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96화 (96/307)

96화. 진인사대천명

“이에 앞으로 대선 운동에 임하는 제 각오를 이 자리에 밝힙니다. 첫째, 인위적인 야권 후보 단일화를 즉시 중단하겠습니다. 둘째, 어떠한 흑색선전도 하지 않을 것이며, 철저하게 정책 대결로 심판을 받겠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위대함을 믿습니다.”

느닷없는 발표 내용에 멍한 표정으로 있던 기자들이 인사를 하고 떠나는 그의 모습에 급히 질문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권성일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기자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진혁은 그 모습을 TV로 보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밤새 준비한 자료들이 쓰레기통으로 버려졌지만 기분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 * *

정치권의 움직임과는 상관없이 진혁은 박이동과 함께 산청으로 내려가 두리식품 인수 작업에 들어갔다.

미국에 있는 진갑석의 가족들이 투자금을 제외하고 거의 전 재산을 내놓는 선에서 합의를 요청해 와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으면 쫓겨날 판이니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은행도 진혁의 등장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경매를 진행해 봐야 반도 건지기 어려웠다. 거기에 시간은 시간대로 걸렸다.

진혁은 두리식품의 공장과 기계를 20억에 넘겨받았다. 밀린 임금을 모두 지급해 주고 고용까지 보장한다니 직원들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협력 업체였는데, 진혁은 부채의 반만 지급하고 계속 거래를 하는 조건으로 그들의 양보를 받아냈다.

동성F&B 산청 공장은 다음 날부터 바로 정상 가동에 들어갔다.

그동안 불법 유통된 통조림을 수거해서 보관해 둔 것이 많아, 라벨만 바꿔 붙이면 끝이었다.

김상조가 구축한 배송 망에 따라 고래표 콩 통조림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일이 정리되자 진혁은 서울로 올라와 지민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강릉으로 가서 부모님과 이틀을 보냈다.

아직도 할아버지를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아버지의 어깨가 처져 있는 게 안타까웠다.

선거 날에는 아침 일찍 투표를 하고 바로 인천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탔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자신이 할 일은 다 했으니 결과는 하늘에 맡겼다.

* * *

새 대통령의 당선으로 안정을 찾아가는 한・미・일과는 달리 이집트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하페즈 대통령은 ‘국민 통합’의 약속과는 달리 논란이 되는 ‘파라오 헌법’을 국민 투표에 부쳐 통과시켰다.

찬성 64%에 반대가 36%인 앞도적인 찬성이었지만 그 이면은 달랐다. 투표율이 32%밖에 되지 않았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현 정부에 실망해 투표소에 가지 않은 반면, 강경 무슬림 형제단은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한 결과였다.

이에 군부는 IMF에 하페즈가 요청한 구제 금융을 연기해야 한다며 정면으로 반발했다.

현 정부와 실세인 군부의 갈등은 이집트 경제를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내몰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의 사업은 상품을 대부분 중동의 다른 국가로 수출하고 있어 영향이 크지 않았다.

물론 이집트 판매가 정체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다른 지역의 판매가 빠르게 늘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IATCO의 태도가 변했다.

그동안은 ‘검은 머리 짐’의 투자 정보를 얻기 위해 알쇼핑의 유통을 떠맡았다고 생각해 판매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다가 라이나 왕비의 방한을 기점으로 판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모습에 적극적으로 변했다.

IATCO가 운영하는 매장의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알라딘 화장품과 통조림을 배치하고 홍보도 대대적으로 했다.

매출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덩달아 쑤피넷의 인지도도 급격히 올라갔다.

페어몬트 호텔의 2층에 ‘사이공’이라는 아시안 퓨전 레스토랑이 있었다.

진혁이 그곳에서 TG전자 현지 법인장 윤기성 사장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본사 사장님까지 직접 전화하셔서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게 모두 다 서 사장님 덕분입니다.”

“윤 사장님이 제 의견을 들어 준 덕분이지요. 제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고 사용료까지 두둑하게 챙겨 주시니 고마워할 사람은 오히려 접니다.”

“그런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좋은 아이템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무조건 받아들이겠습니다.”

알쇼핑의 성장으로 그곳에 입점된 히잡 세탁기, 스태빌라이저 TV에게도 혜택이 돌아갔다.

속된 말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그 현상은 비단 이집트뿐만 아니라 알쇼핑이 서비스하는 국가들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슬슬 라인 증설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윤기성이 이 자리를 만든 것이다.

“본사 사장님께서 서 사장님이 다음에 한국에 들어오시게 되면 연락 한번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회가 되면 자연스럽게 뵐 때가 있겠지요.”

사이공은 세계적인 특급 호텔의 고급 레스토랑답게 식기부터 으리으리했다.

진혁은 윤기성의 추천으로 일본식 생선 초밥을 시켰는데 한국의 모듬 초밥과 비슷했다.

한국에서 먹는 맛과 특별히 다른 것은 없지만 여기가 중동이란 것을 감안하면 괜찮았다.

“초생강을 좀 드셔 보십시오. 맛이 아주 일품입니다.”

윤기성이 직접 젓가락으로 가져다줘서 먹어 보니 추천할 만했다. 느끼하고 비린 맛이 싹 사라지는 게, 중동 음식에 질렸을 때 가끔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집트에 중산층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GDP가 낮아서 그렇지 돈 가진 사람들도 의외로 많습니다. 그건 비단 이집트뿐만 아니라 중동 전체가 마찬가지입니다. 자원 부국들 아닙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3,000달러가 넘는 고가 TV를 고민 한번 없이 결재하는데, 제가 다 질릴 지경이었습니다.”

윤기성이 그 당시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초생강을 가져다 먹으며 진혁이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고 무조건 돈을 펑펑 쓰는 건 아닙니다. 자신들의 욕구에 맞는 제품만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현지화 전략이 필요한 거고요.”

“그렇지 않아도 그 때문에 본사 사장님 지시로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모하고 있습니다. 채택되면 상금과 포상이 아주 큽니다.”

“감각이 좋으신 분 같습니다. 추진력도 있으시고요.”

“정말 괜찮으신 분입니다. 한국에 가면 꼭 한번 만나 보십시오.”

윤기성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이어 나온 왕새우튀김과 볶음밥, 그리고 사테(Satay)라는 말레이시아 꼬치구이를 차례로 먹었는데 정말 괜찮았다.

계산은 윤기성이 했는데, 10만 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저렴했다.

물론 이집트 물가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비쌌지만.

* * *

태후전자 이집트 법인장 장근석 사장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경쟁사의 히잡 세탁기, 스태빌라이저 TV를 보는 순간 진혁이 자신에게 제안했던 제품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부러 무심한 척했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중동에서 TG전자 제품의 신장세가 가파르다며 본사에서 대책을 세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용료를 지불하고 모방 제품을 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정호영 부회장이었다.

그래서 전화했다가 욕만 된통 먹었다.

‘이제 와서 그자에게 고개를 숙이잔 말입니까? 그놈은 내가 잡을 테니 신경 쓰지 말고, 그런 멍청한 생각할 시간에 더 나은 신제품을 개발하세요.’

그는 자신의 말만 하고 끊었다.

신제품 개발이 그렇게 쉬우면 네가 해 보지 그러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진퇴양난이었다.

* * *

그 시각, 이집트 대통령 집무실은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연일 이어진 반정부 시위로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운 와중, 이집트 주간 알 아흐람 위클리가 여론 조사를 발표했는데 최악이었다.

하페즈 대통령의 지지도가 당선 시 79%에서 최근 49%로 급락했다. 더불어 무슬림 형제단의 지지도도 꾸준히 낮아지고 있었다.

“모하메드 모디 의장께서 우려를 표하시면서 조속한 해결을 요청하셨습니다.”

비서실장 야세르의 말에 하페즈가 인상을 찌푸렸다.

외부에는 측근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무슬림 형제단의 간부로, 모디 의장의 뜻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나오는 말이 당연히 퉁명스러웠다.

“누군 해결하고 싶지 않아서 이러고 있나? 지지도를 올리는 방법은 간단해. IMF 자금을 받아 생필품을 사다 뿌리면 국민들은 금방 잠잠해질 거야. 문제는 그걸 군부가 막고서 오히려 국민들의 불만을 부추기고 있다는 거지.”

“당에서도 군 측 수뇌부들과 비밀리에 접촉해 협상을 벌였는데, 신군부 세력들의 반발이 너무 강해 어쩔 수 없다고 했답니다.”

“압델 그놈이 대장이야. 놈만 잡으면 나머지는 오합지졸이 될 텐데…….”

이집트 군은 구세력과 신군부로 양분되어 있었다.

구세력은 무바라크 전 대통령 시절부터 요직을 맡고 있었다. 과거 정권의 이런저런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되어 있어 다루기 쉬웠다.

그런 반면 신군부는 최근 급부상한 세력이라 과거로부터 자유로웠고, 정치적인 흠이 없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물론 군의 젊은 장교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워 다루기가 힘들었다.

야세르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놈을 잡을 방도가 있습니다.”

“그래?”

반색하며 묻는 하페즈에게 내내 한쪽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브라힘 내무부 장관이 답했다.

“얼마 전에 비리 고발 신고가 접수됐는데 압델 장관이 연관된 일이었습니다. 은밀히 내사한 결과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이브라힘이 신고 내용을 들려주자 크게 반색했다.

“그게 사실로 밝혀지면 아무리 압델이라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그렇습니다. 게다가 비리로 축적된 재산을 몰수하면 국고에 도움도 될 겁니다.”

“잘했어. 역시 이브라힘 자네가 꾀주머니였어.

하페즈가 크게 흡족해했다.

이브라힘은 정부 고위 인사 중 유일하게 정치적인 배경이 없는 인물이었다.

좋게 말해 중도지만, 끊임없이 실세를 찾아 소신을 바꿔 가며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처신이 탁월했다.

그 덕에 군대 다음으로 힘을 가진 경찰을 거느리며 내무부의 수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직 좋아하시기는 이릅니다. 현 군부의 최고 실세를 잡는 일이니만큼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군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신군부가 눈치를 채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이브라힘이 꾀를 냈다.

“국가안전부에 조사를 맡기면 됩니다.”

“그거 절묘한 생각이군.”

“이브라힘 장관이 지휘권을 가지고 있으니 이 일에 제격입니다.”

이집트의 국가안전부는 왕정 시대의 정치 경찰을 대신하여 1952년 혁명 이후 탄생한 내무부 산하의 막강 기구였다.

무소불위의 힘으로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고문과 살인도 서슴지 않는 정권의 충견들이었다.

세 사람은 늦게까지 머리를 맞대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나갔다.

* * *

진혁은 오랜만에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벌려 놓은 사업은 많았지만 각기 사장을 두고 책임 경영제로 운영하고 있어 그가 신경 쓸 일은 별로 없었다.

다만 이집트 내 정부와 군부의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어 경제가 거의 빈사지경이었다.

외화가 부족해서 수입을 못 하니 생필품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었다.

알쇼핑의 통조림 가격을 단계적으로 올렸는데도 시장 물가가 치솟아 오히려 주문이 느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중동에 창궐하는 이슬람 국가 연합(ISIS)도 문제였다. 혼란한 곳이라면 어디든 그들이 있었다.

특히 미군이 떠난 이라크는 좋은 아지트였다.

정부는 종파 싸움만 하며 무능했고, 미국은 크게 한번 덴 곳이라 관여하길 꺼렸다. CIA를 통해 정부군을 지원해 주는 게 전부였다.

덕분에 진혁도 잭슨을 통해 군용 통조림을 계속해서 납품하고 있었다.

프랜차이즈 사업 준비가 됐다는 말에 진혁은 다시 한국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한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는데, 야당 후보인 권성일이 근소한 차이로 여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이 연임되었고, 일본은 진혁의 예상대로 아베 신조 총리 시대가 열렸다.

동성F&B 사무실로 가자 김상조와 신용찬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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