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93화 (93/307)

93화. 뛰어 봤자 벼룩

“총판이나 대리점 관리는 지민이 담당 업무가 아니야. 휴일까지 반납하고 매주 강릉에 간 것이나, 이번에 휴가를 내고 내려와 너희 집안일을 돕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니?”

“……!”

“착한 아이다. 결정은 네가 하겠지만 나중에 상처가 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한지철의 말이 끝나자 희준이 바로 근질거리던 입의 족쇄를 풀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놈이 양다리 걸치고 있다는 말이에요?”

“당사자가 아니라잖아.”

“저놈이 까불지만 숙맥이라 여자 마음을 전혀 몰라요. 개소식 때도 그렇고 여기도 둘 다 오는 걸 보니까 난 척 알겠던데. 바보.”

“그래. 나 바보다. 난 그냥 사업 이야기 하고 부모님께 잘해서 고맙고 편해서 그런 건데.”

진혁의 핑계가 오히려 희준을 화나게 했다.

“으이그, 등신아. 그건 네 맘이고. 상대는 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안 하냐? 사업은 천 리 앞을 보면서 왜 여자 맘은 한 치 앞을 못 보냐?”

“그만해라. 고민스럽다.”

“고민은 무슨, 당연히 태후지. 그럼 넌 바로 인생 펴는 거야, 인마. 아이고, 복도 많은 놈.”

희준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진혁은 물론 한지철도 아무런 말을 안 했다.

* * *

다음 날, 일어난 진혁이 계속되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을 때 지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머리 아프세요?”

“쓸데없는 정치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어제 늦게까지 너무 마셔서 그럴 거예요. 오 대리님은 뭔 술을 그렇게 권하는지. 미워 죽겠어요.”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와 한지철은 얼마 후 떠났고, 희준은 진혁을 붙잡고 정인영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바람에 새벽까지 술을 마셔야 했다.

그 여파로 희준은 어디서 자는지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저녁때는 또 바빠질 테니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세요.”

“전 괜찮아요. 지민 씨가 좀 쉬어야죠.”

피곤하지만 아버지가 주무시고 계셨다. 할아버지를 모시겠다는 생각으로 강원도로 올 정도로 효심이 깊은 분이라 상심이 큰 모양이었는지 술을 많이 드셨다.

문상객들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자신까지 잘 수는 없었다.

“저는 아줌마들이 계셔서 중간 중간 쉬었더니 괜찮아요.”

“아무튼 고생이 많아요. 서울에서 맛있는 거 많이 사 줄게요.”

“피……. 또 바로 이집트 바로 가실 거면서.”

“서울에서 처리할 일이 있어서 좀 머물 것 같아요. 지민 씨랑 밥 먹을 시간은 있어요. 단, 이번에는 이모네 집 말고요.”

“좋아요. 이모가 진혁 씨랑 넘 가까워지는 것 같아 좀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어요.”

“그건 아니지요. 이모님 솜씨가 얼마나 좋은데요. 암튼 이번에는 근사한 데 가서 먹읍시다.”

“제가 근사한 데 아는 곳이 있어요. 우리 거기 가요.”

“어딘데요? 지난번 같을지 모르니까 이번에는 먼저 확인하지 않으면 안 갈 겁니다.”

“치, 진혁 씨도 아는 곳이에요. 할랄 여행.”

“엥? 왜 하필 거길?”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이었다.

“무슨 반응이 그래요. 그렇게 자신 없는데 왕비님을 모시고 간 거예요?”

“그건 아니죠. 내가 아는 무슬림 최고의 식당입니다.”

“그럼 됐네요. 왕비님이 거기서 식사하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어요. 나중에 꼭 가 보고 싶었어요.”

“그럽시다. 내가 최고로 모시지요. 왕비님보다 더 멋지게.”

진혁의 호언장담에 지민이 고양이 눈을 좁히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언제 봐도 환상적인 눈매였다.

* * *

장례는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안치했다.

나중에 통일이 되거나 고향에 갈 수 있다면 그때 그곳에 뿌려지길 원하셨다.

장례를 무사히 마치고도 아버지는 기운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틀간 곁에 함께 있어 드리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처리할 일들이 있었다.

을지로의 동성F&B로 갔다.

김상조는 물론 박이동도 같이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각했다.

들어서는 진혁의 모습에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반겼다.

“장례는 잘 끝났습니까?”

“많은 분들이 와 주셔서 잘 마무리했습니다. 가시는데 인사도 못 드리고 죄송했습니다.”

“아닙니다. 끝까지 남아서 도와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자리에 앉은 진혁이 말했다.

“한국에서도 우리 통조림에 대한 문의가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한국 내 판매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때가 된 것 같아서요.”

“그보다 먼저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문제라니요?”

“우리 제품이 현재 판매되고 있습니다.”

“역수출되어 들어오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사장님이 초창기에 의뢰한 두리식품에서 임의로 내다 팔고 있습니다. 이게 그 제품입니다.”

김상조가 밑에 내려져 있던 통조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는데 딱 두리식품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진혁이 당장 화를 냈다.

“그 양반이 미쳤나? 이건 내 허락 없인 판매할 수 없습니다.”

“압니다. 그래서 전화로 항의하고 당장 판매를 중단하라고 했더니, 오히려 사장님이 일방적으로 거래를 중단해 손실을 봤다며 배 째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째 줘야지요.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그게 좀 쉽지 않습니다.”

“이건 명백한 계약 위반입니다.”

“그건 맞습니다만, 두리식품이나 진갑석 사장 재산이 한 푼도 없습니다. 승소를 해도 피해 보상을 받을 방법이 없답니다. 변호사들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한결같이 그냥 돈 몇 푼 쥐여 주고 끝내는 게 좋다고 합니다.”

박이동이 들려준 이야기는 세상에 참 나쁜 사람 많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두리식품은 부채가 자산보다 많은 데다 급여도 제때 지급 못 할 정도로 경영 상태가 최악이라고 했다.

진갑석 역시 자신 앞으로 된 재산은 한 푼도 없고, 살고 있는 아파트는 물론 타고 다니는 외제차도 회사 명의로 빌린 거라고 했다.

“참 어처구니가 없네요. 그 인간은 그럼 공장에서 번 돈을 다 어디에 썼답니까? 가족은요.”

“부인과 아들 내외는 모두 미국으로 이민 가고 한국에는 혼자 남았답니다. 그것 때문에 회사 경비로 분기에 한 번씩은 미국에 다녀온답니다.”

“미친…….”

“재산을 모두 미국으로 빼돌렸답니다. 그래서 뻔히 문제가 될 줄 알면서도 배 째라고 유통시키는 것 같습니다.”

잊고 있던 두통이 밀려왔다.

최악의 상대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알라딘 통조림의 한국 판매는 불가능했다.

관자놀이를 누르던 진혁이 갑자기 손을 뗐다.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갔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여기 주소가 LA로 되어 있습니다.”

박이동이 내민 서류를 받고 확인한 진혁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베이커 씨, 서진혁입니다.”

-아, 미스터 서. 오랜만입니다. 사업이 잘되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피해 미군을 대신해 일본전력과의 소송으로 막대한 합의금을 받아낸 폴스데이 로펌의 수석 변호사 베이커였다.

진혁의 이야기를 들은 베이커가 말했다.

-악질이군요.

“그렇습니다. 한국에는 재산이 한 푼도 없습니다. 가족이 LA로 이민 갔다는데 그쪽을 좀 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인적 사항과 주소를 보내 주십시오. 바로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말씀은 오히려 제가 드려야지요. 탈탈 털어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핸드폰을 닫고 진혁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일단 미국에서 조사해 준다고 합니다만 우리도 우리대로 알아봐야 합니다.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방법을 알아내세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힘차게 이야기를 하고 나가자 진혁이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카심에게 계약서 원본을 가지고 한국으로 건너오라고 했다.

아무래도 해결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 * *

베이커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전화를 해 왔다.

“알아보셨습니까?”

-일이 의외로 쉽게 풀릴 것 같습니다.

“그래요?”

-가족들이 이민을 온 건 맞지만 투자 이민이었습니다. EB-5 프로그램에 따라 100만 달러를 투자해 두리식품 지사를 세워 매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장사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한국에서 계약 위반 판결만 받아내면 피해 소송은 미국에서 진행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아직 임시 영주권 상태라, 투자한 금액이 불법적으로 조성된 금액이라는 게 밝혀지면 바로 이민 신청이 거부되고 즉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굉장히 유리한 조건입니다.

뛰어 봤자 벼룩만도 못한 자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에서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기 전이시면 소개해 줄 사람이 있습니다. 제 밑에 있다가 한국의 로펌으로 들어간 친구인데 능력이 있습니다.

“그럼 염치없지만 그것도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미스터 서의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그럼 그쪽에서 연락하라고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기분이 좋아진 진혁은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동성F&B로 갔다.

김상조와 박이동을 불러 베이커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크게 기뻐했다.

이어 도착한 변호사가 이미 이야기를 듣고 와서 바로 유통 금지 가처분과 제조 판매 금지 신청을 내기로 했다.

워낙 사안이 명확해 2주 이내로 심문 기일이 정해지면 그때 바로 결정을 받아낼 수 있다고 자신하며 나갔다.

한시름 놓은 진혁이 김상조를 바라봤다.

“소송 문제는 변호사에게 맡기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합시다. 제일 먼저 현재 시중에 풀려 있는 통조림을 전량 수거해 주세요.”

“돈이 꽤 많이 들 겁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자금은 충분하니.”

이집트 SEZ의 공장은 동성F&B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그동안 공장 증설에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지만 그걸 충분히 커버하고 남을 정도로 매출이 발생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통조림 판매에 관한 문제인데, 문의해 온 업체가 어디 어디입니까?”

“문의 안 한 업체를 물으시는 게 나을 정도입니다. 대기업을 포함해서 우리나라에 매장을 가진 곳들은 모두 저희 제품을 납품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음……. 그럼 최대한 수용하는 것으로 하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창고와 배송 망도 갖추셔야 할 겁니다. 이 문제는 박 선생님이 도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제가 적당한 곳을 물색해 보겠습니다.”

박이동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정식 직원이 아닌 애매한 위치라 이 자리에 있는 게 어색했던 상황이었다.

두 사람이 각자 맡겨진 업무를 하기 위해 나가자 진혁이 이집트로 전화를 걸었다.

갈리 사장에게 한국의 사정을 들려주고 자신이 없는 동안 이집트 사업을 잘 관리해 달라고 당부했다.

“현재 동성F&B 공장 자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잠시만요……. 2억 달러가 조금 넘습니다.

“1억 5천만 달러를 한국 본사 계좌로 보내 주십시오. 한국의 사업이 커질 것 같습니다.”

-당분간은 특별한 투자 계획이 없으니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고생하십시오.”

전화를 끊은 진혁은 밀린 결재를 했다.

카심이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도착했는데 얼굴이 핼쑥했다.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설마 지하철을 잘못 타신 겁니까?”

“이 사람이 날 뭐로 보고.”

카심이 그렇지 않아도 구겨진 얼굴을 더 심하게 구겼다.

그는 원래 점심때쯤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비행기를 놓쳤어요.”

“그러게 좀 넉넉하게 나오시지. 쯔쯧.”

“넉넉하게 나와 택시 탔거든요. 근데 그 빌어먹을 시위대와 맞닥뜨려 꼼짝을 안 하는데 답이 없었어요. 결국 다른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늦었어요.”

“결국 파라오 헌법을 국민 투표에 붙이기로 했나 보군요.”

진혁도 이집트의 사정은 알고 있었다.

하페즈 대통령은 무슬림 형제단을 제외한 모든 국내외 여론이 반대하는데도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파라오 헌법’의 국민 투표를 강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반하페즈 세력의 연합인 ‘구국 전선’의 주도로 반대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EU마저 우려를 나타내며 지원하기로 한 경제 지원을 취소할 수 있다고 압박하는데도 하페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경제는 더 피폐해져 서민들은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까지 내몰리고 있어 다시 반정부 시위에 나서고 있었다.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서 나라를 말아먹게 생겼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제대로 뽑았어야 하는데…….”

“헉!”

무심코 듣고 있던 진혁이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키자 카심이 놀라 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뭘요?”

“대통령이 어쩌고 하는 것 말입니다.”

“대통령을 잘 뽑았어야 했다고 한 것뿐인데요.”

“이런 바보 같은 놈.”

진혁은 그동안 안개 낀 듯 희미했던 머리가 일순간에 맑아 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갑자기 쏟아지는 아픈 기억들.

광화문 광장을 환하게 밝혔던 수많은 촛불행렬.

진혁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막아야 해!”

“뭘 막아요. 어디 아파요?”

“전 좀 나가 보겠습니다. 김상조 이사가 진행 상황을 알려 줄 겁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심을 놔두고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