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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01화 (101/307)

101화. 관계 정리

다음 날 점심때 진혁은 강남의 고급 한정식집으로 들어섰다.

김선혁 전무가 오랜만에 전화를 해 와서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예약된 방으로 들어서던 진혁의 동작이 멈췄다.

정호영이 함께 있었다.

“할 말이 있었는데, 마침 두 분이 만난다고 하길래 예의가 아닌 줄 아는데도 같이 오게 됐습니다.”

말이 길다는 것은 그만큼 찔리는 게 많다는 의미였다.

가볍게 인사하고 앉아 곤혹스러운 표정의 김선혁을 보고 나서 정호영에게 눈길을 돌렸다.

“먼저 말씀하시지요.”

“이집트에서 어려운 일을 겪었다는 것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어떻게든 도움을 드렸을 겁니다.”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서 사장께서 이집트 정부로부터 입국 금지 되셨다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카이로 지사를 계속 관리하신다는 게 아무래도 어려우실 것 같아서요.”

“……!”

“우리는 서 사장님의 능력을 믿지만 다른 분들은 우려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 주총으로 여기 김 전무님이 부사장님 자리에 오르셔야 하는데 혹여라도 그 부분이 흠이 될까 걱정입니다.”

뒷말은 안 하니만 못했다.

정호영은 치졸하게 김선혁의 처우를 거론하며 압박하고 있었다.

진혁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이렇게 막 나간다면 거기에 맞게 행동해 주면 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분간은 우리가 경영을 맡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입국 금지 조치가 끝나면 그때는 또 다시 논의해서 결정하도록 하지요.”

“그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이쯤에서 갈라서서 각자 길을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호영은 말문이 막혔다.

진혁이 이렇게 쉽게 자신의 지분을 포기할 줄은 몰랐다.

50억의 자본금을 반반씩 투자했었다.

정호영이 답하기 전에 진혁이 먼저 말했다.

“25억이 들어갔고, 정확한 것은 확인봐야겠지만 예전보다 서너 배는 매출이 신장되었을 겁니다. 그 점은 감안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걸 전부 감안하는 건 좀…….”

“다 해 달라는 건 아닙니다. 두 배인 50억에 넘기는 것으로 하지요.”

“…….”

“어려우실 것 같으면 제가 그 돈을 드릴 테니 태후에서 빠지셔도 됩니다.”

“그건 안 됩니다.”

정호영이 바로 고개를 젓는 모습에 지켜보던 김선혁이 입맛을 다셨다.

원래는 30억에서 40억 사이에 결정하자고 이야기가 됐었다. 그런데 진혁이 먼저 선수를 치고 나오는 바람에 이제 꼼짝없이 50억을 내놔야 할 상황이었다.

주저하는 정호영의 가슴에 진혁이 불을 질렀다.

“참, 정 부사장님은 이 일에 대한 결정권이 없지요. 회장님께 그렇게 전해 주시면 됩니다.”

“아니요. 내가 정합니다. 그렇게 합시다. 50억에 우리가 서 사장 지분 전부를 인수하는 것으로 합시다.”

정호영은 자존심을 건드리자 바로 반응했다.

진혁의 제안대로 결론이 나버렸다.

“계약은 내일 회사에서 하는 것으로 합시다. 같이 식사라도 하고 싶지만 선약이 있으니 먼저 일어나지요.”

“내일 회사에서 뵙지요.”

진혁에게 당했다는 느낌에 찜찜한 표정으로 일어나 나가려던 정호영이 잠시 멈췄다.

“참, 인영이가 요즘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 잘되는 것 같습디다.”

“좋은 일이네요.”

“서 사장도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결혼하시면 외국에 나가 사실 테니 서서히 신부 수업을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네요.”

“……!”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시오.”

정호영이 서진혁의 굳은 얼굴에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 김선혁은 배웅하러 따라 나갔다.

혼자 남은 진혁이 방금 전의 일을 떠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건 다 옛말이었다.

얼마 후 돌아온 김선혁이 사과부터 했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내내 찜찜했는데 넉넉하게 받고 털 수 있으니 제가 고맙죠.”

진심이었다.

처음에는 태후라는 이름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애물단지였다.

그래서 조만간 김선혁을 만나 상의하려 했는데 정호영이 먼저 나서는 바람에 일이 쉽게 풀렸다.

태후에서 유일하게 신세진 사람이 김선혁이었다.

그가 자신을 믿고 보내 준 100만 달러를 종자돈으로 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만일 김선혁이 협상 상대로 나왔다면 상당히 껄끄러웠을 거다.

그건 김선혁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당연히 식사 시간은 즐거웠다.

식사를 하면서 가볍게 한잔하기로 하고 맥주를 시켰다.

“좀 이르지만 부사장님으로 영전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네 도움이 있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저도 부사장님이 믿어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마주 보고 웃으며 잔을 비웠다.

“아가씨와는 완전히 끝난 거냐?”

“원래 시작도 하지 않았던 관계인데 주변의 부추김으로 오해가 있었습니다. 친구로 지내기로 했습니다.”

“두 사람이 그렇다면 그렇겠지만 아무래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을 듯싶다. 그 시작은 조만간 있을 화장품 분사일 듯하고.”

“인영 씨는 능력이 있으니 잘해낼 겁니다.”

“그렇지. 그리고 야망도 있으신 분이다. 비록 지금은 감추고 계시지만.”

진혁의 눈이 반짝였다.

김선혁이 하는 말이라면 그냥 흘려들을 게 아니었다.

“궁금했던 게 있습니다.”

“뭐냐?”

“최영재 과장을 보낸 게 누구 생각입니까?”

“보자마자 전화할 줄 알았는데 용케 지금까지 참았구나. 아가씨가 부탁한 일이다.”

“……!”

“이렇게 되고 보니 친구로 지내기로 한 것은 잘한 것 같다.”

두 사람은 한 잔씩 더 하고 일어났다.

회사로 돌아온 진혁은 갈리에게 전화해 태후와의 일을 들려주고 별도로 알라딘 무역 설립을 지시했다.

정호영은 실수했다.

자신의 능력을 포장하는 데 능숙한 최영재의 일방적인 보고를 의심했어야 했다.

카이로 지사의 역할 대부분은 단순한 중개 업무였다. 바이어는 핫산과 현지 직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다음 날, 진혁은 태후빌딩에 들려 50억에 지분을 넘기는 계약서에 서명한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모집에서 지민을 만났다.

이모는 이제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주에 진혁의 부모님께 허락을 받았고, 이번 주에는 제주도에 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밥을 다 먹은 것을 보고 숭늉을 가지고 온 이모가 빈 의자에 은근슬쩍 엉덩이를 붙였다.

“맛있었어?”

“네. 언제 먹어도 이모 음식은 최고!”

“그건 말해 봐야 입만 아프고. 오늘도 호텔에서 자?”

“그럴 생각인데. 왜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맨날 호텔에서 자는 게 안쓰러워서. 빈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빈방요?”

“지민이 아파트가 방이 두 개야.”

당장 뾰쪽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모!”

“이미 허락받았다며. 지민이 부모님도 진혁이 보면 당연히 좋아하실 거야. 그러니까 이참에 그냥 같이 살어.”

“헐.”

“요즘 여기 학생 중에도 동거하는 애들 많아. 돈 아낀다면서.”

“됐거든요. 진혁 씨, 그만 가요.”

지민이 붙잡아 끄는 바람에 진혁은 어쩔 수없이 일어나야 했다. 나가면서 몰래 이모에게 엄지를 세워 줬다.

‘이모 최고!’

자주 가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분위기가 계속 어색하자 진혁이 투덜거렸다.

“이모는 괜한 이야기를 해서는.”

“아니요. 이모 말씀이 맞아요. 그동안은 제가 신경을 못 썼어요.”

“그럼…….”

“쓸데없는 생각 마시고요. 제주도 다녀오면 같이 숙소를 알아봐요.”

좋다가 말았다.

“그건 그렇고, 요즘 지민 씨 회사 일은 어때요?”

“이제 자리 잡아서 많이 안정됐어요. 특별히 힘든 일은 없어요.”

답하는 지민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안정된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의미로 성취감이 없어졌다는 것과 같았다.

자신이 사업을 시작할 때도 모든 게 백지라 하나하나 다 챙겨야 하니 힘들긴 했지만 보람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해진 틀 속에서 주어진 일이 전부였다. 가끔은 인간인지 기계인지 회의감이 들 때가 있었다.

진혁도 그런 적이 있기에 지민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회사를 옮겨 보는 건 어때요?”

“회사를요?”

“동성F&B에서 ‘할랄 여행’ 프랜차이즈 사업을 진행하는 것을 알 거예요. 이제 거의 준비가 끝나 가맹점들이 오픈할 텐데, 거길 관리할 인원이 마땅치 않아서 경력자를 뽑고 있어요.”

“진혁 씨 도움으로 채용되는 건 싫어요.”

“누가 특별 채용한대요? 전 사업에는 냉정합니다. 지민 씨가 부모님의 총판과 대리점을 도와준 경험이 있으니 적당할 것 같아서요. 새롭게 시작한 일이라 보람도 있을 거고요. 응시해 보라고 알려 준 거예요.”

“……생각해 볼게요.”

지민의 성격상 더 밀어붙이면 역효과라는 걸 알기에 그 정도로 끝냈다.

정호영이 지민에 대해 한 말이 계속 거슬렸다.

* * *

금요일 저녁, 지민이 퇴근하자마자 공항으로 가서 제주로 갔다.

미리 예약을 해서 렌트카를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지민이 부모님이 사시는 곳은 한림읍에 있는 협재 해수욕장 근처였다.

미리 연락을 해 놔서 기다리고 계셨다.

“어서 와요.”

포근한 인상의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유도 선수라도 되는 듯 단단한 인상이었다. 여동생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하고 뒤에 서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버님. 서진혁입니다.”

“내가 왜 자네 아버지야?”

“이이는, 사람 무안하게.”

첫 느낌이 싸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깔끔한 게 지민이 어머니의 부지런함을 닮은 것 같았다.

“절 받으십시오, 아버님.”

“아버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그러건 말건 진혁은 큰절을 올렸다.

일어난 진혁이 무릎을 꿇고 앉자 지민도 옆에 앉았다.

“지민 씨를 사랑합니다. 교제를 허락해 주십시오.”

“저도 진혁 씨를 좋아해요.”

“그래. 잘 왔어요. 그쪽 부모님도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아세요?”

“지난주에 가서 인사드리고 허락받았습니다.”

“잘했네. 당신도 뭐라고 하셔야지요.”

아내의 재촉에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세동이 물었다.

“자네 부모님이 지민이를 처음 보고 허락하신 건가?”

“아닙니다. 지민 씨가 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어 그동안 여러 번 보셨습니다.”

“그럼 그렇지. 나도 마찬가지야.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바로 허락한다면 그게 이상한 거야.”

“이이는……. 지민이가 어디 쉽게 생각하고 데려왔겠어요?”

“어허. 아무튼 나는 좀 두고 봐야겠어. 그러니 그렇게들 알아.”

김세동이 결정하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비록 집 안이라지만 생긴 대로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

허락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반대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에서 저녁을 먹었다.

옥돔구이에 갈비찜도 맛있었다. 김치와 각종 나물은 물론 젓갈도 식욕을 돋웠다.

시장했던 진혁이라 세 공기나 비웠다.

다금바리를 넣어 끓인 된장국은 두 그릇이나 먹었다.

“자넨 여기 밥 먹으러 왔나?”

“아닙니다. 어머님 솜씨가 너무 좋으셔서요.”

“젊은 사람이 아부만 늘어서는. 쯔쯧.”

“잘 먹으니까 좋은데 자꾸 왜 그러세요?”

아내의 핀잔 때문인지 김세동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가서 앉았다.

모녀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술상을 준비하는 바람에 둘만 되자 분위기가 엄청 어색했다.

김세동이 먼저 침묵을 깼다.

“무슨 일을 하는가?”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직장을 다니는 게 아니고?”

“다니긴 했습니다만 제 사업을 해 보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김세동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IMF로 대기업은 물론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부도를 맞아 패가망신했었다. 지금도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은 마찬가지임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그런 불안정한 사내를 만난다는 데 좋아할 아버지는 없었다.

“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이시고?”

“회사에서 퇴직하시고 고향으로 내려가셔서 지민 씨가 맡은 브랜드의 총판과 대리점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 인연으로 만난 거군. 형제는?”

“독자입니다.”

“독자?”

김세동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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