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행복 속에 싹트는 음모
신용찬이 내민 사업 계획서를 읽어 본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만드셨네요. 이대로 진행하세요.”
“정말 이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문제 있습니까?”
“본사 부담이 너무 큰 것 같아서요.”
“말씀드렸듯이 전 이 사업으로 돈을 벌려는 게 아닙니다. 한국을 찾는 무슬림들이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자는 게 목적입니다. 더불어 능력은 있으나 자본이 없는 분들에게 기회를 주고, 가맹점과 함께 상생하는 모델을 만들어 보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도 있습니다. 너무 눈앞의 수익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사장님 생각이 그러시다면 믿고 진행하겠습니다.”
신용찬이 마음속에 남은 마지막 의심을 털어내고 힘 있게 말했다.
그는 처음 진혁의 생각을 들을 때의 감동을 아직도 있지 않고 있었다.
평생 이 일을 하면서 느꼈던 온갖 나쁜 관행을 통렬하게 깨부술 수 있는 획기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걸 사업 계획서로 구체화해 보니 문제가 많았다.
본사의 책임이 너무 크고, 수익 구조도 불명확해 수익 사업인지 자선 사업인지 본인도 헷갈렸다.
가장 큰 걱정은 프랜차이즈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상황에서 로열티 제도를 도입해 가맹점 모집이 과연 잘될까 하는 불안감이었다.
진혁이 그 모든 사실을 알고도 감수하겠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다음 날 주요 일간지에 ‘알라딘과 떠나는 할랄 여행’ 프랜차이즈 모집 광고가 실렸다.
그걸 본 대부분의 독자들 반응은 ‘어이없음’이었다.
“가맹비에 물품 대금으로 뜯어 가는 것도 모자라, 시설비, 인테리어 비용까지 청구하면서 이젠 로열티마저 내라고? 이거 미친놈들 아니야?”
당연한 반응이었고 99%의 사람들이 그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1%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밑에 적힌 작은 글씨에 주목했다.
∙가맹비 No! 재료 원가 공개.
∙본사 51% 이상 투자. 전문 상주 인력 파견.
∙물품 구입 및 각종 투자 시 가맹점주에 재량권 부여.
∙지침 위반 적발 시 즉시 계약 해지되니 주의 요망.
아는 사람만 신청하라는 광고였다.
이 문구를 아는 사람은 딱 한 부류뿐이었다.
실패자.
전 재산을 투자해 가맹점을 열어 온 가족이 매달려 죽기 살기로 일했지만 프랜차이즈 본사의 횡포에 무너진 사람들.
그 한이 가슴 깊이 박혀 있는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문구였다.
* * *
출근을 위해 호텔 로비로 나오던 진혁은 국정원 김상균 과장이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다가갔다.
악수하고 커피숍에 가서 앉았다.
“국정원에서 호텔 담당이신가 봅니다. 여기서 뵙는 게 너무 익숙한데요.”
“청와대의 초청도 마다하신 분이니 제가 찾아올 수밖에요.”
“서로 일을 새롭게 시작해서 바쁜데 뻔한 인사를 나누면 뭐 합니까. 용건이 있다면 모르지만.”
“참 특이하신 분입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일부러라도 선을 대려고 하는데.”
“그거야 그 사람들 사정이고, 전 딱히 필요성을 못 느껴서요.”
덤덤한 진혁의 답변에 김상균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이현국 보좌관님이 청와대 비서실장이 되신 건 모르시…… 당연히 모르실 테고. 대선 끝나고 짐이 되기 싫으시다고 뉴질랜드로 떠나셨다가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에 돌아오셨습니다.”
“그분이라면 충분히 그러실 만한 인품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 분들이 대통령 곁에 많이 계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번에 대북 관계를 담당하는 3차장으로 진급했습니다.”
“아우, 축하드립니다.”
“서 사장님 덕분입니다.”
“별말씀을요. 열심히 하시다 보니 저도 만난 것 아닙니까. 그나저나 그쪽을 맡아서 좀 골치 아프시겠네요.”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촉발된 남북 관계 경색이 개성공단 폐쇄 문제로 비화되어 연일 뉴스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개성공단이 저들의 돈줄인데 설마 폐쇄까지 가겠습니까? 그러다가 말겠지요.”
“김 위원장은 아직 어려서 혈기가 넘쳐납니다. 실리보다는 자존심을 택할 수도 있어요.”
“개성공단은 사실상 마지막 남은 남북 경협 창구이자 남북 소통 공간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습니까?”
“그건 모르지요.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발생하면 입주 기업의 피해가 막심하니 준비해 둬서 나쁠 것은 없지요.”
진혁의 기억에 따르면 이번 일로 결국 개성공단은 폐쇄된다.
그런데 자신의 개입으로 대통령이 바뀌어 결과를 예단할 수 없었다.
가맹점 신청이 적을 것이라는 신용찬의 걱정은 기우였다.
진혁이 회사로 가자 직원들이 쇄도하는 문의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실패한 사람들이라 자금이 넉넉할 리가 없었다.
‘본사 51% 이상 투자’를 믿고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그중에는 신용 불량자는 물론 노숙자도 있었다.
진혁은 본사에서 100% 투자해도 상관없으니 능력과 열의 두 가지만 보고 선별하라고 지시했다.
퇴근 후 진혁은 어김없이 이모 집을 찾았다. 서울에 온 날부터 매일 저녁 지민과 시간을 보냈다.
그녀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민 씨 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이세요?”
“참 빨리 물어보시네요. 제주도에서 펜션을 운영하고 계세요.”
“고향이 제주도예요?”
“아니요. 서울 토박이들이세요. 퇴직하고 내려가신 거예요.”
“그럼 형제는요?”
“딸만 둘이에요. 여동생은 공무원 준비 중이고요.”
“그럼 지민 씨가 첫째?”
“맞아요.”
진혁은 그제야 지민이 부모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마음에 들게 행동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장녀로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동생까지 챙기느라 자신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모양이었다.
덕분에 진혁도 그녀의 자상함으로 여러 가지 득을 보고 있었다.
오늘은 아쉽지만 일찍 일어나야 했다. 지민이 내일 아침 일찍 회의가 있다고 했다.
함께 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탔다.
혜화역에 정차하자 젊은 남녀들이 엄청나게 밀려왔다. 대학로에서 무슨 행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반대쪽 문으로 밀려났다.
진혁도 남자였다. 지민을 보호하기 위해 벽에 손을 집고 억지로 버텼다. 하지만 등에 가해지는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벌게진 얼굴을 보고 지민이 말했다.
“전 괜찮아요.”
그 말에 팔에 힘을 풀자 두 사람 사이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지민의 목덜미가 빨갛게 물들었다.
그때 진혁의 손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지민의 손이었다.
가만히 잡았다. 그러자 잠시 힘이 들어갔던 손이 이내 풀렸다.
지민은 이제 얼굴까지 발개졌다.
* * *
진혁과 신용찬은 접수된 신청서 중에 고르고 골라 열 명의 가맹점주를 뽑았다.
서울 세 곳, 인천 두 곳, 경기, 부산, 대구, 광주, 제주까지.
수도권 가맹점주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지방의 가맹점주는 재정 상태가 열악했다.
특히나 광주 가맹점주는 자산이 한 푼도 없는 노숙자였다.
그는 사업 계획서와 자신의 사연을 편지로 써서 첨부했다.
특급 호텔 주방장 출신인 점과 갑질 본사에게 사기 당한 이력을 솔직하게 밝혔다.
재기 의지가 강한 점이 눈에 들었다.
광주 가맹점은 100% 직영점 체제로 운영하기로 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보니 평균 투자 비율이 본사 65%, 가맹점주 35% 수준이었다.
진혁은 그들을 모아 놓고 상생을 모토로 한 자신의 프랜차이즈 운영 방침을 전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신용찬을 포함한 가맹점주 협의체를 만들어 주요 의사 결정에 참여하게 했다.
* * *
저녁에는 지민을 만나 경리단길을 걸었다.
지난 주말에 강릉에 가서 부모님을 뵙고 온 참이었다.
“어머니가 지민 씨가 안 온다고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걱정해서, 입이 근질거려서 혼났어요.”
“아직은 안 돼요.”
지민은 부모님께는 좀 더 확신이 생긴 후에 말씀드리자고 했다.
괜히 미리 말씀드렸다가 실망만 안겨 드릴 수 있다는 우려를 진혁도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여전히 의욕이 없으세요. 어머니도 걱정하시는 눈치고.”
“이제부터는 제가 자주 찾아뵐게요.”
진혁은 내일 이집트로 떠나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손부터 잡아 지금까지 놓지 않고 있었다.
“갔다가 언제 오세요?”
“한 달 후에 서울 1호점이 오픈하니 그때 올 것 같아요.”
“…….”
“가지 말까요?”
“피……. 날 나쁜 여자 만들지 마세요. 가셔서 하실 일이 있잖아요. 잘하시다가 또 오시면 되죠. 저도 열심히 일하면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 가기 싫다!”
하늘에 대고 소리치는 진혁의 말의 반은 진심이었다.
* * *
아쉬움을 뒤로하고 진혁은 카심과 함께 한국을 떠나 카이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짐이라고는 손가방이 전부라 진혁이 먼저 입국 심사대에 섰다.
그에 반해 카심은 가족들에게 줄 당뇨약이랑 선물들이 한 짐이라 뒤에 처졌다.
평소와 달리 여권 심사가 길어지자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저 그게…….”
“서진혁 씨 되십니까?”
입국 심사원이 미처 답하기도 전에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리자 건장한 사내 둘이 서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국가안전부에서 나왔습니다. 같이 좀 가 주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가 보시면 압니다.”
딱딱한 태도에 고압적인 자세였다.
단추를 푼 양복 안쪽으로 권총 지갑이 일부가 보였다. 빠져나가기 힘들었다.
진혁은 침착하게 행동했다.
“알겠습니다. 여권만 돌려받고 가지요.”
몸을 돌린 진혁은 입국 심사원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눈은 이쪽으로 달려오는 카심에게 향했다.
그리고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가 온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사실을 알리고 대책을 세우는 게 나았다.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본 카심이라 금방 그 뜻을 알아챘다. 불안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달려오던 걸음을 멈췄다.
여권을 돌려받은 진혁이 몸을 돌리자 상대가 물었다.
“일행은 없습니까?”
“혼자 다녀오는 길입니다.”
“갑시다.”
양옆으로 붙어 서는 게 여차하면 끌고라도 가겠다는 태도였다.
공항 내의 사무실로 가서 얼마를 기다리자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이 와서 진혁을 데리고 나갔다.
짙게 선팅 된 차에 타고 얼마 후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진혁은 낯선 풍경에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국가안전부 요원에게 끌려오다 정신을 잃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칠을 하지 않은 시멘트벽에 붉은 빛의 백열등, 낡은 책상과 의자가 이곳이 취조실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의자에 앉혀진 몸은 다행히 묶여 있지는 않았다.
전면의 거울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얼마 후 한 사내가 들어왔다. 작은 키, 검은 얼굴에 쭉 찢어진 눈이 만만치 않은 느낌을 주었다.
사내가 앞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서진혁 씨, 왜 잡혀 왔는지 알겠소?”
“질문을 하시기 전에 미란다 원칙이라든지 변호사 선임권이 있음부터 고지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배짱이 두둑하군. 하긴 그 정도 되니까 단기간에 사업을 크게 일으키셨겠지만.”
진혁의 도발에도 상대방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내공이 깊다는 방증이었다.
“여기가 어디죠? 이름이라도 알려 주시고 시작하지요.”
“그러지. 어차피 다 불고 인정하거나 죽어서야 나갈 수 있는 곳이니까. 여긴 국가안전부, 나는 부장 가부르네.”
“제가 왜 잡혀 왔습니까?”
“죄목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긴 입만 아프고. 핵심은 뇌물 증여, 외화 밀반출이야. 두 가지만 시인하고 나머지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시간도 없는데.”
진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두 가지 모두 왜 그런 의심을 받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도 바쁜 사람이라 빨리 끝내고 가고 싶지만, 왜 그런 죄목이 붙었는지 이유를 모르겠네요.”
“외국인이라 우리에 대해서 잘 모르시나 본데, 여긴 이유를 알려 주는 곳이 아니야. 그냥 우리가 그렇다면 그렇게 되는 곳이지.”
평소라면 농담하냐고 따졌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만큼 가부르가 내품는 기운이 강렬했다.
노려보는 진혁을 보고 조사팀장이 피식 웃었다.
처음 이곳에 온 자들이 보이는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며 진술서에 사인하게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