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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99화 (99/307)

99화. 피눈물의 찍기

들어온 이는 놀랍게도 알-아즈하르 대사원의 울라마 아메드였다.

“아니, 울라마께서 여길 어떻게?”

“성실한 신자분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들어왔습니다.”

안에만 갇혀 있는 진혁이라 시간 개념이 없지만 지금 밖은 한밤중이었다.

마침 오늘 당직자가 대사원의 오래된 신자여서 도움을 받은 아메드가 앞자리에 앉아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런 고통을 겪는데도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찾아오시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하셨는지 압니다. 그러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안타깝게도 저희들에게는 미스터 서를 구해 줄 힘이 없습니다. 대신 대이맘의 말씀을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

“이집트 파라오의 박해로부터 이스라엘인들을 해방시킨 이는 모세였습니다. 그는 홍해를 갈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그들을 구출했습니다. 대이맘께서는 미스터 서에게 이집트에 집착하지 말고 더 많은 무슬림을 위해 지중해를 건너라 하셨습니다.”

“지중해를요?”

“그 이상은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만 이 일로 의지가 꺾이지 말라는 당부도 하셨습니다.”

너무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위험한 곳에 아메드를 보내 말을 전한 것을 보면 뭔가 깊은 뜻이 있을 듯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는 진혁을 두고 아메드가 돌아갔다.

* * *

이집트 대통령 집무실에서 하페즈와 야세르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군부의 방해로 IMF 지원금이 막히자 생필품 가격이 끝도 모르게 오르면서 민심은 점점 하페즈와 무슬림 형제단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중동의 다른 나라들도 더 이상 지원금을 줄 수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달러를 구하기 위해 국가 소유의 자원을 매각하는 게 유일한 대안이었다.

미래에 크게 후회할 일이라는 걸 알지만 급한 불은 꺼야 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이브라힘이 들어왔다.

“그자가 입을 열었나?”

“특이 체질인지 약물이 전혀 듣지 않습니다.”

이브라힘은 거짓말을 했다.

그는 압델의 지시를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았다.

압델이 미래의 보험이라면 하페즈는 현 실세였다. 지금 당장은 하페즈의 눈 아래에서 살아남아야 미래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찾아온 것이다.

“병신 같은 놈들. 그런 자의 입 하나 열지 못하다니…….”

하페즈가 국가안전부를 욕했지만 이브라힘은 자신도 거기에 포함된 의미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외부의 압력 때문에 더 이상 잡아둘 수 없으니 풀어 줘야 했다.

하지만 거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냥 풀어 주면 현 정부의 무능함만 내비치는 꼴이라 하페즈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브라힘이 생각했던 대안을 제시했다.

“어떻든 SEZ에 입주한 것은 절차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맞습니다. 따라서 거기에서 얻은 수익을 환수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 문제는 공장이 한국 기업 소유란 거야. 우리가 함부로 몰수했다가 다른 외국 기업들까지 떠나 버리면 일이 더 커져.”

“그건 걱정 마십시오. 서진혁의 다른 회사들이 우리나라에 적을 두고 있으니 문제 될 게 없습니다. 그리고 추방해 버리면 더 이상 그도 어쩌지 못할 겁니다.”

“그거 좋은 생각인 것 같군. 그렇게 처리하고 이번 일을 서둘러 끝내도록 해.”

“잠시만요.”

야세르가 반대하고 나서자 하페즈의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대통령인 자신의 결정을 면전에서 막았다.

야세르가 즉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야기해 봐. 맘에 안 드는 이야기면 각오해야 할 거야.”

“회사를 빼앗고 추방하면 국내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하지만 그자가 외국에 나가서 가만있겠습니까? 놈이 입을 열면 당장 미국 언론이나 요르단 왕실이 나서서 우리를 비난할 겁니다. 이 점을 간과하시면 안 됩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야.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마침 우리에게 이것이 있습니다.”

야세르가 방금까지 검토했던 서류에서 지도를 빼내 내밀었다.

이집트 국내에 위치한 유전과 가스전의 개발 현황에 O, X표가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개발 가능성이 많은 곳은 O, 희박한 곳은 X로 되어 있었다.

“가능성이 희박한 곳 중 하나를 환수 금액 대신 사게 하는 겁니다. 그럼 돈은 돈대로 받고 회사를 강제로 빼앗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입니다.”

“오호, 기발한 아이디어야. 그 짧은 시간에 그런 대단한 생각을 하다니.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있어.”

하페즈가 야세르를 극찬하는 모습에 이브라힘은 위기를 느꼈다.

여기서 밀리면 자신이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게다가 압델과의 약속도 지킬 수도 없게 된다.

“해외 문제는 그렇게 마무리된다고 해도 그러면 국내 문제가 남게 됩니다. 물증이 없어서 그렇지, 그자가 국방장관과 친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풀려나면 둘이 또 어떤 작당을 할지 모릅니다. 무조건 해외로 내보내야 합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게 되면 그자의 입을 막을 방법이 없잖아?”

“제 처음 계획대로라면 그렇지만, 야세르 실장님의 계획대로 광구를 사는 조건으로 돈을 내놓게 되니 국외로 추방해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할 겁니다. 국내의 사업체가 볼모로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거 참 절묘한 생각이군. 그렇게 하면 국내, 해외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겠어. 역시 자네들이 둘이 머리를 맞대니 못할 게 없군. 아주 든든해.”

흡족한 표정의 하페즈와 달리 야세르와 이브라힘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 * *

진혁은 오늘 변함없이 취조실에 앉아 있었다.

이제 답답함을 넘어 미칠 지경이었다.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내들은 벙어리인 듯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며 처음 만났던 국가안전부장 가부르가 고급 양복을 입은 사내를 안내해 들어왔다.

“이브라힘 내무부 장관님이시네.”

“인사는 됐고. 앉아.”

엉거주춤 일어나려는 진혁에게 말하고 이브라힘이 맞은편에 앉았다.

“비리 고발 신고가 접수되어 조사했던 거야. 같은 한국인이 신고한 데다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라 우리도 믿을 수밖에 없었어.”

“……!”

“국방장관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다는 말은 믿어. SEZ의 공장 유치에 도움을 준 건 알지만, 규정을 뛰어넘는 특혜를 받았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거야.”

진혁은 침묵했다. 아니, 입을 열 수 없었다.

놈이 이 일을 벌인 범인이었다.

입을 열면 어떤 욕이 튀어나올 줄 몰랐다.

대신 테이블 아래 주먹을 죽어라 움켜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아픔에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부 내에서 자네를 처리하는 문제로 갑론을박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대표로 자네의 의향을 물어보러 온 거야. SEZ에 입주한 공장으로 벌어들인 부당 이익을 환수하는 게 마땅하다며 국내의 회사를 내놓으라고 하는데, 받아들일 텐가?”

“그건 못 합니다. 차라리 제 목숨을 달라고 하십시오.”

진혁이 바로 입을 열어 강하게 반발했다. 이렇게 쉽게 내놓을 거라면 지금까지 그런 고초를 겪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진혁의 속마음을 모르지 않은 이브라힘이 진혁을 위하는 척 말을 이었다.

“내 생각도 같아. 국내에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몇 안 되는 회사마저 빼앗아 망가트리면 어쩌자는 말인지. 쯔쯔즛.”

“…….”

“그렇다고 그냥 풀어 주는 건 더 말이 안 돼. 그래서 내 말에 따르면 자네를 풀어 주도록 설득해 보겠네.”

“이야기해 보시오.”

“자네의 회사 가치를 조사해 봤더니 3억 달러쯤 되더군. 그만큼 현금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하자고. 그리고 당분간은 밖에 나가 있도록 하고.”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진혁이 일단 버텼지만 이브라힘도 만만치 않았다.

가부르에게 호통을 쳤다.

“대체 어떻게 했기에 이자가 아직도 우리를 만만히 보는 거야!”

“죄송합니다.”

“얼마 전에 1억 5천만 달러나 되는 거금이 한국으로 건너갔더군.”

“……!”

“마르와라고 했던가? 그 아이가 이 일에 깊이 관여됐다는 내용도 있어. 그리고 카심이란 자가 수행해 한국에 여러 번 다녀왔다니 함께 불러 조사도 해야 할 것 같고…….”

으드득.

“……알겠습니다.”

진혁은 이를 갈며 고집을 꺾었다.

자신은 외국인 신분이라 함부로 못 하고 있지만 그들이라면 달랐다.

자신을 도운 죄밖에 없는 고마운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3억 달러면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가진 비자금을 돌리면 불가능한 금액은 아니었다.

지금은 놈이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일단 여기서 살아나가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오늘 당한 수모는 반드시 갚아 준다.

진혁이 수긍하는 눈빛을 본 이브라힘이 주머니에서 이집트 자원 지도를 꺼내 보여 줬다.

“우리나라에서 개발 중인 광구야. 여기 X표시 된 곳 중에 하나를 사고 대금을 내는 거지. 우리가 깡패도 아니고, 그냥 뺏을 수는 없잖은가?”

진혁이 어금니를 피나게 물었다.

철두철미한 놈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중에 있을지 모르는 비난을 모면하겠다는 의도였다.

진혁이 지도를 건성으로 훑어봤다.

자원 개발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이렇게 내놓은 것을 보면 가능성이 없는 곳임에 틀림없었다.

그래도 찍긴 찍어야 했다.

그냥 육지에 있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려던 진혁의 손이 멈췄다.

‘무슬림을 위해 지중해를 건너라.’

아메드가 전한 대이맘의 말이 왜 그때 떠올랐는지는 몰랐다.

진혁의 손가락이 육지를 떠나 위로 가다가 어느 한 군데에서 딱 멈췄다.

“여기로 하지요.”

“어디 보자…….”

이브라힘이 가지고 간 자료로 해당 광구에 대한 내용을 읽어 줬다.

“지중해의 쇼륙(Shorouk) 광구군. 이탈리아 ERI가 탐사하는 곳인데, 나중에 가스가 발견되면 정부가 51%의 지분을 가진 회사를 세워 개발과 판매를 해. 그 권리를 사는 거야.”

“그렇게 하지요.”

“그럼 계약서를 준비하는 동안 자네는 자네대로 할 일이 있지?”

“전화를 쓰게 해 주십시오.”

이브라힘의 눈짓에 가부르가 진혁의 핸드폰을 건네줬다.

두 사람이 나가자 잠시 고민하다가 스미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정말 미스터 서가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안 좋은 일이 있으시다니 해결되신 겁니까?

“어떻게 아신 겁니까?”

-카심 씨 전화를 받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조나단이 기사도 썼고요.

스미스의 이어진 말에 진혁은 왜 이브라힘이 찾아와 이런 제안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외압으로 자신을 더 이상 붙들고 있을 수 없자 풀어 주면서 이득을 취하려는 거다.

이런 사정을 알았다면 좀 더 좋은 조건으로 거래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미 버스가 지나간 다음이었다.

“지금 제 계좌의 평가액이 얼마나 됩니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스미스가 말했다.

-3억 달러가 조금 넘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아베 총리가 당선되고 나서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

“전량 매도해 주십시오.”

-전량을 말입니까? 일본에 또 문제가 생기는 겁니까?

“아닙니다. 당분간은 계속 오를 겁니다.”

-그럼…….

“그 정도만 아시고 매도해 주십시오. 나중에 계좌를 알려 드릴 테니 거기로 3억 달러를 보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건강하게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스미스가 어떤 상황인지 짐작하고 더 묻지 않아 편했다.

진혁이 참았던 분노를 터트렸다.

“아아아아악!”

와장창!

테이블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점상을 치고 있는데 돈이 없어 반대 매매를 당할 수밖에 없을 때의 심정은 주식쟁이가 아니면 모른다.

그것은 살을 떼어내는 아픔과 같았다.

이브라힘에 대한 분노가 더 커졌다.

* * *

이집트 국영 TV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속보를 내보냈다.

진혁이 카메라를 보고 서 있었다.

-알라딘의 서진혁입니다. 저는 잡혀 간 게 아니라 자원 개발 투자를 위해 광구를 둘러보러 다녔던 겁니다. 방금 석유부와 지중해의 쇼륙 광구에 3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계약을 체결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어 계약서까지 친절하게 화면에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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