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짝짓기의 계절
회사로 가자 소식을 듣고 다들 기다리고 있었다.
소마야를 비롯한 여직원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남자들도 눈가가 벌게져 있었다.
TV 방송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카심이 재빨리 알려 진혁이 악명 높은 국가안전부에 잡혀간 것을 알고 다들 구명을 위해 여기저기 연락했었다.
일일이 어깨를 두드려 주고 사장들과 회의실로 가서 앉았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사장님이 더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회사는 문제없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죄송해요. 흑…….”
아자데가 겨우 참았던 눈물을 다시 흘렸다. 진혁의 눈도 벌게졌다.
“제가 없는 동안 다들 고생하신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염치없이 좀 더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해야겠습니다.”
“사장님!”
“당분간은 좀 나가 있어야 합니다.”
이브라힘은 철저했다. 돈이 입금되자 두 가지 조건을 더 걸었다.
TV 기자 회견과 즉시 출국이었다.
선택권이 없는 진혁은 받아들여야 했다.
“이 시간부로 갈리 사장님을 총괄 사장으로 임명합니다. 모두 그의 지시에 따르세요.”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사장님.”
“그만!”
진혁이 크게 소리쳐 일단 말들을 막았다.
“우리가 책임져야 할 직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전화도 있고, 요르단은 지척입니다.”
“…….”
“이보다 더 큰 위기도 힘을 합쳐 이겨내 온 우리들입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겁니다. 전 여러분을 믿습니다. 편하게 떠나게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사장님. 돌아오실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 * *
진혁은 입구까지 따라온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카심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
“혼자 가서 미안해요, 카심.”
“무슨 일 있으면 정말 연락하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카심을 떼어 놓느라 한동안 고생해야 했다.
출국장으로 들어간 진혁이 여기저기 전화해 인사를 했다. 자신의 구명을 위해 이집트 정부를 압박해 준 이들이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 지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진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인터넷 세대인 그녀가 SNS로 퍼진 조나단의 기사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놀란 그녀는 결국 카심에게도 연락을 했다. 그래서 진혁이 풀려나자마자 제일 먼저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며칠간은 그녀에게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진혁도 감정이 북받쳐 그녀를 꼭 안아줬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두 사람 모두 상관하지 않았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부모님과 함께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다시 하기 싫은 경험이었지만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지민을 생각하는 마음이 사랑이라는 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감정에 취한 진혁이 손을 들어 지민의 턱을 들고 그토록 보고 싶던 고양이 눈을 바라봤다.
눈물로 마스카라가 흘러내려 엉망이었지만 진혁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진혁이 입술을 붙였다.
“와!”
“결혼해. 결혼해.”
짝짝짝짝짝.
주변 사람들도 환호와 박수 소리로 두 사람의 사랑을 축하해 줬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 안에서 지민의 잔소리에 엄청나게 시달려야 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다며 몇 번이고 약속을 한 후에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지민이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신다는 사실이었다.
지민과 늦게까지 함께 있다가 집에 바래다주고 호텔에서 자고 나왔다.
입구로 가자 박이동이 RV 차를 주차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저 때문에 아침부터 고생 많으십니다.”
“사장님이 큰일을 겪으셨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이렇게라도 건강하게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진혁은 한국에 오래 머물러야 할 것 같아 박이동에게 차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새 차라 아직 비닐도 벗겨지지 않았는데, 덜 빠진 가죽 냄새가 오히려 기분을 좋게 해 줬다.
당장 지민을 옆에 태우고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고 싶었지만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동성F&B로 가자 김상조와 신용찬이 기다리고 있다가 업무 보고를 했는데, 계획대로 차질 없이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진혁은 그 자리에서 김상조를 부사장에 임명하고, 신용찬도 이사로 승진시키면서 그에 따른 부하 직원들의 진급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박이동도 비서실장이란 직함을 갖고 정식 직원이 되었다.
진혁은 다음 날 강릉으로 출발했다.
갑자기 나타난 아들의 모습에 부모님이 놀라면서도 반가워하셨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죽음에서 벗어나신 듯 얼굴이 좋아 보였다.
스페이스 워커는 초반에 인지도를 탄탄히 다져 놓았고, 한지철이 관리를 잘하고 있어 매출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창고와 매장에 들러 일을 돕자 다음 날에는 지민이 내려왔다.
두 사람은 시치미를 떼고 각자 부모님의 일을 도왔다.
일이 끝나고 저녁은 진혁이 외식을 하자고 졸라 횟집으로 갔다.
홀이 아닌 방으로 들어가 비싼 돔회를 시켰다.
다른 날과 다른 느낌에 촉이 좋은 어머니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무슨 일 있니?”
“왜요?”
“분위기도 그렇고. 혹시 둘이 싸웠니? 하루 종일 서로 말을 안 하는 것 같아서.”
어머니의 지적에 아버지도 이상함을 느꼈다. 다른 때 같으면 둘이 투닥거리느라 정신없을 텐데 오늘은 어째 조용했었다.
진혁이 자세를 바로 했다.
“아버지,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지민 씨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정식으로 교제를 허락해 주십시오.”
옆에 앉은 지민은 고개를 팍 숙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놀란 표정을 짓던 어머니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난 좋다. 지민이라면 무조건 찬성이다.”
“사람이 좀 신중해야지.”
“당신은 지민이가 싫어요? 주말이 되면 나보다 더 기다리시면서.”
“험험. 싫다는 게 아니라 신중하자는 거지.”
어색한 헛기침을 한 아버지가 물었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냐?”
“예, 아버지.”
“지민이도?”
“네, 아버님.”
“너희 둘이 그렇게 결정했다니 나도 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찬성이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지민이 부모님에게는 인사드렸고?”
“이제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우리야 지민이를 오래 봐서 바로 허락한다만 그쪽 부모님 마음은 또 다를 수 있다. 가서 잘해라.”
“알겠습니다.”
큰 산을 넘은 진혁은 오랜만에 아버지와 편하게 술을 마셨다.
하지만 지민은 아니었다.
이미 다 알면서도 다시 이것저것 묻는 어머니의 관심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이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처지라 이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다음 날 오후에는 지민을 태우고 서울로 출발했다. 영동 고속도로는 오늘도 변함없이 막혔다.
“고생 많았어요, 지민 씨.”
“맨날 해 오던 일인데요, 뭘.”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다들 좋은 분이시라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어머님이 더 관심을 가져 주셔서 부담스러운 것 빼고는요.”
“다행이네요. 우리 부모님이야 당연히 찬성하실 줄 알았지만, 지민 씨 부모님은 어때요?”
다음 주말에는 제주도에 가서 지민의 부모님께 허락을 받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우리 부모님도 좋으신 분들이세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휴. 다행이네요.”
말과는 달리 진혁의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여자 친구 집에 처음 인사 가는 모든 남자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 * *
그 시각, 서울 시내 호텔 커피숍에서는 또 다른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진홍입니다.”
“정인영이에요.”
천진홍은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살결이 고운 미남이었다.
태도도 예의 바르고 격식을 갖춰서 어디 내놔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런 훈남이 자신을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다는 사실에 인영은 진혁의 배신으로 우울했던 기분이 나아졌다.
그 때문에 레스토랑에서 식사까지 같이 했다.
진혁과의 만남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업 이야기였지만 진홍은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음악을 좋아한다더니 예술 쪽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이야기 대부분은 진홍이 했고, 인영은 듣는 편이었다.
“인영 씨는 어떤 음악을 좋아하세요?”
“딱히 좋고 말고가 없어요. 사업하느라 바쁘다 보니 솔직히 음악을 들을 시간도 없어요.”
“그렇군요.”
실망이 스치는 진홍의 표정에 인영이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진홍 씨가 좋은 분이라는 것은 알겠어요. 하지만 우린 서로 많은 것이 다른데 왜 저를 보길 원하신 건가요?”
“글쎄요. 인영 씨의 기사를 모두 봤습니다. 저와 다른 모습에 끌렸다고나 할까요? 열정적으로 사시는 모습도 부러웠고요.”
“다른 모습에 끌렸다?”
“아시겠지만 저희 집안은 금융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종금회사 부사장으로 앉아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저는 음악이 좋거든요. 솔직히 회사 나가는 게 곤욕입니다.”
“…….”
“그런데 인영 씨는 자신의 일을 정말 사랑하시는 것 같았고, 그것에 자긍심도 크신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가 제게 원하는 모습이거든요. 부러워서 더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인영은 진홍이 왜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궁금함이 생겼다.
“그럼 하고 싶은 일을 하시면 되잖아요?”
“할아버님이 좀 엄하시거든요.”
진홍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천 회장은 6・25 전쟁고아로 부산 국제 시장 구두닦이 출신이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일수놀이로 해서 재산을 모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서울로 올라와 명동에서 사채 장사를 하며 지하 경제의 큰 손으로 군림하다가 IMF 때 무너진 우량 종금회사를 인수해 금융업을 하면서 세간에 알려진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혹독하게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터라 천 회장의 모든 가치 기준은 돈이었다.
그래서 피도 눈물도 없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런 냉혹함이 없었다면 지금의 부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손자가 ‘딴따라’에 미쳐 있다는 것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 인영의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갔다. 정진호가 말한 ‘기회’라는 말이 떠올랐다.
인영이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주총에서 천 회장의 반대를 막기 위한 게 전부였다. 천진홍이 누구인지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들을수록 호기심이 생겼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어났다.
예의 바르게 차문을 열어 주며 진홍이 물었다.
“다시 전화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담스럽게 해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냥 오늘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저도 진홍 씨의 이야기가 재미있었어요. 연락 주세요.”
인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타자 차가 출발했다.
* * *
동성F&B가 사무실을 확장했다.
프랜차이즈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아래층의 넓은 공간으로 이동하게 됐다.
부사장이 된 김상조는 원래 사용하던 공간을 주말에 사장실로 꾸몄고, 진혁이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편하게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신경 썼다.
새로 세팅된 컴퓨터를 켜서 메일을 열자 갈리가 보낸 업무 보고 일지가 와 있었다. 따로 지시한 적도 없는데 갈리는 매일 이렇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진혁은 박이동과 함께 서울을 떠났다.
을씨년스러워 흉물로 보였던 구룡포 공장이 지금은 산뜻하게 단장돼 지역의 명물이 되어 있었다.
외관만 그런 게 아니라 전성기 때와 마찬가지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어 지역 경제에 큰 힘이 되고 있었다.
포항시 남구청장이 인사를 하고 싶어 하더라고 김상조가 알려 왔지만 진혁은 무시하라고 했다. 정치인과 얽혀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권기남 공장장에게 생산 현황과 애로 사항을 듣고 산청으로 출발했다. 물론 봉투를 건네서 직원들과 회식을 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산청 공장도 예전의 그늘에서 벗어나 활기가 느껴졌다. 이전에는 기계가 멈춰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지금은 쉼 없이 돌고 있었다.
젊은 여성들 사이에 다이어트 식품으로, 전업주부들에게는 샐러드의 첨가 식품으로 알려지면서 주문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산청 공장 직원들과 회식을 하면서 술을 먹어 그날은 지리산 온천 호텔에서 묵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는 한지철과 희준을 만났는데, 지민과 함께 있는 모습에 그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 둘이 정식으로 사귀기로 했습니다.”
희준은 한동안 호들갑을 떨며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굴었지만 이내 형수네, 제수씨네 하면서 살갑게 대해 줘 어색함이 사라졌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한지철의 얼굴에는 그늘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