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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95화 (95/307)

95화. 고백하기

“말해 보세요.”

“이왕 초청할 거면 최대의 효과를 누려야 합니다. 화장품 홍보가 목적이긴 했지만 통조림과 할랄 식당도 함께 알려져 예기치 못한 부가 효과를 보고 있어요.”

“그럼 나는 어떤 걸 홍보하는 게 좋을까요?”

“거기까지는 내가 조언하긴 힘들어요. 인영 씨가 움직일 수 있는 상품이 어떤 건지 모르니까요.”

“알았어요. 그건 제가 고민해 볼게요.”

“마지막으로 제품 홍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

“한국을 알리는 거요.”

“알았어요.”

마지막 대답은 성의가 없어 보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제품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진혁은 그런 그녀에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사람은 각자 생각이 다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고 자신은 자신이었다.

자신과 다르다고 남을 억지로 설득시키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인지 충분히 알고 있을 만큼 세상을 살아 봤다.

상처 입은 자존심에 대한 생각은 인영에게서 아예 사라지고 없었다.

* * *

다음 날 오전, 서울남부지법에서 두리식품에 대한 유통 금지 가처분과 제조 판매 금지 신청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사안이 명확한 데다 진갑석은 물론 피고 측 변호사마저 나오지 않자 판결은 쉽게 났다.

기분이 상한 판사가 왜 배상 청구 소송은 제기하지 않았냐며 물을 정도였다.

그 소식을 들은 진혁은 즉시 베이커에게 연락해 미국에서 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하게 했다.

‘알라딘과 떠나는 할랄 여행’에서는 특별한 이벤트가 준비되고 있었다.

라이나 왕비의 만찬이 열렸던 그 장소에 그때보다 더 풍성한 음식이 차려졌다.

잔잔한 재즈 음악 속에 계단을 올라오는 이는 진혁과 지민이었다.

TV로 봤던 이국적인 풍경과 음식이 차려져 있는 것에 지민의 고양이 눈이 더 커졌다.

“마음에 들어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정말 준비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라니까요.”

“피! 배고파요. 어서 먹어요.”

지민이 어색함을 숨기려고 얼른 테이블로 다가갔다. 진혁이 예의 바르게 의자를 빼 앉는 걸 도와줬다.

낯선 음식일 텐데도 지민은 맛있게 잘 먹어 줬다. 진혁도 오랜만에 제대로 된 무슬림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다.

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먹은 지민이 아쉬운 표정으로 남은 음식을 바라봤다.

“너무 많이 준비했어요. 아까워서 어떡해요.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세요.”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욕심을 부렸어요. 이번만 봐주세요.”

“무슨 날인데요?”

진혁은 잔뜩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는 지민의 고양이 눈을 보고 말했다.

“지민 씨랑 정식으로 사귀고 싶어요.”

“……!”

“이제부터 지민 씨랑 더 가까이 지내면서 더 많이 알고 싶어요. 그러면서 진지하게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같이 고민해 봐요.”

“좋아요. 날 선택해 줘서 고마워요.”

지민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그녀도 회사에 떠도는 소문을 모르지 않았다. 게다가 어제는 이모가 진혁이 웬 여자를 데리고 왔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정인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어제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는데, 오늘 이렇게 큰 선물을 받을 줄은 몰랐다.

“바보같이 왜 울고 그래요.”

진혁이 몸을 앞으로 당겨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줬다.

이보다 행복할 수는 없었다.

* * *

2차 대선 후보 TV 토론회가 며칠 남지 않았다.

야당 후보 캠프는 밤늦도록 불이 밝혀져 있었다. 권성일 후보가 오늘도 토론회 준비를 위해 들어가지 않고 있어서였다.

뒤지고 있는 상황이라 편히 쉴 수도 없었다.

자료를 검토하던 권성일이 보던 정책집을 내려놓았다. 얼마나 많이 봤는지 눈이 침침했다.

인터폰을 눌렀다.

“이 비서관 있으면 물 한 잔 가지고 오라고 해 주세요.”

밖에서 당일 예상되는 질문의 답변서를 준비하던 이현국이 잠시 후 물을 가지고 왔다.

“늦었습니다. 그만 들어가시지요.”

“다들 고생하는데 나만 들어갈 수 있나? 그보다 좀 앉아.”

권성일의 말이 하대로 바뀌어 있었다.

예의 바른 권성일은 아무리 어려도 함부로 말을 놓지 않았다. 유일하게 하대하는 이가 이현국이었다.

그만큼 두 사람의 사이가 각별하다는 의미였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준비를 철저히 했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그 정도로 역전시킬 수 있을까?”

이현국이 답을 못 했다.

야권 후보들 간 단일화에 대한 의견이 상당 부분 진척되었지만 후보 사퇴에 대한 요구가 너무 과했다.

그걸 받아들이면 그간 청렴함을 강조한 권성일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된다.

그렇다고 이대로 선거를 치른다면 필패는 불을 보듯 뻔했다. 진퇴양난이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권성일이 옆에 놓인 봉투를 가져다 놓고 물었다. 진혁이 건네준 봉투였다.

“이 자료들은 검토해 봤나?”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는 의견입니다. 하지만 워낙 철저하게 비밀로 감춰진 일들이라 증거 확보에는 실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진혁이 보내온 자료들에는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중에 하나만 사실로 밝혀져도 여당 후보는 심각하게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진혁 역시 증거까지 제시할 수는 없었다.

권성일의 고심이 깊어지자 이현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비록 증거는 없지만 충분히 터트릴 만한 일들입니다. 거기에 준비한 여당 선거 캠프 관계자의 양심선언까지 겹치면 분명 여론이 돌아설 겁니다. 흑색선전이라고 매도하겠지만 같이 맞불을 놓으면 됩니다.”

“물론 그럴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진흙탕 싸움이 될 거야. 무엇보다 이 자료가 밖으로 나가면 국민들은 큰 혼란에 빠지게 돼. 자신들이 믿었던 많은 것들이 추악한 사실을 감추기 위한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에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깊어질 거야.”

“그건 후보님의 잘못이 아니잖습니까. 국민들은 사실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걸 밝힐 의무가 있습니다.”

권성일이 피를 토하듯 열변하는 이현국을 잠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자가 욕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예. 욕심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사업이 더 잘 풀렸다고 했습니다.”

“욕심이라……. 욕심이란 말이지.”

뜻 모를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권성일이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

동성F&B 사무실에서 면접이 있었다.

김상조가 추천한 프랜차이즈 전문가 다섯 명을 진혁이 직접 만났다.

프랜차이즈 업계의 불황 탓인지 경력들이 화려했다. 심지어는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프랜차이즈를 운영했던 사장까지 있었다.

다들 처음에는 모범 답안이라도 보고 온 듯 좋은 말만 하다가 결국에는 가맹점을 늘리는 방법이라든지, 재료를 독점 공급하며 마진을 어떻게 남기는지 등 현재 문제가 되는 온갖 병폐를 자랑하듯 떠벌렸다.

진혁은 나중에 연락하겠다며 조용히 돌려보냈다. 말해 봤자 입만 아플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은 이전 사람들과 복장부터 달랐다.

단정한 양복차림에 자세로 똑발랐다.

사업가라기보다는 사무직 직장인의 느낌을 받았다.

이력서를 자세히 봤다.

이름은 신용찬.

예상대로 대기업 계열사의 신사업부에 근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현재 무슨 일을 맡고 계십니까?”

“대기 발령 상태라 지금 맡고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음……. 그러면 그 전에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로열패밀리와 제철한상의 프랜차이즈를 담당했습니다. 마지막 맡은 브랜드는 ‘RF버거’라는 수제버거였습니다.”

“RF, 제철한상은 저도 알고 있는 유명한 브랜드인데, 마지막 맡은 RF버거의 실패가 대기 발령의 이유인가요?”

“그렇습니다.”

대기업에 근무했던 진혁이라 충분히 사정이 짐작됐다.

앞선 두 브랜드의 성공으로 진급도 하고 성과급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신규 브랜드에서 더 큰 역할을 맡은 건데, 사업이 좌초된 후 회사는 손쉽게 그를 버리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진혁이 자세를 바로 했다.

흥미가 생겼다.

“RF버거의 실패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높은 가격으로 인한 소비자의 외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격에 비해 매장과 인테리어가 고급화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금력을 갖춘 가맹점주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능력에 맞추다 보니 어중간해졌습니다.”

“RF를 맡으셨다면 프랜차이즈 사업 초창기 멤버이신데, 최근 프랜차이즈 사업의 몰락을 어떻게 보십니까?”

“프랜차이즈 본사의 무분별한 브랜드 도입과 가맹점 확대에서 예견된 일입니다. 가맹비를 받고 재료 납품으로 이득을 취하려고만 했지 점주들의 고충은 신경 쓰지 않았지요. 결국 버티지 못한 가맹점이 무너지니 본사의 수익이 줄어들어 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랄한 비판이었다.

흥분한 신용찬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RF만 하더라도 준비 기간만 2년이 넘었습니다. 브랜드와 로고만 미국에서 가져왔지, 시스템이나 메뉴 등은 한국 실정에 맞게 모두 바꾸었습니다. 본사에서 직접 인력을 파견해 매장 관리를 지원하고 가맹점주의 고충을 수시로 듣고 함께 개선해 나갔습니다. 프랜차이즈의 핵심은 가맹점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짝짝짝짝짝!

진혁이 박수로 만족감을 드러냈다.

프랜차이즈의 핵심은 가맹점. 이 말이면 됐다.

진혁이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함께 일해 보시죠.”

“가……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님.”

신용찬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느껴졌다.

진혁은 그 자리에서 김상조를 불러 프랜차이즈 사업 본부를 만들라고 하고, 신창용에게도 필요한 인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데려오라고 했다.

RF버거 사업팀 전체가 회사에서 코너에 몰려있을 테니 우수 인력을 데려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 * *

그 시각, 진갑석도 서울 강남의 최고급 룸살롱에 있었다.

“김 상무님, 이번 납품된 물품 대금은 현금으로 좀 부탁합니다.”

“진 사장도. 3개월 어음으로 결재된다는 걸 알지 않소?”

“제가 사정이 좀 급해서 그렇습니다.”

“다른 업체와의 형평성 문제도 있고, 어려워요.”

“제가 큰 거로 한 장 준비하겠습니다. 사정 좀 봐주십시오.”

“알겠소. 한두 해 거래한 것도 아닌데 사정이 어렵다니 도와줘야지요.”

리베이트를 주겠다는 말에 두말없이 허락하는 모습을 보고 진갑석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소장이 접수될 때부터 미국으로 튈 작정으로 미수금을 받아내느라 정신없었다.

그가 그렇게 열심히 김 상무의 비위를 맞추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1-213으로 길게 늘어진 게 미국 LA에서 온 전화였다.

진갑석이 얼른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곧 들어갈 텐데 뭐 하러 전화해?”

“아버지,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인데?”

“동성F&B라는 곳에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해 왔어요.”

“이런 미친놈들. 그놈들이 왜 거기다 소송을 제기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민국에서도 찾아왔는데, 우리가 투자한 돈이 불법 자금일지도 모른다며 조만간 출두해서 해명하래요. 우리 쫓겨나게 생겼단 말이에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미국 법이 그래요. 빨리 들어와서 해결 좀 해 주세요.”

“알았다. 바로 가마.”

진갑석은 즉시 그곳을 나와 숙소에서 짐을 챙겨 공항으로 갔다.

하지만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여권을 받아 검색하던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 몰래 비상벨을 눌렀다.

어디선가 나타난 청원 경찰이 말했다.

“당신은 출국할 수 없습니다.”

“출국을 못 한다니?”

“검찰청에서 출국 금지 조치를 했네요. 죄목이…… 부정 수표 단속법 위반에 불법 외화 밀반출, 게다가 임금 체불. 이거 쓰레기구만?”

“아닙니다. 뭔가 잘못됐어요.”

“다들 처음에는 그렇게 말해. 데려가.”

청원 경찰이 발버둥치는 진갑석을 끌고 갔다.

다음 날 두리식품은 난리가 났다.

박이동이 흘린 진갑석의 구속 소식에 은행이 제일 먼저 움직였다.

즉시 채권 확보를 위해 공장 건물과 땅에 대한 압류는 물론 기계에도 차압 딱지를 붙였다.

월급을 받지 못한 근로자들이 즉시 노동부에 체불 임금으로 고발했다.

놀란 협력 업체들이 어음을 바로 은행에 넣는 바람에 두리식품은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다.

* * *

2차 TV 토론이 끝나고 권성일이 갑자기 기자 회견을 자청했다.

기자 회견장은 수많은 내외신 기자들로 꽉 들어찼지만 분위기는 차분했다. 발표 내용이 충분히 짐작되어서였다.

후보 단일화나 여당 후보에 대한 폭로성 의혹 제기 중 하나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 권성일이 연단에 서더니 말했다.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대선 후보로 나섰다고 말해 놓고 실은 제 자신이 청와대에 입성하려는 욕심이 더 컸음을 인정합니다. 그간의 잘못된 언행에 대해 유권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기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상을 깬 양심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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