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매듭짓기
양재동역 인근의 식당에서 김상균을 만났다.
“먼저 연락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장례식에 와 주신 감사 인사를 드리고 부탁할 일도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큰일 치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뭐든 말씀하시면 힘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권성일 후보 캠프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측근 중에서요.”
“이현국 보좌관님이 권 후보님하고 제일 가까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분을 좀 만나게 해 주십시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모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진혁이 일부러 시나이 반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언급했다.
정부 여당을 지원해야 할 국정원 직원이 야당 캠프 관계자를 만나게 해 준 게 알려지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예상대로 김상균이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진혁은 기다렸다.
한참 만에 김상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움을 받았으니 보답은 해야지요.”
“고맙습니다.”
“그 말씀은 안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전 그냥 라이나 왕비 방한 때 저쪽에 요청한 소개를 지금 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이럴 거면 그때 좀 만나시지 그랬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나중에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도 일단 만나기는 해 봐야겠습니다.”
실없는 농담으로 용건을 마무리하고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김상균과 헤어져 호텔로 돌아왔다.
그날 진혁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 * *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김상조가 활짝 핀 얼굴로 득달같이 달려왔다.
이집트 공장으로부터 입금된 사실을 보고했다.
자금난으로 회사가 부도나는 광경을 지켜보며 마음고생이 심했던 그였다. 자금이 넉넉해지자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기쁜 것은 당연했다.
“이집트 공장 사람들이 힘들게 일해서 모아 보내온 돈입니다. 그러니 소중하게 써서 꼭 보답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몇 배로 갚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른 볼일이 없으면 나가 보세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왕비님이 다녀가신 이후로 ‘할랄 여행’이 유명해지자 분점을 내 달라는 문의가 심심치 않게 들어오고 있는데, 앞으로 더 늘어 갈 것 같습니다. 미리 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는 반응이 빠르군요.”
“베이비부머 은퇴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라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요식업이 접근하기 쉽다고 생각하거든요.”
“쉽게 보다가 한 번에 퇴직금 날리고 노숙자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저금리로 마땅히 투자할 곳도 없습니다.”
“상황이 그렇다면 사업 확장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우선 프랜차이즈 쪽 전문가를 알아봐 주십시오.”
“프랜차이즈로 진행하시려고요?”
되묻는 김상조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현재 프랜차이즈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한때 은퇴한 베이비부머의 성공 보증 수표로 불리며, 자고 나면 새로운 브랜드와 가맹점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대기업마저 시장에 뛰어들자 정부에서 ‘골목상권보호법(SSM 규제법)’라는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법까지 만들어 규제할 정도였다.
하지만 프랜차이즈 본사의 무분별한 가맹점 늘리기가 결국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빠트렸다.
과당 경쟁으로 고정 수입은 고사하고 유지비를 감당하기도 어려운 가맹점주가 늘고, 폐업과 부도로 자살하는 가맹점주가 생겨나자 이제 부도 수표로 불리며 세간의 눈총의 대상이 된 게 프랜차이즈 사업의 현실이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압니다. 프랜차이즈 본사의 도덕적 해이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입니다. 우린 그들과 다를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준비 단계부터 철저히 하려고 전문가를 영입하는 겁니다.”
“사장님을 믿습니다. 우리와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아내겠습니다.”
김상조가 나가자 진혁은 초조한 마음으로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 * *
이현국과의 만남은 국회의사당 인근의 여의도 컨싱턴 호텔 커피숍에서 이루어졌다.
“서진혁입니다. 바쁘신데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과장님이 부탁해서 나오긴 했는데 솔직히 기분은 별로입니다. 필요할 때만 찾아오는 분들이 많거든요.”
이현국은 직설적인 성격인 듯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라이나 왕비가 왔을 때 면담 요청을 거절당한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어떤 사정인지 충분히 짐작하실 겁니다. 면담을 거절한 건 죄송하지만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으니 마음 푸십시오.”
“일단 알겠으니 용건만 간단히 합시다.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혹시 야권 후보 단일화와 관련된 일이십니까?”
“헉. 그걸 당신이 어떻게……?”
얼마나 놀랐는지 이현국은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선거 캠프 관계자도 모르는 극비 회동이었다.
진혁이 가지고 온 봉투를 내밀었다.
“후보님께 전해 주십시오.”
“이게 뭡니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의 미래가 걱정이 되어 준비했습니다. 꼭 후보님께 전달되어야만 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
“돈 벌려고 사업하다 보니 처음에는 돈만 쫓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욕심 때문에 더 큰 걸 놓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내려놨더니 오히려 사업이 더 크게 커지며 돈은 저절로 따라오더군요.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진혁은 아직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이현국에게 인사를 하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선택은 권성일 후보의 몫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진혁은 낯선 전화에 잠을 깼다.
다짜고짜 욕부터 하는데 두리식품 사장 진갑석이었다. 법원 출두 명령서를 이제 본 모양이었다.
-무릎 꿇고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소장부터 접수해? 그래. 얼마나 가져갈 수 있는지 보자.
“하실 말씀 있으면 법원에서 하세요.”
-흥. 내가 거길 왜 가. 잘 먹고 잘살아라. 대신 그동안 내가 네 제품은 확실히 망가트려 주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진갑석은 말대로 만들어 놓은 통조림을 헐값에 전부 처분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걸 수거하는 김상조 이사가 바빠졌지만 진혁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손해배상으로 받아낼 금액이 늘어나고 있었다.
* * *
진혁이 오랜만에 이모 집에 들어섰다.
“저 왔어요, 이모.”
“어머, 이게 누구야. 지민이 애…….”
호들갑을 떨며 반갑게 맞던 이모가 말끝을 흐렸다.
뒤따라 들어온 정인영 때문이었다.
훤칠한 키에 빼어난 이목구비, 잘 차려입은 고급스러운 옷은 이런 허름한 식당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정인영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진혁이 전화해 만나자고 하자 잔뜩 기대하고 한껏 멋을 부리고 왔는데 이런 불결한 곳에 데려올지는 몰랐다.
“앉아요, 천장 안 무너지니까.”
털썩 주저앉는 진혁과 달리 인영은 조심스럽게 엉덩이 끝만 걸쳤다. 혹여라도 옷에 뭐라도 묻을까 걱정됐다.
나온 음식은 더 당황스러웠다.
세월의 때가 묻은 그릇은 여기저기 이빨이 빠져 있었다.
누가 먹었을지 모르는 스테인리스 밥그릇과 국그릇은 제대로 씻겼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런데도 진혁은 잘도 먹었다. 한공기로 부족해 더 시켜 두 공기를 다 비웠다.
인영은 겨우 몇 젓가락 깔짝거린 게 전부였다.
“왜요? 맛이 없어요?”
“아니요.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라서요. 다음에는 제가 살게요.”
“그럽시다. 나가죠.”
나가는 두 사람을 이모가 뒤에서 심각하게 쳐다봤다.
밖으로 나온 진혁이 근처에 있는 실내 포장마차로 들어가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인영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
진혁이 근처의 깨끗한 커피숍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다. 주문한 커피를 가져다 내려놓고 앉으며 물었다.
“오늘 당황스러웠죠?”
“처음 가 보는 곳이라 어색했어요.”
“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맘 편히 먹을 수 있는 허름한 식당이 좋고, 웃고 떠들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은 포장마차가 더 익숙합니다.”
가볍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느낌에 인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난 인영 씨가 좋습니다. 아무 부족한 것 없이 자라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개망나니들과 달리 인영 씨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추진력도 있고, 나만큼 치열하게 성공을 향해서 달려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
“난 독자입니다. 결혼하면 부모님도 모셔야 합니다. 사업을 계속 키우고 싶은 욕심도 많습니다. 치열하게 살았고 치열하게 살 것이기에 집에서만이라도 다 잊고 편하게 쉬고 싶은 평범한 대한민국의 청년이기도 합니다.”
진혁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를 정도로 인영이 멍청하진 않았다.
“함께 산다는 것은 단순히 어느 한부분의 생각이 같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삶 전체를 공유해야 하는데, 우리 둘이 그게 가능할까요?”
“제가 맞출게요. 아니, 맞출 수 있어요.”
“인영 씨가 그렇게 맘먹는다면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싫어요. 인영 씨가 나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의 열정이 넘쳐난다는 걸 압니다. 나 때문에 그걸 포기하고 지내는 인영 씨를 바라보면 내 맘이 편하겠습니까?”
“…….”
“우린 지금까지 잘 지내 왔잖습니까? 그리고 비록 시장은 다르지만 최고가 되겠다는 같은 꿈을 꾸고 있잖아요. 서로 상의하고 때론 도와가면서. 함께해야 한다는 욕심으로 그걸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인영은 입술을 깨무는 것도 모자라 테이블 아래의 손을 피가 나도록 쥐었다.
여자의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당하는 치욕이었다.
하지만 그걸 표출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아니, 틀리다고 해도 지금은 그의 사업가적인 능력이 필요했다.
겨우 상처 받은 자존심이나 치유받자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진혁을 잃을 수는 없었다.
“무슨 말씀인 줄 알겠어요.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달라질 것 없습니다. 같이 만나서 사업 이야기 하고, 힘들 때 서로 의지하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돕고. 그렇게 친구처럼 지내면 되죠. 사업 친구.”
“사업 친구라. 급조한 말치고는 나쁘지 않네요.”
“제가 또 한 작명 센스 하지 않습니까.”
진혁의 실없는 농담에 억지로 웃는 인영의 미소가 슬펐다. 머릿속으로는 인정했지만 가슴까지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진혁도 그걸 느꼈다.
“한 가지 미안한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알라딘 통조림에 문제가 좀 있습니다. 곧 해결이 될 겁니다만…… 직접 유통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원하는 것이 많아서요.”
“사업 친구라고 하더니 바로 말을 바꾸네요.”
“대신 다른 선물을 드리지요. 친구 된 기념으로.”
인영이 눈을 반짝였다.
감정은 감정이고 사업은 사업이었다. 진혁이 이렇게 이야기할 정도라면 큰 건이었다.
“중국 쪽 신장세가 정체돼서 고민이라고 했죠?”
“맞아요. 기존 업체들의 견제에 경쟁까지 치열해요. 왕홍 마케팅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알라딘 화장품의 독점판매권을 달라고 했던 거예요.”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중동이라면 모를까, 중국은 라이나 왕비의 영향력이 생각보다는 크지 않는 곳입니다.”
“알아요.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가끔 인영 씨가 바보 같을 때가 있다는 거 아세요?”
“뭐요?”
인영이 발끈했다.
면전에 대놓고 바보라는데 화를 안 낼 사람은 없었다.
“꼭 따라한 건 아니지만 내가 중동에서 슈퍼 트위터 마케팅을 하자 인영 씨는 중국에서 왕홍 마케팅을 했어요. 그리고 나는 그게 정체되자 중동 시장에 영향력이 있는 라이나 왕비를 직접 한국으로 초청했죠. 그 뒤 알라딘 화장품의 우수성을 간접적으로 홍보해서 지금 대박을 터트리고 있어요.”
“아!”
“그들을 직접 한국에 초청해 체험 행사를 열 수만 있다면 지금의 한계는 뛰어넘을 겁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 멍충이. 바보.”
인영이 진짜로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진혁이 웃었다.
“인영 씨는 그게 매력이에요. 남의 말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 그리고 이렇게 사업 이야기하며 함께 공유하는 시간. 난 이 시간이 좋아요.”
“제게도 소중한 시간이에요. 이제 욕심 안 부릴게요. 그러니까 내가 잘못 가고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이렇게 질책해 주세요.”
“그렇다면 한마디 더 해야겠네요.”
“또 욕하려고요?”
“아니요. 그냥 충고.”
인영이 눈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진혁의 이어지는 말이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