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92화 (92/307)

92화. 꼬이는 인연

“다음에요.”

“난 듣고 싶은데…….”

“내일 아침부터 중요한 일정이 있다면서요. 12시가 넘었어요.”

“어이쿠,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네. 다음에 꼭 들려주시는 겁니다.”

“예.”

“택시!”

빈 택시를 부르는 진혁의 모습을 바라보는 지민의 눈이 처연하게 변했다.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면 안 되었다.

* * *

다음 날 오후, 인천 공항에 마련된 회의실에서 라이나 왕비의 출국 기자회견이 열렸다.

한국 방문 소감을 묻는 질문에 좋은 이야기를 늘어놓던 라이나가 준비한 말을 꺼냈다.

“이런 한국의 멋진 모습을 친구들에게도 소개해 주고 싶어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네요. 우리가 유일하게 외식한 이태원의 레스토랑 같은 할랄 식당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럼 보다 많은 무슬림들이 한국을 찾아올 거라 확신합니다.”

이어 한국 화장품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정말 좋은 제품이 많다는 데 놀랐어요. 더 많은 제품을 사 가고 싶었지만 아랍어로 된 성분 표시가 없어서 포기한 게 너무 많아요. 할랄 인증 마크만 있어도 구매할 수 있을 텐데 아쉬웠어요. 그래도 조만간 할랄 인증 화장품이 한국에서도 판매된다니 기대가 커요.”

마지막으로 한 여성 기자가 몸매를 유지하는 비결을 물었다.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정말 특별한 건 없어요. 다만 할랄 식품만 먹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요. 할랄 음식은 도살 과정에서부터 유통까지 철저하게 관리가 이루어져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웰빙 음식입니다. 여성들의 다이어트에는 최고라고 단언할 수 있어요. 이태원에 있는 할랄 음식점에 한 번만이라도 가 보시면 제 말씀을 이해하실 거예요.”

조리 있게 핵심 단어를 넣어 자연스럽게 답변을 마친 라이나 왕비는, 마지막으로 기부와 교육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주기 바란다는 말로 한국의 일정을 마무리 지었다.

끈질기게 쫓아오는 기자들을 뿌리치고 탑승구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자 김상균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지겨운 인간들이네요.”

“서 사장님은 이제 끝이지만 우린 또 시달려야 합니다.”

“고생이 참 많으십니다.”

“그게 저희 일인데요, 뭘. 그나저나 얼굴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아침부터 두통이 좀 있어서요.”

“어제 룸에서 늦게까지 마셨습니까?”

“……!”

“걱정 마십시오. 직원들 입단속은 철저히 시켰습니다.”

김상균은 진혁이 정인영의 룸에서 계속 술을 마신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진혁이 변명을 하려다가 몰려오는 두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모습에 김상균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심하신 것 같은데 약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아닙니다. 비행기에 타고 한숨 자고 나면 낫겠지요. 아무튼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오시면 연락 한번 주십시오. 편하게 한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인사를 하고 걸어가던 진혁이 비행기 입구에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지난번 한국에 있을 때 느꼈던 찜찜한 느낌이 다시 느껴졌다.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홀가분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자꾸 중요한 걸 놓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밀려오는 두통이 더 이상의 생각을 방해했다.

* * *

요르단으로 향하는 그 시각, 카이로의 알라딘 컴퍼니에서는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건 두바이의 쑤피넷도 마찬가지였다.

라이나 왕비는 매일 일기를 쓰듯 한국의 일정에 대해 유튜브와 트위터에 올렸다.

여기에는 한국의 방송과 달리 알라딘 화장품도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더불어 주방장이 요리하는 음식의 재료 중 통조림에도 알라딘의 상표가 보였다.

알쇼핑 사이트에는 이미 라이나, 림, 디나란 브랜드로 각종 화장품 세트들이 올라와 있었다.

아울러 통조림도 라이나라는 이름으로 제품이 판매되고 있었는데, 매일 주문 기록을 갱신할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난번 같은 혼란은 없었다.

이미 충분히 생산된 제품이 각지에 보관되어 있었고, 지금도 생산 중이거나 이동 중에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예상대로만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홍보용으로 올려놓은 ‘히잡 세탁기’와 ‘스태빌라이저 TV’가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심심치 않게 주문이 들어오고 있었다.

뒤늦게 카이로에 도착한 진혁이 급히 윤기성에게 연락해 제품을 수급하느라 때 늦은 난리를 피워야 했다.

그래도 제일 큰 시장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아우다 그룹에서 맡아 주고 있는 게 큰 힘이 됐다.

직원 모두가 계획한 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상황을 대처해 나가자 주문이 폭발적으로 느는데도 배송에는 지장이 없었다.

겨우 한숨을 돌리나 싶었을 때 진혁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급히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강릉종합병원으로 가자 부모님은 물론 친척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이었다.

“어서 들어가 봐라. 널 계속 찾으셨다.”

눈이 벌게진 아버지의 말씀에 안으로 들어가자 병상의 할아버지가 힘겹게 숨을 유지하고 계셨다.

“저 왔어요, 할아버지.”

다가선 진혁의 모습에 할아버지는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는지 입술을 들썩이는 모습에 진혁이 귀를 가져다 댔다.

“나 때문에 먼 길까지 돌아와 고생했다. 여한은 없으니 내 걱정은 잊고 지금부터는 네 인생을 찾아라…….”

“할아버지!”

삐이.

기계의 날카로운 음이 심장이 멈췄음을 알렸다.

“아이고, 우리 오빠……. 진혁이 보려고 지금까지 기다리셨나 봐. 볼 사람 다 보고 원 없이 살다 가셔서 그런지 웃으면서 가셨네. 흐흐흑.”

고모의 울음을 시작으로 가족들 모두 눈물을 흘렸다.

함께 눈물을 흘리는 진혁도 할아버지 입가에 걸린 미소에 내내 가슴을 짓누르던 바위 하나가 치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병원에 있는 장례식장을 이용했다.

아침부터 문상객들이 찾아왔지만 대부분 지역분들이고 숫자가 적어 상대적으로 한가했다.

그러자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이야기의 주제 대부분이 이번에 벌어지는 선거였다.

야권이 분열되어 여당 후보가 일방적으로 앞서 있는 상황이었다.

강원도는 영호남으로 갈라진 지역감정이 없는 곳이라 여야의 찬반양론으로 더 뜨거웠다.

무심코 이야기를 듣던 진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한동안 잠잠하던 두통이 다시 밀려왔다.

진혁은 이전 삶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어두워지자 본격적으로 문상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김선혁 전무와 이사가 된 손민한이 태후물산을 대표해서 와 주었고, 유닉스의 송승용 사장도 들렀다.

희준이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와 진혁을 대신해서 회사 사람들을 챙겨 주느라 바빴다.

김상조 이사와 권기남 공장장 등 동성F&B 식구들도 소식을 듣고 찾아와 줬다.

어떻게 알았는지 국정원의 김상균 과장도 찾아왔는데, 워낙 바빠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

고마운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김지민이었다.

휴가까지 받고 내려와 상심한 어머니의 곁을 딸처럼 지키는 한편, 아줌마들과 문상객들이 불편하지 않게 세심하게 신경 썼다.

거의 잠을 자지 못해 까칠해진 얼굴에 진혁의 마음이 아팠다.

“아줌마들에게 맡기고 좀 쉬어요.”

“전 괜찮아요. 진혁 씨도 좀 쉬어야 하는데…….”

지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단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모습에 진혁이 얼른 분향소로 가서 의복을 점검했다.

한지철이 정인영을 보필해 들어왔는데, 낯이 익은 패션 직원들도 함께 와 주었다.

조문을 마치고 정인영을 안내해 테이블에 앉았다.

“멀리까지 와 줘서 고마워요.”

“당연히 와야죠, 진혁 씨 일인데. 그것보다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요? 그럼 저쪽으로 가요.”

진혁과 정인영이 일어나 구석의 빈 테이블로 가는 사이 김지민이 아줌마와 함께 얼른 식사를 내왔다. 어느새 희준도 달려와 직원들을 챙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한지철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둘이 되자마자 정인영이 물었다.

“언제 돌아가세요?”

“장례식이 끝나면 바로 가 봐야지요. 급한 불은 껐지만 아직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요.”

“라이나 왕비로 인해 중동에서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아버지의 칭찬이 자자하세요.”

“그 정도는 아니고. 인영 씨는 중국에서 더 많은 매출을 올릴 겁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요.”

진혁이 분양소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인사나 하자고 여기 온 것은 아닌 것 같고, 무슨 일입니까?”

“라이나 왕비의 영향은 중동만 미친 게 아니에요. 한국에서도 지금 그분이 사용하신 제품의 문의가 쇄도하고 있어요.”

“그건 들었습니다. 지금쯤 컨테이너에 실려 오는 중으로 아는데요.”

“화장품 이야기가 아니라 할랄 통조림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통조림요?”

진혁은 중동의 일로 바빠 정신없어 몰랐지만 라이나 왕비가 돌아가고 한국 일부 여자 연예인들이 콩 통조림으로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블로그를 통해 알았다.

‘라이나 다이어트’라고 명명된 요리 비법까지 자세하게 알리기도 했다.

그다음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는 중동에서 경험했기에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제야 김상조 이사가 떠나면서 자꾸 머뭇거리던 이유가 짐작됐다. 이 일을 보고하고 상의하고 싶었지만 상주라 참은 모양이었다.

정인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통조림도 우리가 판매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너무 욕심이 많은 거 아닙니까?”

“사업가는 멈추면 안 된다고 배웠어요. 아시겠지만 태후는 거대 기업이에요. 어느 것 하나 우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확답을 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현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요.”

“이해해요. 대신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세요.”

“그럽시다.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가 볼게요. 떠나기 전에 서울에서 봐요.”

여러 사람이 들어와 한꺼번에 분향소로 가는 모습에 진혁이 얼른 달려갔다.

인영도 한지철을 불러 사정 이야기를 하고 먼저 장례식장을 떠났다.

12시가 넘어가자 찾아오는 문상객들이 없어 진혁도 술자리에 참석했다.

한지철이 아직도 가지 않고 희준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얼굴이 좋지 않았다.

“회사에 무슨 일 있으세요?”

“특별한 것은 없어. 위에서는 끊임없이 실적을 올리라고 하고 있지만 그건 늘 듣는 이야기고.”

“그럼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별로예요.”

“담배나 한 대씩 피우자.”

한지철이 먼저 일어나길래 따라가자 희준도 쪼르르 달려왔다.

밖으로 나와 담뱃불을 붙인 한지철이 허공에 담배 연기를 날리고 입을 열었다.

“진혁아.”

“예, 선배.”

“아무리 후배여도 성인이고 사적인 부분을 참견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번에는 한마디 해야겠다.”

“말씀하십시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듯 희준도 짝다리를 하고 있다가 바로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마. 정 부문장님이랑 어떤 사이냐?”

“선배도 알듯이 스페이스 워커의 인연이 화장품 사업까지 이어져 가끔 만나 사업 이야기 나누고 그래요.”

“회장님도 아신다면서?”

“선배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윗자리로 갈수록 오너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 쓸 수밖에 없어. 여기저기서 너에 대해 물어오고 있다. 전자가 공장 건설지를 이집트로 정한 것도 너 때문이라고 하던데.”

“에이, 그건 아니죠. 그분이 어떤 분인데 제 말만 듣고 그걸 결정해요. 전 단순히 소개만 해 줬을 뿐이에요.”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네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중요해. 회장님이 아무나 만나서 의견을 듣는 사람도 아니고. 그 중간에 부문장님이 있잖아. 그런 관계에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어.”

진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이 없자 한지철이 다시 물었다.

“얼마 전에 호텔 방에서 만났다면서?”

“그것도 아세요?”

“라이나 왕비 때문에 기자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있던 상황이었어. 눈이 한두 개가 아닌데 그런 경솔한 행동을 하면 어쩌란 거냐?”

“그런 상황이 아니었어요. 화장품 판권 문제로 상의하러 왔던 건데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진실을 밝히려는 기자들도 있지만 자극적인 기사로 한탕 하려는 놈들이 더 많아. 정 부문장님의 일이라면 충분히 안주거리가 되고도 남아. 홍보실에서 기사 막느라 힘들었다고 하더라.”

“제가 경솔했던 것 같습니다.”

진혁이 솔직히 인정했다.

한지철의 말이 맞았다.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만남이었다.

하지만 한지철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이러는 것은 정 부문장님 때문이 아니다. 지민이 때문이지.”

“……?”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진혁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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