,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나는 것 보니 우리 땍땍이가 오긴 왔나 보다.”
“중요한 일 하는 사람에게 술을 이렇게 먹이면 어떻게 해요.”
“내가 먹인 거 아니다? 니 애인이 알아서 먹은 거지.”
“애인 아니라니까요.”
“알았다, 알았어. 그럼 서방.”
혀를 빼쭉 내밀고 이모가 냉큼 주방으로 도망가자, 진혁은 차가운 냉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어나요.”
“아직 술이 남았는데…….”
“술 냄새 풍기면서 왕비님 모시려고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건 진혁 씨 생각이고요. 여자가 얼마나 예민한데요. 특히나 거긴 알코올도 금지라면서요.”
“…….”
“진혁 씨가 불러서 온 귀한 분이잖아요. 그런 분에게 한국에 대한 나쁜 인상을 가지고 돌아가게 하고 싶으세요?”
구구절절 틀린 말이 없었다.
결국 지민의 말대로 일어나야 했다.
“앞으로 나 없이 이모 집에 오는 거 절대 금지예요. 알았어요?”
“네.”
“쯔쯧. 고생길이 훤하네.”
고개를 푹 숙이고 따라 나가는 진혁의 뒤에서 이모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대학로로 무대를 옮긴 지민과 진혁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웃고 떠들며 돌아다녔다.
야간 거리 공연도 보고 술을 깨라며 뜨거운 오뎅 국물에 떡볶이도 사 먹었다.
술이 없는 게 아쉬웠지만 지민이 있어 그런 것쯤은 금방 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왕비님 모시고 한국 온 것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지민 씨도 회사에서 들었어요?”
“그냥 TV에서 얼굴 나온 거 보고 알았어요.”
“내 얼굴이 나왔다고요? 이 사람들이……. 난 절대 찍지 말라고 했는데. 가만 안 둘 거야.”
진혁이 씩씩거리는 모습에 지민이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멀리 있는 모습이 잠깐 스쳐지나갔지만 지민은 금방 그가 진혁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만큼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지만 그걸 표현만 안 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민이 화제를 돌렸다.
“언제 돌아가세요?”
“내일 오후에요. 오전에 경복궁을 구경하고 나면 끝이에요.”
“그럼 또 한동안 못 오시겠네요.”
“아마도 그럴 것 같아요.”
지민은 그 이후로 급격히 말이 줄어들었다. 만난 기쁨은 잠시였고, 또 기다리는 시간만 남았다니 마음이 무거웠다.
진혁이 그런 분위기를 느끼고 물었다.
“무슨 걱정 있어요?”
“아니요. 없어요.”
“에이, 아닌데? 말해 봐요.”
“…….”
“내일 떠나면 또 언제 올지 몰라요. 그러니 말해 봐요.”
재촉하는 진혁의 말에 지민이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