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배신의 시간
가부르가 가져온 서류를 펼쳤다.
“시간 절약을 위해 우리 생각을 먼저 밝히지. SEZ 입주에 특혜를 받았더군.”
“그런 적 없습니다.”
“실적이 없는 신생 업체가 SEZ의 입주 심사를 통과한 게 그럼 정상적이란 말인가?”
“그건 제가 국방장관님을 도와…….”
“그러니까 국방장관이 개입됐다는 것이잖아. 그래서 얼마를 건넸어?”
“그게 아니라…….”
꽝!
가부르가 서류철로 책상을 내리치고 소리쳤다.
“네 변명을 듣는 자리가 아니야!”
“…….”
“풍족하게 안겼으니 다음 군납까지 넘겨준 거겠지. 거기서 또 리베이트가 건너갔을 테고. 그것만 불어. 그게 네가 사는 유일한 길이야.”
진혁은 침묵했다.
이제 왜 자신이 잡혀 왔는지 명확했다.
이들은 압델을 노리고 있었다.
현 정부와 군부의 알력 싸움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그 모습에 가부르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사업가라 상황 판단이 빠르군. 맞아. 너는 월척을 잡기 위한 미끼일 뿐이야. 물론 네가 없다고 해도 그 고기는 반드시 잡는다. 우리가 나선 이상 그건 이미 정해진 수순이지. 다만 네가 불면 좀 더 일이 수월해지니까 알려 주는 것뿐이야. 겨우 미끼가 돼서 죽으면 안 되잖아.”
“…….”
“시원하게 사인하고 사업체 넘긴 뒤에 네 나라로 돌아가. 여기 일은 여기 사람에게 맡기고.”
가부르의 마지막 말에 잠깐 흔들렸던 진혁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들은 단순히 국방장관만 잡고 끝낼 심산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룬 것마저 노리고 있었다.
마음을 정하자 여유가 생겼다.
“미끼가 되고 싶지도 않고, 이집트를 떠날 생각도 없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나오겠지. 너무 빨리 시인해 버리면 우리 기술자들도 할 일이 없어져서 심심할 거야. 차근차근 경험해 보라고. 다만, 너무 오래 즐기지는 마. 살아 나가도 정상 생활이 힘들어질 거야. 그럼 나중에 보자고.”
가부르가 나가자 험상궂은 사내가 들어왔다.
본격적인 심문과 취조가 이어졌다.
그들에게 진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기본적인 인권도 지켜지지 않았고, 폭언과 폭행도 빈번히 자행했다.
* * *
이집트 대통령 집무실의 분위기는 오늘도 무거웠다.
문이 열리고 이브라힘 내무부 장관이 들어왔다.
“부르셔서…….”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해!”
채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하페즈 대통령이 호통부터 쳤다.
옆에 있는 야세르 비서실장의 표정도 차가웠다. 얼마 전까지 셋이 모여 희희낙락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였다.
“이 일은 비밀이 생명인 걸 알아, 몰라? 한국 놈을 잡아들인 것을 동네방네 소문내면 어쩌란 거야?”
“분명 은밀히 진행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게 은밀히 진행한 겁니까?”
야세르가 내민 미국 신문에는 서진혁의 사진과 함께 ‘막 나가는 이집트 하페즈. 외국인까지 불법 감금하다.’라는 조나단의 특종 기사가 실려 있었다.
“한국 정부는 물론, 미국과 EU에서도 항의 전화가 왔어요. 거기까지는 일상적인 거지만 문제는 요르단 왕실입니다. 왕비가 직접 찾아오겠다는 것을 겨우 설득해서 말렸습니다. 아랍권마저 등을 돌리면 곤란합니다. 대사원에서도 당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는 바람에 그쪽도 분위기가 좋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이미 벌어진 일이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빨리 자백을 받아내세요.”
“그렇게 되면 몸은 물론 정신까지 망가질 겁니다. 나중에 외부의 비판은 어떻게 하시려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일을 이따위로 처리했으니 당연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지.”
하페즈의 싸늘한 말에 이브라힘의 안색이 굳어졌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그걸 눈치챈 야세르가 달랬다.
“꼭 장관보고 책임지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국가안전부장 정도로 끝냅시다.”
“…….”
“지금은 압델을 잡는 데만 신경 쓰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돌아서 나오는 이브라힘의 눈빛이 무겁게 내려앉아있었다.
* * *
그때 한국은 밤 10시였다.
회사에서 화장품 사업 분사에 따른 계획을 점검하고 있던 정인영은 정진호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어 준 어머니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세요?”
“서재에 계시는데 네 오빠랑 들어간 지 한참 되셨다.”
서재로 들어가자 정진호가 정호영과 무슨 이야긴가 심각하게 나누고 있었다.
“저 왔어요.”
“앉아라.”
정진호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서진혁이는 만나고 있는 거냐?”
“작년에 한국에 왔을 때 보고 못 만났어요.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그 사람이 바빠서요.”
“얼굴을 보냐는 말이 아니야. 사귀고 있는 것을 묻는 거다.”
정인영은 아직 정진호에게 진혁이 친구로 보자고 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가 서진혁에게 욕심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실망을 드리기 싫었다.
정인영이 바로 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정호영이 입을 열었다.
“놈은 우리에게 그곳에 공장을 유치하라고 하고 제품 아이디어는 경쟁사인 TG전자에게 넘겨줬다. 지금 그 일로 그룹 내부에서 우리가 당한 것 아니냐는 비난이 일고 있어.”
“뭔가 사정이 있을 거예요. 진혁 씨가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그것만이 아니다. 놈은 월초에 한국에 들어와서 프랜차이즈 사업을 진행하고 돌아갔다.”
“……!”
“놈이 만나는 여자가 있다.”
정호영이 사진을 몇 장 내밀었는데 손을 잡고 걷는 다정한 연인이었다. 물론 남자는 진혁이었고 여자도 인영이 아는 사람이었다.
‘스페이스 워커’의 김지민 대리.
정인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진혁이 왜 자신에게 그런 통보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모멸감이 몰려왔다.
정호영이 말을 이었다.
“알아봤더니 네가 데리고 있던 직원이더구나.”
“그때 만났을 때 친구로 지내기로 했었어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정진호가 어금니를 물었다.
정인영의 말이 오히려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딸의 마음에 상처를 준 놈이었다.
“놈은 끝났다. 친구든 뭐든 깨끗이 잊고 더 이상 만나지도 마라.”
“아버지!”
“아버지가 감정으로 이러시는 게 아니야. 이걸 봐라.”
조나단 기자가 쓴 NS통신의 영문 기사였다.
“국내 언론들은 정부의 엠바고 지시로 아직 보도하지 않고 있지만 SNS를 타고 퍼져 나가고 있다.”
“이게 어떻게…….”
“카이로 지사 최 과장의 보고로는 국가안전부에 잡혀 갔다고 한다. 정부에 밉보였다는 거지. 살아만 나와도 다행이라며, 이제 놈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고도 했다.”
“도와주세요, 아버지. 진혁 씨를 이렇게 잃을 수는 없어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냐? 더 이상 내 앞에서 그놈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정진호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벌게진 눈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정인영의 모습에 더 이상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이럴 때는 신경을 다른 곳에 두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주총에 문제가 생겼다.”
“……?”
“2대 주주인 천 회장이 화장품 사업 분사에 회의적이라는 보고가 있다.”
“그럼 분사가 무산되는 건가요?”
“천 회장이 반대하면 힘들다.”
“전혀 방법이 없는 건가요?”
어느새 정인영의 얼굴이 달라져 있었다. 진혁의 일로 받은 충격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없었다.
이번에도 정호영이 대신 입을 열었다.
“천 회장님이 그전부터 네게 관심이 있으셨다.”
“……?”
“회장님 손자가 한국종금 부사장인데 내 학교 후배야. 그동안 너를 소개해 달라고 졸랐는데 내가 안 들어주자 제 할아버지에게 이야기한 모양이더라.”
“그럼 그자를 만나 주면 되는 건가요?”
“그렇지.”
“그럼 만나자고 해요.”
너무 간단히 허락하자 오히려 정호영이 당황했다.
“이건 단순히 얼굴만 보자는 게 아니야.”
“알아요. 화장품 분사는 꼭 이뤄야 해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정인영이 입술을 피나게 깨무는 모습에 정진호가 마음을 놓았다. 사업가에게 가장 중요한 냉정함과 오기를 모두 가지고 있는 딸이 대견하게 보였다.
이곳의 그 누구도 진혁을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 * *
이브라힘은 내무부 장관실에 도착해 당장 국가안전부장 가부르를 호출했다.
“서진혁이 취조는 어떻게 되고 있나?”
“예상보다 독종입니다. 아무래도 약물을 써야 할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약물을 쓰면 사흘 안에 자백을 받아낼 수 있을까?”
“자백은 받아낼 수 있겠지만 그럼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힘들 겁니다.”
자백 약물은 뇌를 직접 자극해 정신을 분열시키는 효과가 있어 시간을 두고 천천히 투입하는 게 원칙이었다.
단시간에 과다 사용하면 뇌에 영구손상을 줄 수 있었다. 그래서 묻어 버려도 상관없는 자에게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브라힘이 가부르의 얼굴을 천천히 쳐다봤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렇다고 가부르에게 개인적으로 친한 감정이 있지는 않았다. 그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에 전혀 죄책감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끝일까 하는 의문이 자꾸 들었다.
그 마음을 모르고 가부르가 입을 열었다.
“국내정세분석팀의 보고에 따르면 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뭐?”
“신군부 측 인사들이 수시로 회동을 하고 있답니다. 경비가 심해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뭔가 곧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라고 합니다.”
서진혁이 왜 잡혀 갔는지 모를 압델이 아니었다. 하페즈가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아는데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가부르가 다른 말을 했다.
“해외작전팀장이 CIA의 지인으로부터 경고 전화를 받았답니다.”
“경고 전화?”
“서진혁에게 문제가 생기면 미국이 다시 이집트 상황에 직접 개입할 수도 있다고 했답니다.”
“뭐? 대체 그놈이 누구기에…….”
단순히 도구로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무엇보다 미국이 직접 개입한다면 상황이 완전 바뀌게 된다.
무슬림 형제단의 지지를 받은 하페즈를 처음부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미국이었다.
그들의 개입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했다.
이브라힘의 생각이 길어지자 가부르가 물었다.
“약물 투입을 강행할까요?”
눈빛을 굳힌 이브라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니. 일단 기다리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모든 취조도 중지하라고 해.”
“급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급하다고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갈 수는 없지. 아무튼 그렇게 알고 가 봐.”
“네.”
가부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나갔다.
* * *
그날 밤, 시내 모처에서 이브라힘이 압델을 만났다.
“내 목을 노리시는 분이 먼저 연락해 만나자고 해서 놀랐소. 특수 부대라도 데리고 왔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오해십니다.”
“지금 이 상황이 오해라는 말 한마디로 끝날 일이라고 생각하시오?”
“위에서 시킨 일이라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당장 호통을 치려던 압델이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반짝였다.
‘어쩌면…….’
“겨우 그 이야기를 하자고 나를 보자고 한 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기회를 주신다면 각하를 위해 일하겠습니다.”
압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브라힘은 전형적인 박쥐같은 기회주의자였다. 하페즈보다는 자신이 더 유리할 것 같으니 얼른 배를 바꿔 타겠다는 얄팍한 속셈이었다.
얼굴에 침을 뱉어 주고 싶지만 참았다.
자신은 지금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걸 이루려면 이런 자들도 필요했다.
“내 소문을 들어 알겠지만 난 은원이 명확한 사람이야. 받은 만큼 돌려주지. 은혜는 은혜로, 피는 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제가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서진혁이 입을 열지 못하게 해.”
“알겠습니다. 당장 풀어 주겠습니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 이집트에 머물러 있으면 두고두고 우환이 될 놈이야.”
“이집트 내 사업에 집착이 강하다는 보고는 받았습니다. 쉽게 떠날 놈이 아닙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자네들이 잘하는 것이 있잖은가.”
이브라힘의 눈이 커졌다. 죽여서라도 입을 막으라는 말이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이미 강은 건넌 상태였다. 여기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알겠습니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고맙네. 이 은혜는 잊지 않지.”
압델의 마지막 말은 이브라힘이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 * *
진혁은 여전히 취조실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고문은 없었다.
며칠간 진혁은 고문 기술자들의 실력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물고문은 기본이고, 듣도 보도 못한 온갖 방법으로 육체적 고통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그런데도 겉으로는 아무런 상처가 나지 않았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에 달해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한 뒤 그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 때마다 거짓말처럼 고문이 멈췄다.
그들이 들어오는 게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더니 만 하루 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자 이제 오히려 불안해졌다.
이것도 고문의 한 방법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내 다시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